〈 7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06화
“아..아닙니다!”
기겁을 하는 시종들.
나는 카이드로젠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우우.”
“히익.”
“조심해라.”
“예! 폐하!”
다행히 카이드로젠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빠져있는 에린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왜 굳이 본인을 재상으로 앉히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폐하.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뻔한 걸 뭐하러 묻느냐? 당연히 칸 제국을 위해서다. 썩은 물을 갈아치우는데 이만한 이유면 충분하지.”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에린의 질문에 대답했다.
“조만간 나는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서 황궁을 비울 것이다. 그사이에 자네는 폰 그라츠를 주시하며 재상직에 취임할 준비를 하거라. 일단 ‘황궁 자문관’이라는 역할을 먼저맡고 있으면 딱이겠군. 돌아오면 정식으로 인가를 내리도록 하겠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폐하께서 황궁을 오래비우시면 분명 안 좋은 소리가 나올 텐데요.”
“그건 이제부터 네 능력에 달렸다. 알아서 처신하도록.”
“...일단 알겠습니다, 폐하. 갑자기 이런 중책을 맡겨주시니 아직 머릿속이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재상이 된 후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항문 고기를 질겅거리며 잠시 침묵했다.
사실 재상이라는 직책이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28살의 중소기업 회사원.
일한 지 2년이 됐지만, 회사에서의 계급은 고작 말단 사원이었다.
조그만회사도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는데 재상이 무슨 일을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여기서 더 웃기는 사실은 카이드로젠의 머릿속에도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뻔뻔할 정도로 고요했다.
이 망할 카이드로젠···.
아는 게 하나도 없냐?
“으음...재상은 말 그대로 국가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모두 알다시피 현 재상은 술에 취해 본인의 임무를 아예 잊어버린 듯하지. 에린, 자네가 국가의 모든 것을 관리해라.”
내 말을 듣고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은 모습.
하긴 지금까지 신관으로서 기도만 주구장창 해왔으니 국정 운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잘 모르니까.
일단 간단하게 얼버무리고 넘어가자.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칸 제국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전진한다.”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크흠! 단계가 몇 가지 있는데 자세한 건 재상이 된 후에 알려주마. 궁극적인 목표는 칸 제국의 부국강병이라고 생각하거라.”
“부국강병이요?”
“그래. 지금은 나를 포함한 썩은 물들이 너무 많아서 나라가 병들고 있어. 허구한 날 황제가 전쟁이나 일으키고 황실에서 연회나 열고 놀고 있질 않나, 근위병이 부족해서 도심에는 마수가 튀어나와서 시민들이 위험하질 않나, 그리고 재상이란 놈은 일도 안 하고 어디에 처박혔는지 도통 보이질 않아. 이러다 재상이 누군지 얼굴도 까먹을 판이야.”
“폐하께서 썩은 물이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봐도 나라가 망하는 꼬락서니 아니더냐? 선제께서 이룩하신 긍지 높은 칸 제국의 역사가 무너져가는 것을 더이상은 지켜볼 수 없구나. 다시 제국의 전성기를 열어보고자 함이니 에린 자네가 힘 좀 써주었으면 좋겠어. 내 말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겠나?”
에린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뭐야 이 친구, 또 우나?’
이렇게 물러가지고 재상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으려나 걱정이다.
“폐하께서 이렇게 나라를 생각해주시다니 소인은 가슴이 너무 벅차올라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오해를 한 건 오히려 접니다! 폐하. 폐하께서 속이 이렇게나 깊으신 분인 것을 인제야 깨달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슬슬 시동 거는 에린.
“저 또한 폐하의 생각과 같습니다. 나라 안에 썩은 물들을 도려내고 제국을 일으키겠습니다. 더이상 칸 제국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저를 거두어 주신 은혜에 보답해서 폐하의 염원을 제가 반드시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울먹거리면서도 강단 있는 목소리로 외치는 에린.
나는 내심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역시 그녀를살려두길 잘했어!’
“반드시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칸 제국! 만세!”
급기야 만세까지 외치는 에린.
“네 놈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느냐? 같이 외치거라! 카이드로젠 폐하, 만세!”
“만...만세? 만세!”
"만세!"
시종들을 독려하며 함께 외치는 만세 소리.
조용하던 연회실은 난데없이 우렁찬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카이드로젠 폐하 만세!”
**
그녀의 주도로 난데없이 시작된 만세삼창이 끝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 에린.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금세 조신한 숙녀로 다시 돌아왔다.
“앞으로 이렇게 부담스러운 행동은 삼가도록 해라.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 했다.
“예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머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에린.
그래도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에 다들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다들 얼추 식사가 끝났으면 들어가 보아라. 에린과 할 얘기가 있다.”
“알겠습니다. 폐하. 필요한것이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요리사와 시종들은 모두 물러나고 테이블에는 둘만 남았다.
먼저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시작했다.
“폐하. 자세한 국정 운영은 저도 고민해봐야겠습니다만, 당장 대응책이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타조 알처럼 생긴 커다란 달걀을 포크로 쿡 찍으며 물었다.
“제가 폐하를 적극적으로 모시려면 마법사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합니다. 국정은 소수의 사람만 힘을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음, 그래서?”
“폐하께서 마법사들을 더이상 감옥에 가두지 않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감정의 골이 이미 깊어진 상태라서 먼저 행동을 취해야 할 겁니다. 그들을 더이상 핍박하지 않는다고 해서 폐하를 따르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커다란 달걀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을 강압적으로 권위를 박탈하고 탑에 가두는 만행을 저지른 카이드로젠.
당연한 얘기지만 칸 제국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마법사들은 단 하나의 힘도 보태지 않았다.
“폐하 곁에서 장차 재상의 임무를 수행할 저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날아올 겁니다. 그들의 지지가 없다면 폰 그라츠가 순순히 재상직을 내놓고 물러나지 않겠지요. 아시다시피 그는 워낙 권력욕에 취해있는 데다가 현시점에선 마땅히 대체 할 인물도 없습니다.”
“그래서 본론은? 앞으로 어찌하면 좋겠냐?”
“폐하께서 먼저 마법사들을 황궁으로 초대해서 형식적으로라도 그들의 마음을풀어야 합니다. 옛날처럼 권력으로 압박을 하시게 된다면 오히려 반발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
“아직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지만, 제가 재상이 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입니다. 민심이 천심이니까요.”
구구절절 옳은 얘기만 하는 에린.
그녀의 의견에 천 번 만 번 동의했다.
“하아.”
카이드로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침과 동시에 마법사들을 어떻게 내 편으로 끌어들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한숨이었다.
역시 쉽게 갈 수는 없겠지.
답답한 마음에 자연스레 표정이 일그러졌다.
“폐하?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으응? 노여워하는 건 아니고 그들을 어찌 위로해주면 좋을지 고민이구나.”
“으음.”
“어쨌든 내가 잘못한 일이니 뭐든 간에 성의를 표시해야겠지.”
“무슨 방안이라도 있으십니까?”
카이드로젠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방안.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화해의 제스쳐를 생각나는대로 열거했다.
“일단 직위를 박탈당한 마법사들은 다시 복직시켜주자구. 그냥 복직만 시켜주면 안 되고 위로금도 넉넉하게 넣어줘야지. 음그리고···.”
에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황제가 변했다는 것은 진작에 느꼈지만, 완전히 적응을 한 건 아니었다.
폭군답게 시민들을 착취하고 황실의 돈을 펑펑 써대던 그의 입에서 위로금이라니.
카이드로젠과 ‘위로금’이라는 단어는 앞선 ‘평화’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상극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신기한 건 아직 황제의 말이 끝나지않았다는 것이다.
“탑에서 죽은 마법사도 있지? 어휴. 얼마나 억울했을까.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던 자들이 고작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으니···. 죽은 마법사들을 위해 특별히 제사를 지내주는 게 좋겠어. 장례식은 황제인 내가 주관해서 진행할 테니 자네가 나중에 일정을 잡아주게.”
“폐...폐하···.”
“왜 그러지?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아...아니 그게 아니오라···.”
에린은 잠시 뜸을 들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폐하께서 이렇게 지혜롭고 자비로우시니 가슴에서 감동이 벅차오릅니다! 선제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으응?”
“저 혼자 보기 아까운 너무나도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폐하!”
“내가 아까 부담스러운 행동은 삼가라고 안 했나?”
“아 죄송합니다. 너무 기뻐서 그만···.”
야단법석을 떠는 에린을 보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카이드로젠이 얼마나 밑바닥이었으면 늘상 있을법한 기본적인 대화를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감격스러워하고 기뻐했다.
내가 하는 행동들이 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되고 있었다.
‘이거 카이드로젠한테 고마워해야 해, 말아야 해. 참 난감하네.’
“폐하의 명대로 피해받은 가문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하겠습니다. 장례식은 폐하의 개인적인 일정이 끝나시는 대로 진행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좋다, 근데 잠깐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아무래도 위로금을따로 전달하는 것보다는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이야.
“예?”
“그 위로금···. 내가 직접 하사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