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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101화 (101/103)

- 101화

퍽-

그때 새빨간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은 키 작은 소녀 하나가 나 를 지나가며 어깨를 부딪쳤다.

어라, 소매치기를 당하는 것도 오 랜만이라 신선한데?

하지만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는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비 뉴스가 칼을 뽑으려 했고, 내가 그 의 팔을 움켜쥐었고, 내 어깨를 쳤 던 소녀가 복면을 쓴 여자에게 목깃 을 꽉 붙들리기까지 아마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붉은 머리의 여자애는 내가 품에 넣어 두었던 동전 하나를 손에 꽉 움켜쥐곤 겁에 질린 얼굴로 나와 복 면 쓴 여자를 한 번씩 쳐다보더니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마 나 때문은 절대 아니고 저 녹색 머리 여자 때문이겠지.

“이 구역은 네 담당 아냐?”

내가 르베르티티에게 태연하게 말 을 걸자 붉은 머리 꼬맹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고 무서운 법이라 아직 황제보다 이 지역의 영 주가 더 무서운 골디나에서는, 영주

보다도 르베르티티가 현재 수장으로 있는 정보 길드가 가장 무서울 것이 다. 그녀가 정보 길드 소속이라는 것은 어깨 가죽 갑옷에 그려진 문양 만 보아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

르베르티티가 당치도 않다는 듯 양손을 내저었다.

“제가 어찌……으 그저 방문하신다 는 소식을 듣고 호위에 만전을 기할 인력을 배치해 두었을 뿐입니다.”

비뉴스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가 르베르티티의 존재를 모르진 않았던 것 같다. 기척을 숨긴 게 아니라면

상관없다. 좀 귀찮을 뿐.

난 아직 내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이 길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 르겠다. 황제 저주에 가담했다는 것 만 놓고 보면 죽여야 마땅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인 데다 서로 이권이 갈리던 때의 이야기니까.

뚱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붉은 머 리 꼬맹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나리들. 제, 제 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약값 만…… 약값만 벌려고 했을 뿐이에 요. 죄송합니다……

빨간 머리 여자아이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 다. 당시의 내가 범죄에 발을 들이 지 않은 것은 다 우연히 얻은 하찮 은 기술이나마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덜 배고파서도, 덜 다급해서도 아니었다. 나와 이 꼬마의 처지가 뭐 얼마나 달랐겠는가.

르베르티티가 엄한 표정으로 꼬맹 이를 노려보았다.

“우리 길드 구역 내에서 이런 짓 을 하다니 간도 크군.”

난 고개를 갸웃했다.

“네 길드 구역 내에 약값도 모자

라 돈을 털고 다니는 꼬마가 있는 데, 넌 대체 뭘 한 거야?”

르베르티티가 복면을 내리고 쓰게 웃었다.

“저희라고 자선 단체는 아니니까 요.”

하긴 맞는 말이다. 복지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람은 나다. 르베르티 티가 아니라.

난 생각에 잠겨 손가락으로 머리 를 톡톡 두들기다가 말을 꺼냈다.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너희들은 언제든지 내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맞아?”

“존명. 언제든 분부를 내려 주시 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뜸 한쪽 무릎을 꿇는 그녀의 어깨에 나에 대한 중성을 맹세하는 문신이 보였다.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지.

“이 지역의 부패를 척결해 볼 생 각인데, 영주에 대한 감시가 아무래 도 우리만으론 부족해. 현지 상황을 잘 아는 너희들이 힘을 써 주면 좋 겠어.”

“존명.”

아아, 부담스럽다. 황궁의 신하들 에게서도 저런 부담스러운 단어는

잘 안 듣는데.

난 이제 됐으니 가 보라는 듯 손 을 내저었다. 르베르티티는 빨간 머 리 꼬맹이도 데려가고 싶은 눈치였 지만, 난 그냥 가라는 뜻을 담아 다 시 손을 흔들어 주었고 그녀는 그냥 훌쩍 떠났다.

혼자 남은 빨간 머리 꼬맹이는 안절부절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나 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애의 고사리 같은 두 손 사이 에 쥐어진 동전 한 닢이 자꾸만 시 선을 사로잡았다.

“왜 한 닢만 훔쳤어?”

“네?”

“내 주머니 안엔 돈이 많았는데 왜 한 닢만 훔쳤냐고. 더 많이 훔치 면 더 풍족하게 살 수 있잖아.”

여자애는 이런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입술을 꽉 깨물고 중얼거 렸다. 어지간히 분한 투였다.

“……지금 이런 말을 해 봤자 소 용없겠지만, 전 도둑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저도 훔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어요.”

씩씩거리는 듯한 그 목소리 끝에 물기가 살짝 묻어났다.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기개 가 있었다. 꽤 괜찮은 인재가 될 재 목이다. 이런 아이들이 몇이나 이렇 게 썩고 있을까.

“부모님은?”

“아빠가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치 셔서…… 그래서 저밖에 없어요.”

“노예 시장이 어딘지는 아니?”

“네? 알긴 아는데……,”

“안내해 주면 그 돈, 네게 주지.”

우물쭈물하며 꼬마가 날 바라봤 다.

“절 관리한테 안 넘길 거예요?”

“일해서 벌 거잖아, 그 돈.”

그제야 얼굴이 밝아진 꼬마는 고 개를 주억거리고 벌떡 일어나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마법의 전성기를 겪었던 골디나에 는 대광장 이외에도 시장 뒷골목에 꽤 큰 광장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노예 경매가 이뤄지는 모 양이었다. 길이 덜 닦인 곳이라 외 부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 다.

난 그 입구에서 꼬마를 배웅해 주었다.

“네가 좀 더 힘들기 전에 내가 어

떻게든 해 줄게.”

꼬마는 물어도 되는지 잠깐 머뭇 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언니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어 요?”

고개를 숙여 꼬마의 귓가에 속삭 여 주었다.

“언니, 황후거든.”

눈을 찡긋해 주는데도 꼬마는 그 저 황당하단 눈으로 날 보다가, 제 손에 쥔 동전을 꽉 쥐고 후다닥 달 아나듯 사라져 버렸다.

노예 시장의 입구에서 우락부락한 사내 셋이 우릴 막아섰다. 그들에겐 안된 일이지만 비뉴스는 한숨이 나 을 정도로 강했다. 다른 이들이 참 견할 사이도 없을 정도로 순식간이 었다. 기절만 할 정도로 강도는 잘 조절했는지, 사내들은 나란히 바닥 에 드러누웠다.

평민으로 가장해 숨어 있던 경호 기사들은 곳곳에서 튀어나와 나의 주위를 에워쌌다.

우리는 광장으로 들어갔다.

노예 시장은 꽤 넓고, 그 안엔 수

십 명은 되어 보이는 남녀가 갇혀 있었다. 어린아이부터 중년에 이르 기까지 나이대도 다양했다. 기가 막 혔다.

노예를 직접 사지 않는 일반인들 도 잔뜩 몰려들어 주위를 에워싸고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게다가 구매자로 보이는 자들은 철창에 바 짝 붙여 놓은 의자에 앉아 시가를 뻑뻑 피워 대고 있었다. 잘 차려입 은 자들이 철창을 둘러싸고 신이 나 선 돈다발을 흔들어 대고 있는 꼴이 라니.

그들 사이에서 골디나의 영주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골디나에 있던 시절에도 이미 영주 를 해 먹고 있던, 턱이 두 개인 대 머리 할아범이었으니까.

나는 구속하는 것에까진 관심 없 었다. 현장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 으니, 남은 일은 공식적인 수사관들 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현장을 한 바퀴 둘러본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그대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머리 영주가 나를 발견해 버렸다. 그가 내 쪽으 로 손가락질을 했다.

“뭐야, 한 놈이 탈출했는데?” 나? 저요?

뭐, 아주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노예에서 탈출했다는 게 틀린 얘기 는 아니긴 하다. 비뉴스를 비롯한 호위 기사들이 일제히 영주를 죽여 버릴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을 손을 들어 말리며 난 작게 웃었다.

“노예제라면 폐지된 지 오래된 걸 로 아는데, 아직도 이러고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 평민이 반말해? 미쳤나!”

대머리 영주는 화가 치밀었는지 몸소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가 까이 왔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작은 욕심이 있었는데. 왜냐

하면……소

영주가 내 바로 앞으로 걸어와 내 멱살을 쥐려던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주 먹에 세게 맞기라도 한 듯 그가 천 장에 처박혀 버렸다.

“꾸에에엑!”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비명을 들으며 난 머리를 긁적였다.

“……늦었네.”

반에게 사건이 이렇게 됐다는 걸 들켰다간 한동안 잠행은 꿈도 못 꿀 텐데. 진짜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 나도 없다.

한숨을 푹 쉬는데, 바닥으로 떨어 지는 영주를 한 손으로 받아 들더니 바닥에 처박아 버리고 발로 짓이기 는 검은 머리의 잘생긴 남자가 보였 다. 보라색을 제 옷에 쓸 수 있는 유일한 남자. 바로 이 부르크 제국 의 황제 폐하셨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어디 에서 나타났는지 서른 명에 이르는 숫자의 황실 공식 호위 기사들이 제 복을 입고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예 경매에 참가하겠다고 돈을 흔들어 대던 사내들은 물론이고, 이 사태를 구경하고 있던 평민들까지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일제히 바닥

에 납작 엎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노예 경매는 금지되어 있다. 당연 히 방관한 자들도 엄히 다스리고 있 다. 얼굴색이 바뀔 만도 하다.

나는 최대한 입꼬리를 끌어 올린 다음 오글거림을 꾹 참고 말했다.

“자기, 어서 와요.”

반은 내 말을 들었는지 작게 웃 어 보이긴 했지만, 영주를 짓이기던 발엔 조금도 힘을 빼지 않았다.

으악, 으아악/

반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대충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금방 파악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옆에 서 있는 리온에게 고개를 까딱 했다.

“처리는 알아서 하지.”

리온이 우아하게 팔을 가슴에 댔 다.

“명을 받듭니다.”

반은 제 발아래에 있던 머리통을 차 버리곤 싸늘하게 말했다.

“이자들은 황후도 모르나?”

구경꾼들이 엎드린 채로 일제히 술렁였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 곤 재빨리 다시 고개를 숙이는 자들 사이에, 아까 도망갔던 빨간 머리 여자아이도 있었다. 난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찡긋하고 웃어 주었 다. 깜짝 놀란 토끼 눈을 한 여자아 이는 머리를 조아리는 것도 잠시 잊 었는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엉망진창이 된 영주가 푸르게 변 한 눈을 간신히 뜨곤 나를 바라보았 다.

“황후……? 저 옷차림이 어딜 봐 서……으 그리고 황후라면 황궁에 있 어야지, 여기는 왜……

조용히 있었다면 좋았을걸. 도저 히 참지 못했는지 비뉴스가 영주의 머리통을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

황제는 푹 한숨을 쉬었다.

“우리 황후가 내 품에만 가만히 있는 사람이라면 나도 좀 더 마음이 놓였을 텐데. 아쉽게도 나보다도 공 사다망하셔서 말이지.”

그리고 그는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아 들었다. 이제 내가 황후라는 것을 의심할 자는 없게 된 셈이다. 내가 제 부인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라도 하듯 구는 반이 창피해서 난 얼굴을 슬쩍 덮었다.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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