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폭군 황제로 빙의했다 002화
“카이드로젠 폐하! 자네스 총독이 폐하에게 알현을 요청합니다.”
자네스 총독?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누구더라.
“들라하라.”
자네스 총독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이놈은 악당이었다.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이 꽤나 건방지게 느껴졌다.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궁은 예나 지금이나 웅장하군요.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용건이나 말해라.”
“에린 킨드라가 아직 멀쩡하게 황궁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땅히 처형당해야 할 천하의 죽일 년인데 말입니다. 어찌하여 그년을 살려두시는 겁니까? 에즈만토스 왕국과 내통한 배신자 족속을 반드시 처단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선제께서 알고 계신다면 가슴을 치며통탄하실 것입니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가슴을 치며 과장 된 액션을 취하는 자네스.
선대 황제에게 충성심이 깊었던 부하인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표정은 그리 슬퍼 보이지 않았다.
음···. 이유가 뭘까?
“!”
의문을 가지던 것도 잠시.
자네스 총독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하나둘씩 떠올랐다.
칸 제국이 멸망하고도 소설의 중반부까지 살아있는 놈.
카이드로젠에 직접 화살을 겨누기도 한 배신자.
그리고 점차 선명하게 떠오르는 자네스의 모략.
“에린의 만행을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려야겠습니까? 그녀는 에즈만토스 왕국과의 동맹을 빙자하여 선제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제께서는 수십 명의 마법사에게 둘러싸여 맨몸으로 그들의 마법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선제께서 울부짖으시는 비명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여 고통스럽습니다. 폐하. 에린 이년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반역자입니다. 제게 명령을 내려주소서. 제 손으로라도 당장 처단하···.”
“잠깐, 그 입 좀 닥쳐봐.”
“예?”
자네스의 얼굴이 구깃거리며 일그러졌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몹시 당황하는 표정.
“내가 에린을 살려두면 안 될 이유가 뭐라고 했나?”
“폐하, 말씀드리지 않았습···.”
“우리 아버지를 죽인 건 바로 자네스 총독. 당신 아닌가?”
“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선제를 죽이다니요?”
자네스는 시치미를 떼지만 내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내 기억을 공유한 카이드로젠이 내막을 알아차리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카이드로젠의 주먹.
배신자인 자네스 총독에게 자비란 없다.
지금만큼은 잔혹한 폭군 황제의 방식대로 결말을 내야만 했다.
촤악!
나는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고 전광석화처럼 자네스를 향해 휘둘렀다.
예리한 검은 자네스의 왼팔을 깔끔하게 절단시켰고 곧 그의 팔은 피를 뿜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아아아악! 폐하!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냐고?”
잉대연에 따르면 자네스는 칸 제국의 선제를 죽이고 페이튼 국왕에게 큰 신임을 얻게 된다.
더 나아가서 카이드로젠을 무너뜨리는데도 혁혁한 공을 세우는 칸 제국의 주적과도 같은 놈.
진짜 죽어야 할 사람은 에린 킨드라가 아니라 바로 자네스 총독이다.
촤아악!
반대쪽으로 휘두른 검은 자네스의 오른팔을 날려버렸다.
검붉은 피와 함께 바닥에는 그의 두 팔이 뒹굴었다.
“크아아악! 의료진! 의료진!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이런 망할!!”
자네스는 분리된 두 팔을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나는 그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을 테지.’
퍼억
가슴팍을 강하게 발길질로 걷어차 버렸다.
피를 토하며 구르는 자네스.
땅을 짚고 일어날 팔이 없어 바둥거리는 모습이다.
그의 머리통을 발로 짓밟으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네 놈이 사기꾼이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 선제께서 당하신 일도 모두 네가 저지르고도 용케 에린에게 뒤집어씌우는구나.”
스극!
검으로 그의 허벅지를 그었다.
얼이 나갔는지 이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자네스 총독.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그는 내가 어떻게 내막을 알았는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분노로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솔직하게 사죄하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마.”
간결하고 낮은 음성으로 최후통첩을 날렸다.
잠시 후 그는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폐하!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제가 선제를 죽였습니다. 이렇게 눈물로 사죄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의지가 아닙니다! 마법사들이 뭔가 술수를 꾸민 게 분명합니다! 제가 마법사들에게 홀린 것이 분명합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시옵···.”
푸욱
황제의 예리한 검이 그의 목을 관통하고 나서야 자네스는 조용해졌다.
비록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였지만 황제의 검술은 예술 그 자체였다.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뻗어버린 자네스의 몸뚱아리.
카이드로젠은 분노가 서린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 쓰레기를 불에 태워라.”
황궁 안은 자네스의 피로 흥건하게 물들었다.
분명 신하들은 황제가 또 미쳐서 경솔하게 검을놀렸다고 생각했겠지만···.
다행히 자네스의 마지막 발악은 모두가 들었다.
선대 황제를 죽인 범인은 바로 본인이라는 것을.
“자네스와 관련된 모든 것을 조사하라. 집도 탈탈 털고.”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증거는 찾아보면 나오겠지.
어리둥절하던 신하들은 곧 시종을 불러서 시체를 끌고 나갔다.
시체를 보니 내가 한 행동인데도 경악 그 자체였다.
사람을 직접 검으로 동강 내다니.
빙의 첫날부터 심상치 않은 출발이다.
**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생각에 빠졌다.
좋아하는 소설 속 누군가로 빙의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주인공이 돼서 오직 나에게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멋진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면 그를 보좌하는 서브 캐릭터라도 좋지.
조연이라도 주인공 못지않은 인기를 누릴 수 있을 테니까.
성공이 보장된 즐거움 모험.
위기를 극복할 때마다 쏟아지는 푸짐한 보상.
독자들의 열렬한 응원.
소설 속 사이다를 내 손으로 직접!
‘현실은 첫빠따로 죽는 제국의 황제로 빙의.’
황제도 그냥 평범한 황제가 아닌 소설 속 최강의 폭군.
강성했던 제국을 시원하게 말아먹는 한심한 캐릭터!
나중에는 부하들마저 배신해서 비참한 결말에 마주하는 황제.
다행히 빙의하자마자 배신자 한 명은 처단했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이 얼빠진 황제의 배신자 한 명 처단한 것은 그저 새 발의 피일 뿐이었다.
나는 얼굴을 부여잡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내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무엇일까.
‘일단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난 정말 소설 속으로 들어온 건가?’
일단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스다.
지금 당장에도 느껴지는 이 생생한 오감은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왔음을 실감했다.
특히!
자네스를 검으로 벨 때의 그 촉감은 리얼 그 자체였다.
‘두 번째. 내가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뭘까?’
황제로 빙의하기 전에 읽은 작가의 쪽지가 생각났다.
그가 말하길 나보고 소설의 이야기를 꾸며달라고 했다.
에필로그를 꾸며달라는 줄 알았는데 그는 쌩뚱맞게도 나를 소설의 초반부로 보내버렸다.
혹시 그 의미는?
폭망한 웹소설에 미련이 남아서?
‘내가 작가도 아닌데 리메이크를 우째 하냐!’
순간 욱해서 화딱지가 올라왔다.
작가의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다.
일단 난 살아남는 게 목표다.
‘작가 네 놈도 나의 생존을 원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겠어.’
카이드로젠이 죽는다면 내가 빙의한 의미가 없어지는 거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이 작가가 원하는 그림이겠지.
‘아니면 혹시 다른 의도가 있을까?’
나는 머릿속에 있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했다.
잉대연의 세계관 속 사람들은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다.
그들 중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있다.
그놈이 마법을 이용해서 내가 사는 현실에 본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작가가 사실은 잉대연에 나오는 마법사인 거지.’
자신의 이야기를 인간 세계에 풀어내다 보니 지루해진 것이다.
필력은 거지 같고.
구매 수는 처참하고.
자존심도 팍! 상하고.
그래서 나를 마법으로 불러내서 카이드로젠에 빙의시켜서 뭐라도 해볼 셈인 것이다.
내가 하는 행동들이 그들에게이야기가 된다.
나는 그저 어느 마법사가 가지고 노는 단순한 유희 거리가 된 것이다.
‘음···. 이건 너무 망상인가?’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차원 이동에 대한 서적을 읽어 본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 서적을 내가 읽었는지 황제가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생각하면 할수록 말이 안 되는 상황.
하지만 정말 카이드로젠이 돼버린 나로서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쩝.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일단 열심히 생존해보자.’
**
구름 한 점 안 보이는 맑은 하늘.
기분 좋게 부는 잔잔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
“폐하! 외출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누가 이렇게 눈에 띄게 요란을 피우라고 했느냐? 나 혼자 조용히 다녀올 터이니 구석에 찌그러져 있거라.”
“어찌 제국의 황제 폐하가 감히 혼자 행차를 가시겠습니까. 혹시 모를 위협에 폐하까지 해를 입으시면 칸 제국은 정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내가 다스리는 나라의 실상을 알기 위해 시찰을 나가기로 했다.
소설 속 텍스트만으로 상상했던 칸 제국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검술을 국교로 삼은 검사의 제국.
부국강병이라는 단어의 대명사.
영원할 것만 같던 제국의 전성기.
정신 나간 폭군 황제의 원맨쇼로 끝을 모르고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까? 지금은 황제가 본격적으로 깽판 치기 전이니 내가 반드시 미리 손을 봐둬야 했다.
“폐하! 황제 직속 호위무사를 하나라도 데리고 가주십시오.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옥체를 보존하셔야 하옵니다!”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시종.
진심은 느껴지지 않지만 거의 울부짖다시피 부탁을 해서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비록 카이드로젠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만든 억지 충성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누가 보면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는 줄 알겠다. 알겠으니까 조용한 놈으로한 명만 붙여라.”
“예!”
“대신 내 눈에 띄지 않게 거리를 유지한 채로 비밀스럽게 호위할 수 있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내 눈에 띄면 죽는다고 일러둬라.”
“히익! 예!”
시찰을 나가는 것은 아마 이 망할 황제도 처음일 것이다.
혹시 그도 지금만큼은 나와 비슷한 설레는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칸 제국에 사는 시민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도시는 어떤 모습의 톱니바퀴로 굴러가고 있을지···.
옷장에서 가장 허름해 보이는 도브를 대충 걸치고 방문을 나섰다.
밖을 나서자 보이는 광경은 웅장한 황궁을 따라 규칙적으로 꽂혀있는 붉은 깃발.
그 깃발을 따라서 사열한 듯이 길게 줄을 서서 배웅하는 신하들.
비록 폭군 황제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행동이겠지만 괜히 우쭐한 기분을 만끽하며 양탄자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황제가 되면 소소하지만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위풍당당한 걸음걸이 뒤로 남기는 시크한 한마디.
"다녀오마."
**
도시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길을 따라 즐비하게 자란 거대하고 푸른 나무들.
아름답게 물을 뿜어내는 광장의 분수.
웃고 떠드는 어린아이들의 뜀박질까지.
너무나도 평화로운 광경에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침 나와 눈이 마주친 어린 여자아이.
신기한 듯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말을 붙였다.
“삼촌, 진짜 잘생겼어요. 완전 짱 멋져요.”
“시력이 쓸만한 아이로구나. 나중에 궁수로 지원해 보아라.”
“헤헤, 궁수가 뭐예요? 뭔진 모르겠지만 삼촌 볼 수 있으면 지원할게요!”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귀여운 아이.
순박하게 웃는 모습이 피로 물든 소설 속의 칸 제국과 거리감이 느껴졌다.
평범한 등장인물이지만너무나 순수한 얼굴을 한 아이를보니 마음속에서 보호 욕구가 마구 샘솟았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칸 제국의 황제로 있는 한 너는 안전 할 것이다.
하하하.
“어···. 어···.”
한껏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사이 아이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얌마. 왜 그래?”
“저기···. 저거···.”
“저거?”
이상하게 생각하며 아이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늘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육중한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하는 순간···.
그것은 곤두박질치듯이 아이에게로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