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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103화 (완결) (103/103)

— 103화

“갑자기 이게 뭐예요?”

그는 한숨을 쉬며 나를 쓰다듬었 다.

“내 아이 때문에 그대가 불편하고 아프다고 생각하니,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그 생각부터 들었어요?”

“내게 우선은 너다. 겪어 본 적은 없으나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라 들 었다. 이렇게 작은 네게 모든 것을 다 맡겨야 하다니……-”

“고맙긴 한데요. 일단 임신부터

축하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남편님?”

반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꽉 쥐곤, 손등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당연히 그대에게도, 하늘에게도 감사하다. 다만 네가 우선이니까.”

내가 작게 웃는데, 조용히 있던 어의가 불쑥 말했다.

“폐하,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 산 모가 출산할 수 없습니다.”

반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정도라는 것이 있질 않 나? 어느 정도의 고통을 분담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좋은 일이긴 합니다만……,”

어의가 말끝을 흐리는 것에 괜히 내가 다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반은 누가 뭐라고 한다고 제 뜻을 굽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품어 주거나 낳아 주진 못 해도 이 정도도 해 주지 않으면 아 비 될 자격이 없잖나?”

납득할 때까지 설득할 듯한 반에 게 기세가 눌렸는지, 어의는 알겠다 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갑 자기 피곤한 얼굴이 되어 안정기에 들어설 때까지 몸을 조심하라는 등

유의 사항을 줄줄이 읊더니 자리에 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루아나는 어의에게 들어 두어야 할 것이 많은지 함께 나가면서 손으 로 축하한다는 뜻으로 하트를 마구 날려 보였다. 나도 빙긋 웃으며 손 가락으로 하트를 그려 주었다.

문이 닫히고 반과 나, 둘만 남자 나는 아랫배를 한번 쓰다듬어 보았 다. 아직은 아무것도 잘 모르겠다. 아이가 들어섰다고 해도 실감 나지 도 않았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 황 위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된다는 것 도 잘 모르겠다.

“아플까 봐 불안한가?”

날 챙겨 주는 게 고맙긴 한데, 아 이가 태어나려면 한참 남았다. 정말 못 살겠다. 그가 너무 걱정하자, 나 는 오히려 침착해지는 기분이었다.

“반.”

“응‘?”

“걱정 안 해요. 전 마법이 안 들 으니까 아까 그 마법식, 소용은 없 겠지만. 그래도 마음은 고맙고 든든 해요.”

그는 뭔가 말할 듯 나를 바라보 다가 대뜸 일어나더니 옆 방으로 갔 다. 뭘 하나 싶어 지켜보자 작은 액 자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 뭔데요?”

반은 나를 등 뒤에서부터 안더니, 나를 제 가슴에 기대게 해서 안고 같이 초상을 들여다보았다.

싸구려 물감으로 만들어진 초상이 었다. 비쩍 마른 여럿의 아이들이 곧 허물어질 듯한 고아원 앞에 서 있었고, 그 사이에 붉은 머리에 꾀 죄죄한 소녀가 있었다. 바로 나다.

그건 내 어릴 적 초상 중에서 유 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싸 구려라 빛이 많이 바랬는데도 그는 내 어릴 적을 보는 게 재밌는지 제 책상 위에 가져다 놓곤 했다.

반은 엄지로 액자의 유리 위를 살살 만져 보다가 내 머리 위에 제 턱을 괴곤 입을 뗐다.

“사실 이번 기념일에 말할 생각이 었는데, 일찍 말하게 되었군.”

“ 뭘요?”

“난 이 꼬맹이를, 본 적이 있다.”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무 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가 쥔 액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설마 제가 어릴 때를 말하는 거 예요?”

“그래.”

내가 의심으로 가득 차 입을 다 물었다는 걸 느꼈는지, 반이 내 머 리를 슥슥 매만지며 말했다.

“어린 시절이었다. 신분을 숨기며 방황하고 다녔던 이야기는 한 적이 있을 텐데. 그때, 나는 너를 보았 다.”

“세상에, 그런 우연이 어떻게

“우연이라기엔, 네 재능이 흙더미 에 묻은 태양처럼 빛났던 탓이겠지. 넌 내가 발탁하지 않았어도 어디에 서라도 제대로 된 인정을 받았을 사

람이 다.”

그는 나를 종종 과찬하곤 한다. 날 품에 안은 반을 노려보기 위해 몸을 애써 비틀어 뒤를 돌아보았더 니, 황제는 틈을 노려 키스를 해올 뿐이었다. 눈에 힘을 가득 주고 쏘 아보자, 그가 쿡쿡 웃으며 말을 이 었다.

“스쳐 지나간 너를 기억하는 이유 는 재능이었다. 마법으로 유명한 곳 이라면 죄 돌아다닌 내게도 가난하 기 짝이 없는, 미천한 자들만 살아 가는 곳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바닥 에 그린 마법진은 놀라운 것이었으 니까.”

“정말 저였어요?”

“그래. 저 고아원, 붉은 머리, 주 홍빛 눈, 그리고 이 능력. 너인 게 틀림없다. 처음 만났을 땐 몰랐는데, 네가 몸에 새긴 마법진을 보고 점차 기억이 나더군.”

우리가 어릴 때 만났다고? 정말 이상하다. 나는 빈민가의 꼬맹이였 고, 이 황제 폐하께선 아주 잘난 황 족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우연이 있 었을까?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너를 본 게, 내겐 힘이 되 었다.”

“저를 본 게요?”

“이런 식으로 말하면 기분 나쁠 테지만……오 그런 대단한 재능을 가 지고도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 는데, 똑바로 대결하는 게 싫고 아 픈 게 싫어서 황위 후계자의 자리에 서 달아나고만 있는 내가 너무 부끄 러웠다.”

담담한 고백을 듣는 것이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의아함 이 더 컸다. 재능이라니?

“전 기억이 잘 안 나요. 마법진을 그리고 놀긴 했지만, 그냥 골디나의 고서적상에 있던 것들을 보고 그린 것들일 뿐인걸요.”

“그게 재능이라는 거지. 마법진은 그냥 생김만 따라 그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 이해가 있어야 비로소 거기 에 마법이 깃드는 것이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정말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여러모로 조금 억울하다. 세렉의 뒷 바라지만 할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마법 양성소에 들어갔어도 좋을 뻔 했다. 세렉 때문에 새긴 마법 무효 진 탓에 이제는 못 배우는 것도 아 쉬운 노릇이다.

반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액자를 내려놓고 내 팔 위를 손가락으로 쓸

었다.

“네 몸에 있는 마법 무효진이라면 지난 일 년간 연구해 봤는데, 무력 화할 수 있다. 확신이 들면 말하려 고 했는데, 이젠 확실한 단계니까.”

그런 걸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 랐다. 깜짝 놀라 그의 팔을 풀고 마 주 보았다. 붉은 눈이 내 표정을 보 고 가늘게 웃었다.

“언젠가는 너도 마법을 배우고 싶 어 할지도 모르니까, 배우게 해 주 고 싶어서.”

“정말, 제가 마법을 배울 수 있다 고요?”

“그래. 네 재능은 마법진 쪽이라 공격용 마법 같은 건 못 쓸 테지만. 그건 지능과 이해력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골디나에서 발달한 마법과 는 계열이 달라. 골디나에선 재능을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도 당연하다.”

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눈을 한참 깜박거렸다. 그런 일이 가능하 다고? 아카데미에서 마법진과 관련 된 수업을 듣긴 했다. 제록스가 가 르친 내용에서도 몇 번이나 나왔다. 하지만 어차피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인 나는 굳이 시도를 해보지도 않 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의 곁에 머

문 뒤로는 항상 기대하지 않았던 새 로운 길이 열린다.

“고마워요. 너무 기뻐요. 정말 최 고의 결혼기념일 선물이에요.”

고개를 내밀어 반에게 키스해주 자, 내 볼에 입 맞추며 그가 속삭였 다.

“그러니까 이제 산통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만 믿어라.”

못산다, 진짜. 지금까지 이 얘길 하겠다고 내내 꾹 참고 있었던 이야 기를 털어놓은 거냐고.

허탈하게 웃으며 반의 어깨에 기 대는데 그의 손에 들린 액자가 다시

눈에 띄었다. 문득 이번 잠행 때 보 았던 소녀가 떠올랐다. 어릴 적의 나와 아주 닮은.

나는 반의 손을 쥐며 말했다.

“골디나에서 이때의 저와 닮은 아 주 어린 소녀를 봤어요. 아직도 부 르크 제국에는 먹고살 것이 없고 약 을 구하기 힘든 어린아이들이 많아 요, 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 아이가 살 세상은 좀 더 밝 았으면 해요. 누구의 품에서 태어나 든 제 뜻을 다 펼칠 수 있고, 쉽게

꿈이 꺾이지 않는 세상이요.”

“항상 나보다 시야가 넓은 황후 라, 늘 겸손해지는군. 그래, 그러자. 쉽게 안주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는 내 이마와 볼에 키스하더니 이어 입에도, 손등에도, 아랫배에도 입을 맞췄다. 간지러움에 까르르 웃 자, 그가 입술로 내 웃음을 삼켰다.

잠깐 입술이 떨어진 사이로 나는 속삭였다.

“당신이 봐 줄 만하게 잘해서 낳 아 주는 거예요. 알죠?”

“평생 받들어 모시지.”

뭐든 해 줄 기세라 나는 장난으

로 종알거렸다.

“그럼 앞으로 존대해 줘요.”

반은 대번에 씩 웃으며 대답했다.

“ 알겠소.”

너무 웃기다. 하긴, 언제든 해 달 라고 하면 했을 그다. 또 뭘 시켜 볼까 고민하는데 그가 나를 당겨 안 고 중얼거렸다.

“사랑해.”

“ 나도요.”

“정말 사랑하오.”

“간지럽게. 그만해요.”

“아니, 정말로. 그대가 있어서, 이 자리에 있어도 어깨가 무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행복을 실 감하고, 매일 살아 있음에 감사하 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쩜 이렇게 매번 말을 예쁘게 할까.

뒷골목에 살던 빈민에서 노예로, 그다음에는 아카데미의 학생으로, 그다음에는 비서로, 그다음에는 황 후로. 나의 변화무쌍한 인생에도 안 정기는 필요할 것이다.

그 쉴 곳이 그의 곁이라면, 어쩐 지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반의 잘생긴 콧날을 손으로 더듬거리다가, 그 아래의 입술에 다 시 입을 맞추어 주었다. 짙은 키스 에서는 달콤한 설탕 과자의 맛이 났 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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