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05화
촤아아악!
물렁한 살을 파고들며 검이 만든 예리한 단면.
이름 모를 내시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잠시 후 밖에 있던 시종이 내시의 절규를 듣고 내 방으로 뛰어왔다.
“폐···. 폐하···. 괜찮으십니까?”
“이 쓰레기를 당장 불에 태워라.”
“...당장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늘상 있는 일인 듯 자연스럽게 시체를 끌고 나가는 시종들.
탐관오리라고 할 수 있는 부패한 신하를 직접 마주하니 슬슬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감이 왔다.
어린 황제를 살살 구슬려서 이득을 보려는 자들.
적국에 나라를 팔아먹고 칸 제국을 망하게 하려는 반역자들.
결국, 나중에는 모두 내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자들이다.
직접 경험해보니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했다.
일개 내시가 술 한잔하자며 들이대는 꼴이라니.
당장 행동에 나서야 했다.
“에린 킨드라를 내 앞으로 데려오도록.”
**
에린 킨드라.
자네스 총독의 모략으로 황제에게 죽게 될 운명이었던 에린은 내가 카이드로젠 황제로 빙의하게 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황제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
칸 제국의 대표적인 지략캐릭터.
릴레나 총사령관과 함께 이 시점에서 가장 믿을만한 인물.
그녀를 데려와서 측근으로 활용하는 것이 칸 제국을 위한 필수 요소라 판단했다.
‘비록 소설 속에 에린 킨드라가 국정을 운영한 적은 없지만···.’
카이드로젠과 다르게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
킨드라 가문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대마법사.
칸 제국의 마법사와 귀족들의 확고한 지지층.
에린의 장점은 카이드로젠의 단점을 완벽하게 상쇄시켜 줄 수 있었다.
황제가 민심을 아주 조진 상황에서 모두에게 평판이 좋은 에린을 국정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크크큭. 당연히 이득일 수밖에 없고말고.”
기분 좋게 웃다가 문득 내 웃음소리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진짜 카이드로젠처럼 웃고 있는 나.
빙의해서 꽤 시간이 흘렀으니 동기화가 끝난 것일까.
황제의 권력을 이용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점차 익숙해짐을 느꼈다.
특히 조금 전 감히 황제 앞에서 건방을 떨던 내시를 검으로내려칠 때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정의를 위해.
칸 제국과 내 목숨을 위해.
제국을 좀먹는 벌레는 내 목숨을 위태롭게 하기에 간단하게 처단해버렸다.
폭군 카이드로젠이라면 전혀 이상 할 것 없다.
하지만 나는 누굴까.
카이드로젠을 방패 삼아 이렇게 변해버린 나를 류지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이튿날 에린이 황궁에 도착했다.
한창 음식을 세팅하고 있는 요리사와 시중들.
“폐하, 잉그람 대륙에서 가장 귀한 재료들로 만든 진귀한 요리입니다. 정성껏 만찬을 준비하였으니 마음껏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자랑스레 요리를 공개하는 요리사.
서른 명은 거뜬히 앉을 만한 둥근 테이블에 오감을 자극하는 음식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주방장을 따로불러서 미리 귀띔해둔 보람이 있었다.
과연 황제의 명대로 신경 쓴 흔적이 보이는 성대한 음식들.
“그대를 위해 신경 써서 준비하였으니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군.”
“폐하의 은총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에린은 가볍게 목례를 하며 수저를 집었다.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니 준비한 음식이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자, 시종들도 같이 들도록 하라.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으니 불편하구나. 이런 음식은 같이 먹어야 더 맛있는 법이다.”
“폐하, 저희가 어찌 폐하와 겸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두 분을 위한 만찬이오니 맛있게 드시옵소서.”
“음식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걸 어찌 다 먹는단 말이냐? 네 놈들은 나를 무슨 돼지로 아느냐?”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돼지로 볼 것 같으면 계속 서 있어도 좋다. 다만 내 칼을 감싸고 있는 칼집이 벗겨지더라도 난 모르는 일이니라.”
“며...명에따르겠습니다, 폐하!”
“감사히 먹겠습니다!”
시종들도 하나둘 자리에 앉아서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에린은 이런 광경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
하긴, 얼마 전에 경험한 폭군 황제랑은 차원이 다른 느낌일 것이다.
내키는대로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던 황제가 난데없이 시종들과 겸상이라니?
'기대해도 좋다. 난 류지상이니까.'
카이드로젠의 이런 모습이 그들에게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유지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신의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선한 인품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이 고기는 무슨 고기냐? 참으로 부드럽구나.”
정체불명의 고기를 씹으며 물었다.
마치 청담동 스테이크 전문점에서먹는 듯한 고급스러움.
부드러운 식감과 입안에 가득 차는 풍부한 육즙.
입에서 살살 녹아내리는 게 아주...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요리였다.
“에린, 그대도 들지. 매우 안정적인 맛이구나.”
“아닙니다. 폐하, 폐하께서 그 요리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아는데 제가 어찌 탐내겠습니까. 많이 드십시오.”
소설 속에 카이드로젠이 무슨 음식을 좋아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듣자 하니 이런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좋아했나 본데 이 황제 놈의 머릿속에는 별생각이 없는지 잠잠했다.
“내가 평소에 이걸 좋아했느냐? 하하. 요새 통 정신이 없으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구나.”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코카트라스의 항문으로 만든 요리입니다. 오늘은 맛이 어떠신지요?”
아하, 그렇구나.
저번에 봤던 그 익룡 같은 놈의 고기구나.
코카트라스의 항문이라.
고놈 참 쫄깃하단 말이야.
“뭐···. 뭐라고?”
“예?”
“항문?”
“예,그렇습니다.”
쾅
“내...내가 지금 코카트라스라는 마수의 똥구멍을 먹고 있다는 뜻이냐? 갑자기 왜 그러느냐? 난데없이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느냐? 감히 황제에게 항문 고기를 먹여?”
카이드로젠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요리사와 시종들을 다그쳤다.
칸 제국에 이렇게나 먹을 것이 없단 말인가!
고작 마수의 항문으로 요리를 하다니!
‘그 와중에 맛은 또 왜 그리 훌륭한지!’
“이 무슨, 중요한 자리에서 웃기지도 않는 음식이냐? 네 놈들의 입과 항문의 위치를 바꿔주면 되겠느냐?”
“폐하, 송구스러우나 폐하께서 제일 많이 찾으시는 음식입니다. 항문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마수들은 섭취하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배설기관도 없습니다. 단지 위치가 항문의 위치에 있어 명칭을 그렇게 정했사오니 염려 마시옵소서.”
당황한 요리사가 급히 항변했다.
가만 듣고 보니 그럴듯한 설명에 카이드로젠은 순순히 인정했다.
“하! 참 내. 그럼 이름이라도 바꾸도록 하라. 음식 이름이 항문 고기가 뭐냐, 입맛 떨어지게.”
“알겠습니다, 폐하.”
머쓱하게 다시 자리에 앉는 카이드로젠.
겸상하고 있는 시종과 요리사는 긴장하여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그가 더이상 분위기를 조져놓기 전에 본론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에린에게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를 해야지. 남자답게 잘못한 것은 사과하고 정식으로 일을 부탁하는 거야.’
조심스럽게 에린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에린 킨드라. 나에 대해 악감정이 남아있다는 것 잘 알고 있네.”
“저는 칸 제국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할 뿐입니다. 폐하께 악감정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얼굴에 표정은 없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
내가 그녀를 처형시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충성심이었다.
“내게 큰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네. 이렇게 말한다고 그대의 앙금이 풀릴 것으로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칸 제국의 황제답게, 아니 그 전에 사람 대 사람으로서 용기 내서 말해보겠다.”
내가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카이드로젠으로 빙의한 이상 책임을 통감하기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고···.
“당신을 처형시키려고 했던 것은 내 불찰이자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네. 이 자리를 빌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에린과 눈을 맞추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었다.
“자네에게 진심으로 미···. 미···.”
“폐하?”
테이블에 앉아있는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크흠!! 다시 하겠네. 미···. 미익···.”
"?"
갑자기 말을 절기 시작하는 카이드로젠.
왜 이러는 거야?
“미···. 미아···. 미···.”
“어디 불편하신가요. 폐하?”
갑자기 왜 말을 저나 했더니 황제의 자존심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집불통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놈의 의지가 나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카이드로젠! 이게 무슨 옹졸한 행동이야? 이 찌질한 놈아!’
“미···. 미친! 황제는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
“...”
"...예?"
갑분싸가 돼버린 테이블.
요리사와 시종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어휴! 카이드로젠 이 망할 자식! 고작 한다는 말이···.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께서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선제께서 돌아가신 것은 모두 제 탓입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서 너무나도 괴롭습니다. 제가 왜 에즈만토스 왕국과 동맹을 추진했는지 후회스러워 미칠 것만 같습니다. 폐하, 차라리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정적을 깨고 조곤조곤 얘기하는 에린.
눈가에는 당장이라도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이 맺혔다.
“자책하지 마라. 선제께서 돌아가신 것은 자네스와 망할 에즈만토스 왕국 때문이지. 내 기필코 페이튼의 모가지를 따버릴 것이니 기대하고 있거라.”
“폐하···.”
카이드로젠의 아버지.
죽은 아레스 빌라트 황제를생각하며 잠시 회한에 잠겼다.
칸 제국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성했던 전성기를 구가한 전설적인 황제.
선한 황제의 표본과도 같았던 아레스.
그가 죽고 난 후 칸 제국의 위상은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네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든 맡겨만 주십시오. 폐하.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에린의 의욕적인 목소리.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에린 킨드라. 칸 제국의 재상이 되어라.”
“예?”
“재상으로 취임해서 국정을 운영하거라.”
황제의 발언에 테이블에 있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특히 에린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하고 벌렸다.
폭군 황제가 자신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갑자기 재상직을 맡으라고 하니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에린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오나 현 재상은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분명 반발이 클 것이옵니다.”
칸 제국의 재상 폰 그라츠.
그는 선제와 함께 수많은 전투를 함께하며 지금의 칸 제국을 이끈 국민적 영웅이었으나···.
지금은 과거의 영광에 취해 폭정을 일삼는 술주정뱅이에 불과했다.
카이드로젠에 가려져 이미지가 크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황실의 재정을 파탄 내서 후에 칸 제국을 거하게 말아먹는 데 크게 일조한 인물이었다.
소설 속에 재상은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그라츠 가문의 사람들과 함께 술에 취해있었다고 전해졌다.
“아버지와 함께 제국에 헌신한 공을 생각해서 조용히 은퇴시킬 생각이다. 그가 황실의 돈을 맘대로 펑펑 써대고 있다는 구실로 압박하면 그도 인정하겠지. 굳이 피를 보고 싶진 않으니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구나.”
에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평화적이요?”
“그래.”
카이드로젠이 평화라는 단어를 얘기하니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위화감과 어색함.
순간 분위기가 살짝 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급기야 몇몇 시종들은 얼굴이 꿈틀거렸다.
‘웃참 중인가?’
나는 신하들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카이드로젠과 평화라는 단어는 상극과도 같은 단어였으니까.
하지만···.
잠잠하던 카이드로젠의 마음속에선 무언가가 치밀어올랐다.
“어이.”
“예!”
“혹시 말인데···.”
“말씀하십시오! 폐하!”
“내 말이 지금 웃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