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모처럼 신이 나서 했던 외출은 골디나 지역의 법 집행 관리만 바쁘 게 만들고 그렇게 순식간에 막을 내 렸다.
반나절도 즐기지 못했는데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한숨을 푹푹 쉬며 방으로 돌아갔 다가, 이 꼴이 대체 뭐냐고 잔소리 하는 루아나와 마주쳐 버렸다. 그녀 는 내 꼴을 보고 어지간히 놀랐는지 다급히 나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뜨거운 물로 씻고 부드러운 크림을
바른 뒤, 돈을 팍팍 쓴 드레스를 입 고 산뜻한 향수를 뿌리고 나서야 루 아나는 좀 마음이 놓이는지 굳은 얼 굴을 풀었다.
“그늘로만 다니라고 말씀드렸잖아 요. 피부가 빨갛게 된 것 좀 봐요.”
“미안해……;
“열중해서 일하시는 건 좋지만, 요즘 계속 속이 메슥거린다고 하셨 잖아요. 의사도 걱정된다고 했다고 요. 오늘은 더 일은 안 돼요.”
난 어쩐지 기가 죽어 고개를 빠 르게 끄덕였다.
“알았어. 화내지 마.”
“제가 언제 화냈다고 그래요? 정 말이지, 제가 다 걱정해서 드리는 말씀인걸요.”
루아나를 전속 시녀로 둔 건 계 획대로였지만, 이렇게 잔소리가 많 아질 줄은 몰랐다. 가끔은 세레나보 다도 심했다. 시녀가 되면 다 이런 걸까? 하지만 난 그녀를 내 전속 시녀로 적극적으로 추천한 죄로, 그 녀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수밖에 없 었다.
루아나가 내 머리를 다 정리해 준 다음 빈첸조가 왔다는 기별을 받 았다. 나는 얼른 침대맡에 모아 두 었던 서류들을 시녀에게 건네고는
정원으로 나갔다. 빈첸조와 이야기 도 나누고 일도 좀 할 생각이었다.
따뜻한 볕은 기분 좋았다. 그러고 보니 벌써 노랑과 보라색이 화려한 크로커스며 수선화가 다 폈다.
봄이 온 줄도 몰랐다니.
황후라는 자리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던 봄은 정말 더디 지났는데, 그 뒤 여름부터는 하루하루가 어떻 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안 났다. 공 기가 더워졌다가 차가워지는가 싶더 니 다시 신록의 계절이 돌아오다니.
정원의 구석에 있는 티 테이블로 다가가자, 빈첸조가 웃으며 나를 맞
았다. 그는 일 년 사이에 키가 쑥 자라고 몸도 좋아져 더 소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제 형과 똑 닮아 잘생긴 그는 수석 졸업까지 했 다고 들었다.
“이게 누구야, 수석 졸업생 아 냐?”
“조기 졸업생에게 들을 말은 아니 지요, 황후 폐하.”
“간지럽게.”
빈첸조가 웃으며 일어나 의자를 빼 주었다. 급하게 마련된 티 테이 블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쿠키며 홍차, 설탕 과자가 흰 테이블보 위
에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어떻게 왔어?”
“취직한 거 자랑하러 왔어. 형만 큼은 아니라도 나도 쓸 만한 모양이 야.”
“세상에, 진짜 축하해!”
우리는 비키가 아직 괴롭힘당하고 있지만 이를 악물고 아카데미를 다 니고 있다는 이야기나, 올가을, 드디 어 아카데미에 입학한 사미디온은 퍽 잘 적응하고 있다는 이야기, 빈 첸조가 졸업 연회 때는 파트너를 구 하지 못해서 참석하지 못했다는 등 근황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처럼 잘생기고 성정도 고운 남자가 파트너를 못 구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정말 너도 눈이 높아서 큰일이 다.”
도대체 눈이 얼마나 높길래, 저 잘난 자제가? 너무 어이가 없어 내 가 까르르 웃자, 빈첸조가 새까만 눈을 길게 접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 다가 픽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쩐지 그 뒤의 침묵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 며 쿠키를 씹다가, 시녀가 내려놓은
서류를 발견하곤 손뼉을 쳤다.
“황궁에 오래 있다가 갈 거야?”
“글쎄. 시간 여유는 많은데, 왜?”
“이번에 내 비서 뽑는데, 후보 같 이 봐 줄래?”
최근에 어쩐지 몸도 좀 안 좋은 것 같고, 점점 일이 많아지니까 정 신도 없어서 나도 비서가 하나 있으 면 하던 차에 아카데미 졸업 시즌이 온 것이다. 적당히 한 명 골라 볼 생각으로 지원을 받아 두었다.
빈첸조는 단정하게 자른 파란 머 리를 매만지며 아쉬움이 뚝뚝 묻어 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리 얘기라도 해 주지 그랬어?”
“응‘?”
“아니, 그냥. 미리 알았더라면 네 비서로 지원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웃기고 있군.”
머리 위에서 예고도 없이 뚝 떨 어진 목소리에 우리 둘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 나타난 건지 황제가 빈 의자를 꿰차고 앉으며 말 했다.
“내 부인의 비서로 지원해서 어쩔 셈이지? 꼬리라도 칠 생각인가?”
어이가 없다. 남의 친구한테 못 하는 말이 없다.
내가 반을 흘기자, 골디나에서부 터 삐진 반은 어린애처럼 말없이 반 대로 고개를 돌렸다. 남의 눈에야 여전히 냉막한 미남자로 보인다곤 하지만, 내 눈엔 영락없는 애였다.
그리고 빈첸조도 이럴 때 딱 부 러지게 아니라고 대답해 두면 오죽 좋을까. 평소엔 제 의견을 피력하길 워낙 잘하다 못해 리온에 이어 싸움 닭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인 빈첸 조는 반이 말도 안 되는 이런 시비 를 걸 때만 입을 꾹 다물었다. 어이 가 없어서 그런 걸 테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반은 빈첸조가 설탕 과자 을 쥐려고 손을 내밀자 제가 먼저 손을 내밀어 채 가선, 한입 크게 베 어먹기까지 했다.
그를 상대해 주고 관심을 주면 더 얼마나 투덜거릴지 모를 일이었 다. 내 일이나 하자 싶어 이번에 들 어온 비서 이력서들을 큰 봉투에서 꺼내 하나하나 넘겨 보았다. 그중에 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한 나는 손을 갑자기 멈췄다.
오클라였다.
서류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내가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성적이 그럭 저럭했던 오클라는 졸업 학년이 되 기 직전부터 엄청난 상승 폭을 보여 결국 차석으로 졸업하는 쾌거를 거 둔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다. 내가 하고자 하는 사업들을 잘 도울 수 있는 사람으로 는 꽤 적합한 인재다. 게다가 그가 먼저 내게 서류를 넣었다는 것도 꽤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 말고 다른 서류들도 꼼 꼼히 검토한 다음 봉투를 덮었다.
어쩐지 마음에 드는 후보들이 많 아서 썩 기분이 좋았다. 내가 고개 를 들 때까지도 유치하게 눈싸움을
하고 있었던 듯한 반은 문득 입을 열어 고고하게 턱짓을 했다.
“빈첸조라고 했나? 아직도 안 가 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리온에게 동생 교육이나 시키라고 일러야겠 군.”
“갑니다. 가면 되잖습니까.”
남의 친구한테 막말하는 반도 그 렇고, 황제에게 저렇게 대꾸하는 빈 첸조도 진짜 유치하기 짝이 없다.
빈첸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예의를 다하고는 어쩐지 기운 없이 사라졌다.
기분이 상해 있는 반과 둘이 남
는 건 조금 곤란한데.
난 볼을 긁적이고 그를 슬쩍 바 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이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은 다 봤어요?”
“그래.”
“해외 출장인데, 엄청나게 빨리 왔네요.”
“그 정도 능력은 되니까.”
아직도 화난 듯한 그의 목소리에 미안하긴 했다. 난 변명하듯 중얼거 렸다.
“골디나에 간 일로 아직도 화나
있는 거예요? 하지만 제보를 들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냥 사람을 보낸다고 될 일도 아니고……
반은 테이블에 턱을 괴곤 한참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이 없다가, 문득 물어 왔다.
“후회하나?”
이런 소리를 그가 한 것은 일 년 만에 처음이었다.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회하냐고? 황후가 된 것을? 그의 곁에 온 것을?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답답해하는 것 같아서.” 난 고개를 저었다.
“뭐, 전혀 그렇지 않은 건 아니지 만, 생각보다 황후라는 직업도 꽤 보람차고 이제 반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걸요.”
매일까진 아니더라도 꽤 자주 좋 아한단 소리를 해 주고 있다고 생각 하는데도,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을까? 반은 남의 앞에선 절대 짓 지 않는, 단단해 보이는 인상이 다 허물어지는 짙은 미소를 짓더니 내 고개를 당겨 볼에 키스했다.
“그래도 위험한 일은 그만둬라. 문책을 당하는 건 비뉴스니까.”
나도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
지, 뭐.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래도 덕분에 이번에 골디나의 체계는 아예 바닥부터 다시 정비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주부터 감옥에 들어가 버렸으니까. 그리고 황후가 직접 보고 듣고 갔다는 게 그들에겐 큰 상징이 될 거다. 제대로 토대부 터 엎을 명분이 되었겠지.”
다행이다. 화를 내면서도 머리는 냉정한 이 사람이 황제라서.
난 입술에 키스해 오려는 그를 장난스레 밀어 내며 웃다가, 문득 그대로 굳었다. 반은 내 표정이 이
상한 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는지 내 팔을 쥐었다.
“왜 그러지? 어디가 안 좋아?”
“아니, 괜찮은데…… 좀 메슥거리 네요. 그러니까, 우욱.”
괜찮다는 말이 더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갑자기 현기증이 나며 속이 울렁거렸다.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워낙 건강 체질인 내가 아픈 일은 잘 없었기 때문에, 반은 눈에 띄게 당황해서 나를 안고 곧장 침실로 갔다.
“축하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좀 가능성을 생각하던 차인데, 복중에 태아가 들어선 듯합니다. 앞으로 얼 마간 음식 냄새에 민감해지실 겁니 다.”
침실에 급하게 찾아온 어의는 참 덤덤하게도 내 임신 소식을 전했다.
아이라고?
생리가 늦어진다고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게다가 계속 아이를 가 질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 그렇게까지 놀라진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반과 나는 결혼식 때 부모님을
모실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고아 였고, 그는 하나 남은 웃어른을 처 형해 버린 뒤였다. 식구가 늘어나는 것은 바라는 바였다.
난 고개를 들고 반을 돌아보았다.
“들었어요?”
반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 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어려운 문제를 푸는 듯한 얼굴이었 다.
“안 기뻐요?”
“뭐? 아니, 기쁘지. 기쁜 건 당연 하다.”
기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반
은 여전히 다른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내 이마에 키스 하더니 시종에게 중얼거렸다.
“잠깐만 펜과 종이 좀 줄 수 있 나?”
갑자기 이 상황에서?
어이없어 그를 쳐다보는데, 반은 아랑곳하지 않고 종이에 이상한 수 식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법 공식에 대해서라면 나도 잘 모르는 편은 아니다. 그가 써 내려가는 수 식을 멍하니 읽는데, 고통을 상대에 게 전이시키는 공식인 것 같았다.
반도 마법 천재라는 소리가 무색
하지 않은 인재긴 한 모양이다. 꽤 복잡한 수식인데도 순식간에 마무리 하더니 펜을 내려놓았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