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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100화 (100/103)

- 100화

해가 다 저물어서야 황궁으로 돌 아온 나는, 구두를 신고 침실까지 걸어가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빠진 채였다. 반은 마차에서 내려 어기적어기적 걷다가 슬쩍 구두를 내팽개쳐 버리는 나를 보곤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연회 후에 일주일은 공식 행사를 다 빼고 쉬자고 했을 때는 사흘이면 된다고 우기더니.”

“원래 화장실 들 때 마음 다르고 나갈 때 마음 다른 법이라잖아요. 이렇게 진 빠지는 일일 줄 몰랐어 요, 진짜.”

비뉴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내 구두를 주워 드는 게 보였다. 얼른 다시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반이 내 허리를 받쳐 잡는가 싶더니 날 수월하게 안아 올렸다. 일주일 연회 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허리에서부 터 풍성하게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여서, 붉고 풍부한 치맛단이 그의 팔 안에서 막 흘러넘쳤다.

평소 같으면 남이 보는 앞에서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심통이라도 부리겠는데, 발도 아프고 너무 지친 나는 될 대로 되라 싶어 한 손으로 얼굴만 가렸다.

반도 힘들고 지쳤을 텐데 그는

참 재주 좋게도 척척 걸어서 침실에 다다랐다. 요즘은 남들 앞에서 벗는 걸 그리 꺼리지 않게 된 그라 시종 들이 자주 따라 들어오곤 했는데, 오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경비 기사 들까지도 문 앞에서 모두 멈춰 서서 자리를 지켰다.

널찍한 침실로 들어오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지난 일 주일 동안의 왁자지껄한 소란과 이 공간은 아주 다른 세계 같을 정도 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좀 더 편하게 그의 품에 기대는데, 반이 작게 웃

으며 말했다.

“이건 다 선물인 모양이군.”

“선물이라니, 아……!”

시선을 돌리다가 눈에 들어온 것 은 꽃길이었다. 붉은 장미 꽃잎이 새하얀 침구에서부터 발아래까지 흐 드러져 있었다.

너무 예쁘기도 한데, 순간 웃음이 났다.

반은 침대로 걸어가며 왜 웃냐는 듯 날 바라봤다.

“아니, 통속 문학이나 그런 데 그 려진 삽화 같은 거 보면, 이런 소재 가 자주 나오는 게 생각나서요.”

“무슨 소재지?”

척하면 착이지. 진짜 눈치가 없 다. 난 어쩔 수 없다는 듯 설명해 주었다.

“마치 무슨 부부나 연인이 서로 막 꾀고 할 때 하는 이벤트 같잖아 요. 그러니까 막 야한 장면 나올 때 꼭”

말하다 말고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의 그와 시선이 부딪쳤다.

갑자기 말이 더 안 나왔다. 반이 나를 침대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붉 은 치맛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침대를 가득 메울 듯 펼쳐졌

다. 그가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내 머리 바로 옆을 양손으로 짚고 고개 를 숙여 왔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가 꽃잎을 한 줌 집어 보란 듯 이 내 얼굴 옆에 뿌렸다. 그러곤 내 볼에 키스하곤 속삭이듯 말했다.

“바로 그런 용도라고는 생각 안 해 봤나 보군.”

나도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앞에 서 본다면 불타는 고구마처럼 보일 것이다. 사람이 당황하는데 그게 재

밌는지 반은 쿡쿡 소리까지 내면서 웃더니 내 다른 쪽 뺨에 입을 맞추 었다.

“예상 못 하진 않았을 텐데.”

“아니, 하지만 약혼이고……,”

“더 할 말이 많은 모양인데, 들어 줄 때 빨리해.”

황제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은근 하게 웃더니 내 이마와 콧잔등, 눈 두덩이와 입가에 키스했다. 아니, 이 러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란 말인 가.

그를 쏘아보자 그의 웃음이 짙어 질 뿐이었다.

하긴 말이 약혼식이지, 내 전용 공간에 내 이름까지 붙었고, 창피하 게도 왕궁 앞에 나와 황제가 키스를 나누고 있는 동상이 세워지고 있는 참이었다. 결혼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이런 일도 예상해야 했을까.

내가 주저주저하며 상체를 일으키 자 황제는 대번에 내 입술을 훔쳤 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내 뒤통수 를 당겼다.

그와의 키스는 늘 아슬아슬하게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에서, 투명한 포말에 발목을 적시며 걷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물에 머 리끝까지 푹 잠겨 버리는 듯했다.

일렁일렁 햇빛이 비치는 물속에 잠 긴 것처럼, 숨이 가쁘고 손끝이 떨 려 왔다.

나도 그의 목을 팔로 감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 고, 질리지도 않고 아주 오래 우리 는 입술을 맞대었다. 영원히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같이 보는 그인데도, 그가 겪어 온 길을 알면 알수록 그가 더 좋았고, 더 존경스 러웠고, 더 가까이에서 있고 싶었다.

문득 내가 망설이며 그의 상의 단추에 손을 가져가자, 그가 입술을 떼었다. 아쉬운 듯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장난기 없이 진지했다.

“셀레스티아.”

대답 대신 눈만 깜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면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다. 내게 그렇게 푹 빠 졌다는데 떠밀려서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아니, 저기요.

“누가 그렇게 푹 빠졌대요?”

“사랑한다며?”

오늘 한 말이 내 입을 막았다. 치 사하게.

난 입을 비죽거리며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의 단추를 마저 풀었다. 시중 들었던 경력은 퍽 도움이 되어 서 복잡하게 생긴 그의 단추도 수월 하게 끌러 낼 수 있었다.

단단한 가슴팍이 얼핏 보였다.

“천날만날 내 앞에서 벗고 있었으 면서 인제 와서 새삼 그런 거에 쫄 까 봐요?”

“쫀다니, 이제 황후인데……,”

곤란한 듯 중얼거리는 그를 떠밀 고 눕힌 건 이제 내 쪽이었다. 치렁 거리는 드레스 자락이 반의 정장 위 에 쏟아졌다.

난 그의 위에 올라타서 고개를 숙였다.

“반이야말로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면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에요. 저 한테 그렇게 푹 빠졌다는데.”

“웃기지도 않는군.”

반이 피식피식 웃으며 중얼거렸 다.

난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며 그 에게 입을 맞추었다. 떨리는 내 손 을 그가 맞잡아 주었다. 맞닿은 가 슴에, 반의 심장도 빠르게 뛰고 있 다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가 가벼운 입맞춤으론 성이 차

지 않는지 내 드레스의 어깨 자락을 밀어내며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단 숨에 깊은 해저까지 사람을 끌어 내 리는 짙고 달콤한 키스에 나도 눈을 꼭 내리감았다.

5^)110응 110

오늘은 황궁의 새 각료들을 뽑는 날이자, 나의 결혼 1주년 기념일이 었다. 그리고 나는 모처럼 좋은 날 을 맞아 좀 휴가를 보내는 게 좋겠 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러자고 대답 했다. 그리고 즉시 여기로 달려왔다.

바로 골디나의 뒷골목이다.

역시 뒷골목은 좀 꼬질꼬질한 맛 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엔 정비했다 더니 그런 게 좀 부족하다. 내가 살 았던 골목도 지나가 보았지만 전당

포만이 남아 있을 뿐, 나머지 낡은 건물은 모두 부수고 없었다. 세렉이 다녔던 마법 학원도 장소를 이전했 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시간이 흐르 긴 한 모양이다.

지금도 골디나라고 부르는 뒷골목 거리에는 하수도를 설치하는 인부들 이 종일 일했고, 판자로 쌓아 올린 낡은 건물들은 모두 바뀌었다. 거리 에 즐비하게 누워 있던 거지들도 볼 수 없게 되었고, 아이들은 잠에서 깨면 구걸을 하는 대신 학교에 가게 되었다 들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사람들의 안색 이 어두운 걸까?

“하, 역시 나오니까 좀 살 것 같 아. 안 그래요?”

난 밀짚모자를 빙글 돌려 쓰며 비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처 럼 대답했다.

“지난주 중의 5일을, 지지난 주 중의 6일을 외출하셨습니다만……,”

불평이라곤 모르는 비뉴스가 이렇 게까지 지친 소리를 하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와 나는 지금 싸구려 해어진 평민의 옷을 가 져다 입고 시정잡배들이 가판대를 차려 놓은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좀 기운을 내 봐요.”

비뉴스는 이제 대꾸할 정신도 없 는지, 주변을 경계하기에 바빴다. 당 연히 그 말고도 호위가 여럿이었지 만, 평소와 달리 다른 시민과의 접 촉 거리가 너무 가깝다 보니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것이다.

지금 하는 일은 황후 업무의 일 환 중 가장 신나는 잠행이다.

지난 일 년간 반은 처음 약속과 같이, 내게 황후의 권한을 정당하게 인정해 주려 애썼다. 그래서 나는 이름뿐인 ‘황제의 비’에 머물지 않 을 수 있었다.

비서일 때와는 또 다른 나의 역 할이 생겼고, 나는 내가 한 만큼 그 대로 바뀌어 나가는 나라를 보며 점 점 기꺼이 애써 일하게 되었다. 비 천한 신분이라 괄시하는 자들과 맞 서 싸우며 법을 개정하고, 아카데미 를 정비하고, 영주가 탈세하여 국민 을 착취하는 지역을 가끔 살피러 나 가기도 했다.

하지만 뒷골목에서 나고 자란 까 닭인지, 매일 황궁 안에 앉아 입으 로만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떠 들고 있자면, 손에도 발에도 머리에 도 쥐가 났다. 이렇게 밖으로 나와 서 눈치 보지 않고 다닐 때가 제일

좋았다.

가엾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황제가 해외 출장을 간 지금이 아니 면 도대체 언제 여기까지 와 보겠는 가.

난 신이 나서 시장을 구경했다.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된다고 뜯어말 리는 비뉴스에게 기미를 보라는 명 목으로 달콤한 과자를 잔뜩 먹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난 설탕 과자를 배배 꼬아 막대 에 꽂은 것을 쪽쪽 빨아 먹으며 사 람들의 표정을 살피거나 영주에 대 해 묻고 다녔다. 한 입 먹을 때마다 황후의 체면이 30년씩 후퇴한다고

나무라던 비뉴스도, 내가 황후의 체 면을 한 3백 년 정도 후퇴시킨 뒤 에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신분이 귀한 차림으로 돌 아다녔다면 시장의 평민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고 허튼소리를 하지 않 았을 테다. 하지만 나는 골디나의 어디에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로 보일 뿐이다. 시장 사람들은 영주의 만행에 대해 실토 해 주었다.

골디나의 왕비가 나라를 팔아 치 우다시피 넘겨 버린 뒤 영주를 그대 로 유지한 정책이 아무래도 문제였 던 모양이다. 반은 병합한 사람들의

마음을 괜히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 던 것뿐이겠지만, 처음엔 그럭저럭 착하게 굴던 이 영주님께선 점차 나 아지는 복지 제도에 이때다 싶어 세 금을 끝도 없이 올려 받는 모양이었 다.

나는 적당히 정보를 수집한 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에 대해 슬쩍 물었다.

“혹시 노예 시장과 관련된 소문은 모르세요?”

시장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 더니 입을 싹 다물었지만, 난 그들 의 눈빛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갔다.

난 한껏 불쌍한 척을 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 노예로 팔려 간 적이 있어서 그래요. 혹시 어딘 지 아신다면 말씀해 주실 수 없을까 요?”

그들이 뭐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 겠다. 내 자식이든, 내 부모든, 내 형제든 누군가가 팔려 갔다고 생각 했겠지. 시장 할머니는 안타까운 표 정으로 내 귀에 대고 영주가 주최하 는 노예 시장이 어디서 열리고 있는 지를 알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노예로 팔려 갔던 아는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비뉴스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 지만, 난 양심이 조금도 찔리지 않 았다. 빙긋 웃은 나는 얼른 그를 재 촉해 대로로 나갔다.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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