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03화
“폐하! 위험합니다, 제 뒤로 숨으십시오!”
비밀스럽게 호위하던 무사 한 명이 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이런 멍청이. 위험한 건 내가 아니란 말이다.’
“벨라야!”
여자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듯한 절박한 비명소리.
정체 불명한 물체의 타겟은 여자아이였다.
워낙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탓에 검을 뽑아 들 새도 없이 황제는 본능적으로 물체의 앞을 막아섰다.
콰과과앙!
충격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끼며 아이를 보호했다.
급한 대로 왼팔을 들어 가드하고 남은 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물체가 무엇인지 떠올랐다.
‘코카트라스.’
나에게 달려든 정체불명의 물체는 잉대연에 나오는 마수 중 하나인 코카트라스였다.
수탉처럼 머리에 달린 보라색 갈귀가 특징이며 날개를 펄럭거리며 날아다니는 이 녀석의 최고 속력은 시속 80km.
지능이 없는 하급 마수지만 일반인들이 마주친다면 충분히 위협적인마수였다.
‘마을 한복판에 왜 갑자기 이런 마수가 튀어나오는 거야?’
간결한 동작으로 코카트라스의 몸통을 갈랐다.
예리한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는 선명한 금이 그어졌다.
코카트라스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절명.
뒤늦게 호위무사가 헐레벌떡 내게 다가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은데, 근데 네놈. 비밀로 시찰 나왔는데 대놓고 폐하라고 부르면 어쩌잔 말이냐? 너도 당장 이 코카트라스처럼 죽여달라는 뜻으로 알면 되겠느냐?”
“아, 죄송합니다. 폐하!”
그는 사색이 된 채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게 괜찮아 보이느냐? 호위무사란 놈이어찌하여 이리 행동이 굼뜨단 말이냐? 황제 직속부대고 뭐고 싹 다 갈아엎어 버리든가 해야겠군.”
우물쭈물하며 내 왼팔을 쳐다보는 호위무사.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얘기했다.
“폐하의 왼팔이 상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소매가 살짝 찢어진 사이로 피가 맺힌 팔이 보였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코카트라스를 급한 대로 맨손으로 가드하는 바람에 생긴 상처였다.
새삼 황제의 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감탄했다.
차로 치는 듯한 충격이었는데 이 정도 생채기라니.
“진짜로 죽을 생각은 없잖아? 그건 됐고! 아까 여기 있던 여자아이는 어디 갔냐?”
“예?”
“내가 지키려고 했던 여자아이 있었잖아. 당연히 이 몸이 지켜줬으니 괜찮겠지만. 혹시 모르니 한번 찾아봐라. 어린아이라다쳤을 수도 있으니.”
호위무사는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설마···.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폐하! 괜찮으십니까? 정말 어디···.”
“아 난 괜찮다고 했잖아! 했던 말 또 하게 하지 마라. 죽는다. 빨리 아까 그 벨라라는 여자아이나 좀 알아봐.”
호위무사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혹시 머리를 다치신 겁니까, 폐하?”
**
호위무사는 당황했다.
황제를 보호하는 자신의 임무에 실패한 것만 해도 충격적인데 다친 부위가 하필 머리라니···.
그것도 아주 제대로 다치신 듯하다.
카이드로젠 황제란 누군가?
자신의마음에 조금이라도 성이 차지 않으면 '폐기 처분'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걸 갈아버리는 분이시지 않은가!
악명높은 황제의 '폐기 처분'은 주로 사람에게 사용되는 단어였다.
그런 황제가 한낱 알지도 못하는 여자아이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렸다고?
거기다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벨라’라는 여자아이를 알아보라며···.
자신이 알고 있는 황제가 맞는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영락없이 카이드로젠 황제가 확실하다는 것을 방증했다.
“너 진짜 얻어터지기 싫으면 그만해라. 나 먼저 황궁으로 돌아갈 테니까 꼭 확인해.”
**
코카트라스에게 상처 입은 왼팔의 생채기는 황궁으로 돌아오는 중에 금세 아물었다.
소설 속 묘사처럼 카이드로젠 황제는 무력뿐만 아니라 회복력까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옥좌에 앉아서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벌건 대낮에 코카트라스의 출현이라니.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꼼짝없이 마을 사람들이 해를 입었을 것이다.
도대체 제국 안에 치안이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한탄이 절로 나왔다.
“폐하, 릴레나 총사령관이 알현을 요청합니다.”
시종이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릴레나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칸 제국의 서쪽에서 에즈만토스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릴레나 총사령관.
괜히 황제가 제국 안에서 마법을 금지하는 바람에 전쟁 중에 결국 전사하는 비운의 캐릭터.
그가 워낙 빨리 죽어버리는 바람에 자세한 묘사는 없었지만 현 직책이 총사령관인 것을 보면 분명 뛰어난 인재임이 틀림없었다.
“들라하라.”
잠시 후 릴레나는 절도있게 까딱거리며 등장했다.
“폐하의 앞길에 태양이 비추기를! 총사령관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에즈만토스 왕국과 전쟁 관련하여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생김새를 스캔했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릴레나는 듬직한 풍채를 자랑하며 내 앞에 우뚝 섰다.
‘이런 인재는 잃을 수 없지.’
잉대연에 따르면 카이드로젠이 릴레나 총사령관을 마주한 것은 딱 한 번이 있었는데···.
그 한번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 때문에 나는 릴레나와의 만남을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에즈만토스 왕국이 구사하는 마법의 수준이 상당합니다. 이전에는 저희 쪽에도 마법사가 있었기 때문에 마법으로 맞불을 놓는 것이 가능했습니다만···.지금은 폐하께서 마법을 금지하셔서 전투의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마법 금지에 대한 황명을 다시 한번 검토를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이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쓰레기 같은 놈! 네가 그러고도 검사라고 할!···.”
순간 황제의 기억이 폭주하여 실언이 나오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소설 속에서 카이드로젠이 릴레나를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릴레나의 보고를 무시하고 사지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황제는 여기서 릴레나를 상대로 엄청난 폭언을 퍼부었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이놈의 황제는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폭군이라고 생각했다.
릴레나를 향한 욕설만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황제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다시 전장으로 나간 릴레나는 결국 에즈만토스 왕국의 마법사 앞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비록 분량이 적은 캐릭터였지만 충성심은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검사라고 할 수 있지. 흠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쓰레기 같은 건 나의 황명임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폐···. 폐하?”
“안 그래도 지금 마법 금지 명령을 철회하였으니 자네는 당장 쓸 수 있는 마법사들을 모두 전장에 동원하라. 참고로 에린 킨드라의 목은 내가 자르려다 말았다. 그녀가 아직 살아있으니 자네가 직접 찾아가 보는 것이 좋겠군.”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은이 망극할 것까지야 있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지. 앞으로 자네는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전쟁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내게 보고하라. 굳이 직접 나한테 찾아오지 않아도 좋다.대리인을 보내서 필요한 내용을 간결하게 보고하도록.”
“폐하···.”
평소에 황제의 폭언이 얼마나 심했으면 이런 평범한 대화에도 감동을 받았는지 릴레나의 표정이 사뭇 벅차올랐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에즈만토스 왕국을 반드시 멸하겠나이다. 선제께서 당하신 수모를 곱절로 갚아주겠습니다! 지켜봐 주시옵소서!”
“이젠 마법 핑계를 대면서 패전 소식을 가져오지 않겠지. 다음번에 승전보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너의 목젖을 따버릴 것이다. 더이상 패잔병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 말이지.”
“알겠습니다. 폐하!”
“그래, 앞으로 좋은 소식을···.”
릴레나를 잘 달래서 보내려다 마을에서 봤던 코카트라스가 생각났다.
혹시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전쟁으로 던전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런데 총사령관. 지금 제국 안에 던전은 누가 관리하고 있나?”
“사설 사냥꾼 조합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본래 제국의 직속부대가 관리하는 것이 맞으나 현재는 에즈만토스 왕국과 전쟁 중이라 인력 보충이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안으로는 던전 관리가 안 돼서 고통받는 시민들.
밖으로는 마법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패전 중.
아주 안팎으로 망하기 딱 좋은 시나리오다.
“릴레나 총사령관. 마법사를 전장에 동원하라는 명은 취소다. 오늘부로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휴전을 선언한다.”
릴레나는 내 깜짝 발언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폐하, 갑자기 휴전을 명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부족해서 그렇다면 벌을 내려주십시오! 달게 받겠사옵니다!”
“전쟁은 말 그대로 휴전일 뿐이다. 에즈만토스 왕국, 이 버러지들을 처단하는 것도 급하지만 우선은 우리 칸 제국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 급선무다. 일단 지금은 힘을 모은 다음에 확실하게 에즈만토스 왕국을 박살 낼 것이다. 아까 마을에 나가보니 언제 던전에서 마수들이 뛰쳐나왔는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고작 코카트라스 한 마리였는데도 말이지. 자네는 전장으로 가면 성벽을 경계로 굳게 방어만 하거라. 휴전 협상은 준비가 되는 대로 사신을 보내도록 하겠다.”
“폐···. 폐하···.”
“그리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당장 던전부터 관리해라. 마수들이 뛰쳐나오지 못하도록 그대가 책임지고 관리 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폐하.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릴레나는 벅차오른 듯 잔뜩 상기 된 표정으로 말했다.
“편하게 해보아라. 대신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
“폐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폐하께서 이렇게 백성들을 생각해주시다니요. 그간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선제께서 돌아가시고 얼마나 충격이 크셨을지 상상도 안 되니까요. 무리한 전쟁을 명하신 것도 모두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감당하기 쉽지 않으셨겠지요.”
“이 황제가 언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소리냐? 네가 정녕 죽고 싶은게로구나.”
“조금 흔들렸다고 표현을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폐하. 눈빛에서 총명한 기가 느껴집니다. 맑고 또렷한 눈빛에서 폐하의 의지가 보입니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폐하께서 제게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조르실 때도 딱 이런 눈빛이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폐하,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잠시 흔들리실지라도 칸 제국을 이끌 황제로서 다시 돌아오실 줄 알았단 말입니다! 너무 기뻐서 이 마음을 숨기지 못하겠습니다. 폐하! 하하하하!”
릴레나는 격앙된 목소리로 한참을 호탕하게 웃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