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아주 먼 광장까지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이 여기 서서 도 잘 느껴졌다. 반은 군중들 가운 데에 우뚝 솟아 있는 처형대를 바라 보는 듯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말 을 이었다.
“일주일 후 황태후와 그의 세력을 광장에서 처형할 것이다. 나의 아바 마마께서 사랑하셨던 여인을 죽음으 로 몰아넣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 나, 우리의 조상과 시조, 역사를 생 각해 보더라도 우리는 반역을 그냥 넘긴 적이 없다. 그것이 부르크의 이름을 강하게 만들어 왔다. 그들의 죽음은 짐에게도, 그대들에게도 고
통일 수 있겠으나 경고의 뜻과 방조 한 자들에 대한 반성의 뜻을 담아 공개 처형하겠다.”
반은 내게 이어 말하라고 눈짓했 다. 나는 반과 같이 또렷하고 자신 감 있는 태도로 말할 자신은 없었지 만, 내가 말하고 싶다고 한 부분이 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나서 반의 옆에 나란히 섰다.
“이렇게 반겨 주어서 고맙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골디나에서 온 평 민 출신의 여인에 불과했어요. 그대 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모두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 입 으로 다시 한번 굳이 말하는 것엔
용기가 필요했다.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관중들은 조금도 동요하 지 않고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 은, 부르크 제국이 출신지와 신분에 관계없이, 우수한 인재를 대우하겠 다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 에요. 부르크 제국은 많은 다른 부 족이 섞여 살아감에도, 출신 부족의 과거에 쓰라린 패배가 있든 없든 상 관하지 않는 자유로운 국가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더욱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여기고 사랑할 수 있었어 요.”
다음 말을 이어가기에 앞서 화-하는 함성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손을 들자, 광장이 떠나가라 터져 나오던 고함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이어 말했 다.
“아는 것은 적으나, 공식적으로 부르크 제국의 노예 제도 폐지와 빈 민 구제를 위해 힘쓸 생각이에요. 있는 힘껏 일하겠습니다. 지켜봐 주 시고 많이 도와주세요.”
일하겠다고 초장부터 선포하는 황 후가 있을까? 광장에는 잠깐 침묵이 흘렀으나, 이내 일제히 요란한 박수
와 함성이 휘몰아쳤다. 검고 붉은 천의 파도를 보며 심장이 두근거렸 다.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 었다.
그저 나의 각오를 말하고 싶었고, 빈민가에서의 나의 삶과 아카데미에 서 차별받아 온 나의 삶에 지금의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를 생각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지난 나의 고통받은 시간에도 의미는 있 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나의 이해와 공감일 것이다.
약혼식을 축하하는 악단의 음악과 마법 기사단의 화려한 열병식 이후, 황제와 나의 키스로 식은 마무리되
었다.
국민과의 대면이 워낙 인상적이었 기 때문일까? 오히려 연회가 훨씬 더 수월하고 견딜 만했다. 반과 연 회 시작을 알리는 첫 줌을 춰야 하 는 것이 좀 곤혹이었을 뿐. 다행히 도 반은 꽤 실수를 잘 숨겨 주는 파트너였고, 우리는 춤을 무사히 마 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인사와 선물 을 받고, 답례품을 주고, 웃는 낯으 로 담소를 나누었다. 다행히 아카데
미에서 참석해 준 친구들과 반 덕분 에 어떻게든 긴장을 떨쳐 버리고 이 야기를 잘 나눌 수 있었다.
해외에서 온 손님들이나 부르크 제국의 중심 가문들은 나를 조금 깔 보는 눈치를 보이기도 했다. 초장부 터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펼 치겠다고 대국민 연설을 했으니 마 음에 안 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장 식용으로 발탁된 황궁의 꽃이 아니 었다. 밥그릇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어릴 때부터 치고받으 며 자라 온 싸움닭인 것이다. 한 마 디 시비를 걸면 뒤를 졸졸 쫓아다니
며 열 마디로 되돌려 주자, 귀족들 도 기가 질리는지 더 시비를 걸어오 지 않았다.
매일 쓰러지듯 잠들고 새로운 드 레스를 갈아입는 사이에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 다.
마지막 날에는 인상적인 손님이 많았다. 우선 테포다에서 3 황자라 는 자가 찾아왔는데, 그는 나와 눈 도 마주치지 못하고 귀한 선물만 잔 뜩 내려놓고 어정거리다가 돌아갔 다. 반이 그를 죽여 버리지 않도록 감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손님은 르베
르티티였다. 그럴듯한 귀족 인사처 럼 보일 정도로 잘 차려입고 나타난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왔다 갔을 뿐이 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오른팔에 새 겨진 문신을 잘 알고 있었다. 나만 이 지워 줄 수 있는 충성의 각인이 다.
하지만 제록스와 르베르티티의 길 드가 아무리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 한들, 그들을 곧장 믿는 것은 불가 능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연회의 마지막 날이 끝났 다.
해가 저무는 시간, 붉은색으로 하 늘이 물들 때에 광장에서 처형식이 시작되었다. 단두대에 차례로 다섯 의 사람이 목을 길게 내밀고 엎드렸 다.
그들은 살려 달라는 말조차 없었 다. 제가 한 짓이 얼마나 위험한 도 박이었는지 모르지 않으리라.
아주 높이 올라간 칼이 단숨에 떨어졌다. 동시에 여러 개의 목이 잘려 나갔다.
이것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 장 온화한 벌이다.
단두대에 오른 무리 중에는 세렝
게반도 있었다. 한때나마 목숨을 바 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 이, 단두대에 목을 길게 빼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씁쓸했다.
하지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나를 보자마자 고함을 쳐 댔 다. 이미 반쯤 마물화가 진행된 그 는 얼굴의 반쪽이 검게 물들어 있었 다.
“셀레스티아,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한 번만 살려 주라, 응? 내가 이번엔 잘할게.”
그의 시선을 받아 내는 것도 나 의 몫이겠지. 나는 의연하게 고개
를 들고 끌려가는 세렉을 바라보았 다.
“셀레스티아, 안 들려?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어?! 너, 나한테 매 달릴 땐 언제고 이렇게 사람이 달라 지냐?”
“어디, 황후 폐하께 무엄하게!”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바닥에 쓰러 지면서도 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것 같았다. 제가 잘못한 것이 어 디서부터인지. 오로지 힘만을 위해 달려 나가며 그는 뒤돌아볼 줄을 몰 랐다.
처음엔 나를 버렸고, 그러고는 제
자식을 품었던 다른 여자도 버렸다 고 했다.
제 사람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 하는 그가 뭐 얼마나 대단한 자리까 지 갈 수 있었겠는가? 앞뒤 재지 않고 권력만을 뒤쫓는 불나방 같은 행동이 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 이다.
그리고 어차피 더 살아 숨 쉰다 한들 악귀에게 몸이 삼켜지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래도 세렉이 단두대에 오른 꼴 을 보자 속이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악랄했으나 황태후에게 이용당한 자 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세렉이 죽는
순간, 사미디온이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처형대에 오른 것은 그리 오래 우리를 괴롭혀 온 황태후 였다. 오랫동안 감옥에 수용되는 사 이에 곡기를 끊다시피 했다 들었다. 흰 죄수복을 입고도 그녀는 단정했 다.
끌고 가려는 병사들에게 제 발로 걷겠다 쏘아붙인 황태후는 맨발로 천천히 걸어 단두대 앞에 섰다.
반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없습니 까?”
황태후는 반을, 그리고 나를 쏘아 보았다. 짧은 사이에 해골처럼 마른 얼굴에 눈빛만 형형했다.
“나는, 이 나라에 시집온 뒤로 나 의 최선을 다했소. 남편이 나를 사 랑한다기에 아이를 낳아 주었고, 아 이가 아비를 잃었기에 내가 돌보려 했을 뿐이오. 내겐 잘못이라곤 없 소.”
“당신은 무고한 자들을 수십, 수 백이나 해치려 했고, 옆 나라와 손 을 잡고 반역까지 일으킨 자인데
황태후가 낮고 음산하게 웃었다.
“이겼으면, 그건 반역이 아니었겠 지. 그저 한 끗 차이였소. 반역이니 뭐니 이름 붙이는 것이 우습지 않 소, 황제여?”
“나만 건드렸으면 괜찮았겠지. 하 지만 여론 조작을 위해 국민의 목숨 을 우습게 여긴 순간부터 그대의 끝 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소.”
반도 심경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예 눈을 감아 버리는 황태후 를 보곤 한숨처럼 덧붙였다.
“아바마마를 만나시거든, 거기서 라도 편히 쉬시오.”
황태후가 목을 길게 늘였고, 단두
대의 칼이 떨어졌다. 마지막은 짧았 다. 한때 부르크 제국의 권력을 이 분하던 주도자는 그렇게 숨을 거두 었다.
죄인의 죽음이라 한들, 인간의 죽음을 목도하는 순간은 슬프다. 좌중은 침묵으로 단두대를 지켜보 았다.
반역의 무리 중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은 반의 이복동생인 막시였다. 그 모든 죽음의 행렬을 가만히 구경 한 그는 다시 탑에 유폐되기 위해 일어나 끌려갔다.
한순간 눈이 마주쳤다. 방금 제 어미의 죽음을 목도한 그였다. 눈에
비감이 가득했다. 시선은 이내 떨어 졌지만 그 눈빛만은 오래 잊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내 옆으로 와서 나를 제 품으로 당겨 뒤에서 안아 주었다. 난 손을 들어 내 목과 어깨를 감싼 그의 단단한 팔을 꽉 움켜잡았다. 등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에 마음이 따뜻해 졌다.
“오늘은 술을 진탕 해도 괜찮겠 군.”
“드디어 다 끝났네요.”
“고생했다.”
“반도 고생했어요.”
단두대에서 눈을 뗄 수 없어 나 는 못 박힌 듯 거기에 한참 서 있 었고, 반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뒤에 야 다시 반이 말했다.
“셀레스티아.”
“ 네?”
“내가 너를 어려운 곳으로 끌고 왔다는 것은 알고 있다. 힘들 때는 기대도 좋다.”
나는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 다. 반은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를 제 가슴으로 끌어당겨 꽉 안았다. 기대 라고 한다고 정말 기대고 싶지는 않
은데, 그처럼 굳건하고 싶은데, 나는 그게 아직 어렵다.
그래야 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죽음을 보는 게 지치고 마음이 시렸 다.
눈물이 멎고서도 한참 그의 품에 기대 있었다. 그는 내가 괜찮아지자 나를 제 망토로 휙 감아 안아 올렸 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해자 입구의 다리를 지날 무렵, 창밖으로 스며드는 빛에 반짝이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 났다는 듯 불렀다.
“ 반.”
“왜 그러지?”
이 모든 것을 겪어 온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권력의 정점에 서서, 눈 돌리고 싶은 일들도 똑바로 바라 보며 제대로 걸어 온 그가 새삼 존 경스러웠기에.
“사랑해요.”
아무렇지도 않아 할 줄 알았다. 우리는 이미 약혼도 했고, 2주 뒤엔 정식 결혼식도 올릴 테고, 어차피 서로의 마음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새삼 듣는 것은 또 다른 걸까? 반이 지친 얼굴로도 깊게 웃
더니 내 손바닥에, 손목에, 볼과 이 마와 콧잔등에 키스했다. 입술에 키 스할 듯 가까워진 채로, 그가 내 눈 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마치 아직 도 수줍은 사람처럼, 그가 덤덤함을 가장하여 속삭였다.
“나도 사랑한다.”
그리고 반은 아주 느리고 부드러 운 키스로 내 입을 막았다.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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