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늦은 시간인데 아직도 안 자는 군.”
“반도 안 자잖아요.”
그가 들어가도 되냐는 듯 눈짓했 고, 난 문을 크게 열어 주었다. 황 제 폐하가 납실 때마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경호원들이 문 앞 에 주르륵 버티고 서는 것도 이제 눈에 익었다. 난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하곤 문을 닫았다.
반은 제 방인 양 아주 편하게 척 척 걸어 들어와 슬리퍼를 벗어 던지 고 침대에 앉았다.
“밤에도 예쁘군.”
그는 툭 던지듯 중얼거리곤 내 젖은 머리카락에 키스했다. 발바닥 까지 다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반, 진짜 한 번씩……/
“왜?”
“아닙니다.”
솔직한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아, 진짜 세계에서 제일 남의 눈치 볼 필요 없는 사람으로부 터 받는 칭찬이라는 게 얼마나 낯간 지러운지 저 황제는 모른다.
반이 내 쪽으로 팔을 벌렸고, 난 쑥스러워서 주위를 얼쩡거리기만 했 다.
“팔 떨어지겠군.”
“떨어지면 제가 줍겠습니다.”
“……그냥 안기면 안 되나?”
약혼하는 사이가 원래 이런 건 가? 아직도 부끄러워 죽겠다.
반의 품으로 슬금슬금 걸어가 무 릎에 비껴 앉아 폭 안겼다. 안기는 감각이 참 편안하긴 하다만, 역시 낯간지럽기도 하다. 손으로 짚은 그 의 굵은 목에서 빠른 맥박이 느껴졌 다.
귓가에서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내일이 긴장되나?”
“그야 당연하죠.”
“여론이 아직도 무섭나?”
난 쓰게 웃었다.
“이제 뭐가 무서운지도 모르겠어 요. 그냥 막막하게 무섭고 두렵 고……, 신분에 대한 게 아니라요, 그야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어깨가 무거워요. 제 가 누군가를, 아주 많은 누군가를 대표할 수도 있는 자리에 오른다는 게.”
황제는 작게 웃었다.
“이거 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 데 책임감부터 챙겼군. 내가 참 다
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안목은 괜 찮다니까.”
무슨 소리를 하든 다 제 칭찬으 로 연결하는 저 황제 좀 보라지. 정말 황제라는 자리가 적성에 딱이 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오늘은 일찍 자둬라. 피곤할 텐데.”
“난 괜찮으니까 반이나 일찍 자 요.”
반은 내 볼에, 이마에 한 번씩 입 맞추곤 나를 이불에 폭 밀어 넣었 다. 가볍고 폭신한 이불을 잘 정리 해 준 그가, 이불 위에 모로 누워
날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 을 참인가 싶어 흘끗 바라보자, 붉 은 눈이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 다.
“잘 때까지 곁에 있다 가겠다.”
볼이 뜨거워졌다.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그럴 필요 없어요.”
“어린애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댈 보는 게 좋아서 그런다.”
말을 말자.
더 상대해 줬다간 언제까지나 부 끄러운 소릴 지껄일 것 같은 반 때 문에 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황
후라는 자리에 대한 부담감, 내일 연회 식순에 대한 생각, 손님들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이 한결 가벼워 져 있었다. 도저히 오지 않을 것 같 던 잠이 천천히 밀려왔다.
가슴 위를 가볍게 토닥거리는 느 낌에, 그만 좀 하고 자러 가라고 말 을 할까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에 잠 에 빠져들었다.
이른 새벽부터 꽤 오랜 시간 단 장이 이어졌다. 밤잠을 설친 탓에 화장을 받는 동안 꾸벅꾸벅 졸기까
지 했다.
“언제까지 졸고 계실 건가요? 이 제 드레스를 입으셔야죠!”
세레나의 엄한 목소리에 퍼뜩 정 신이 들었다. 연회장에서 기다리다 가 내 단장이 늦어진다 싶어 올라온 모양이 었다.
헐레벌떡 몸을 일으키자 세레나가 드레스 입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시원하게 어깨와 등을 드러내는 흰 드레스를 연회 첫날의 드레스로 골 라 두었다.
단장이 다 끝나자, 세레나는 그제 야 엄한 얼굴을 풀었다. 그러곤 거
울 너머로 내 앞모습을 살피더니 빙 긋 웃었다.
“드레스 목에 박힌 붉은 보석이 셀레스티아 님의 눈과 꼭 어울립니 다.”
이제 존대하는 그녀를 말릴 수도 없는 신세가 된 나는 어설픈 미소로 답례했다. 잔뜩 긴장된 내 얼굴만 눈에 들어오고 예쁜지 아닌지도 모 르겠다.
그때 뒤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깜짝 놀라 뒤돌자 세레나가 하녀에 게 트레이를 받아 내 쪽으로 내밀었 다. 오늘 연회에 나갈 음식들을 조 금씩 미리 담아 두었는지, 알록달록
한 음식이 먹기 좋게 작게 썰려 있 었다.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못 드실 겁니다. 간단하게 요기하실 것을 준 비해 두었습니다.”
“세레나……;
“손님 접대도 기운 빠지는 일이니 까요.”
“고마워요.”
“이제 존대는 정말 그만두지 않으 시면, 제가 잡혀가요.”
“……고마워. 얼마나 고마운지 몰
라.”
세레나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우 리에게 와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내 귀에만 들리게 속삭였다.
“저야말로 이렇게 좋은 분께서 황 제 폐하를 거둬 주셔서 안심입니 다.”
못 산다, 정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다 곁에 있어 주는데, 걱정만 하고 있어서야 실례다. 나는 간단한 요기를 마치고 기운차게 방을 나섰다.
아카데미 연회 파트너를 마중 온 소년도 아니고, 황제는 준비가 덜 되었다는데 자꾸만 기웃거렸다. 제
생각보다 내 준비가 오래 걸린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인지, 반은 아예 내 근처 넓은 의자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가 근처에 있으니까, 호위 기사 와 그를 보필하는 신하가 주위에서 자꾸 얼쩡거리는 게 귀찮았다. 거울 너머로 반을 쏘아봤다. 처음에는 왜 저러나 싶어 심통이 나서 쳐다봤는 데, 계속 보고 있는 사이에 그의 모 습이 차츰 눈에 들어왔다.
단정한 검은 정장 차림이지만 검 은색이라고 해서 수수해 보이지 않 았다. 본디가 화려한 사람이었다. 그 만이 쓸 수 있는 색인 보라색을 빳
빳한 옷깃과 소매, 벨트에 댔고, 금 장 단추와 금사 장식을 포인트로 과 하지 않게 쓴 것이 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몰랐다. 옷을 맞출 때도 분명 같이 고르긴 했는데, 건장한 몸에 걸쳐 놓으니 역시 그림이 된 다.
황제의 관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서류를 읽고 있던 그가 갑자 기 고개를 들었다. 거울 너머로 시 선이 맞닥뜨렸다. 막 화장이 끝난 참이 었다.
무표정해 보였지만, 나는 반의 표 정을 읽는 거라면 이제 도가 터 있 었다. 어딘가 곤란하단 얼굴이다.
‘왜 그래요?’ 입 모양으로만 묻자, 그가 입 모양만으로 대답했다. ‘너 무 예뻐서 곤란하군.’ 진짜 창피해 서 못 산다. 밖에서 그런 말 하고 다니지 말았으면 좋겠다. 과하게 칭 찬하는 그의 버릇을 자꾸 받아 주면 습관 나빠질까 봐, 난 부러 못 알아 들은 척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건 내 실수였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 내 연인께서는 제 의사 를 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 을 별로 겪어 본 적이 없는 모양인 지 태연하게 소리 내 말했다.
“너무 예쁘면 유능함이 가려지기 도 하니까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셀
레스티아, 들었나? 온종일 보고만 있어도 안 질리겠군.”
등에 반짝이는 가루를 발라 주던 시녀들의 손이 멎었다. 그녀들은 서 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잔뜩 들뜬 목 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너무 로맨틱하시다.”
아니다. 그냥 팔불출인 거다. 난 부끄러워 손을 살랑살랑 저었다.
약혼을 승낙한 뒤부터 부쩍 저랬 지만, 저러다 말겠지 싶어 뭐라고 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하 지만 어째 점점 기세를 더해 가기만 한다.
마침 단장이 끝났다는 이야기에 나는 반짝이는 구두에 발을 밀어 넣 고 일어섰다. 반도 서류를 시종에게 넘기곤 내게 다가왔다. 핀잔을 줄 셈이었지만, 가까이서 본 반은 절로 숨을 들이켜게 잘생겼다. 원래도 잘 생긴 그인데 오늘은 유독 신경을 쓴 까닭이다.
빤히 바라보는 눈빛을 느꼈는지 그가 씩 웃곤 몸을 구부려 속삭였 다.
“남편 잘 골랐다 싶나 보지?”
웃긴다, 정말. 이 황제는 가끔 사 람을 시장에서 사들이듯 말한다. 난
핀잔을 줄까 하다가 그의 날카로운 눈매와 드러난 잘생긴 이마에 시선 을 사로잡혔다. 조금 진 기분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괜찮게 고르긴 한 것 같네 요.”
눈을 가늘게 접어 길게 웃은 그 가 내 붉은 머리칼에 키스했다.
“국제 무대 데뷔전, 빨리 해치우 고 나면 오래 쉬자.”
“ 네.”
시녀들은 무슨 약혼식을 그렇게 전쟁하러 가듯이 말하냐는 눈으로 우리를 봤지만, 반과 나는 비장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연회의 빠른 진 행뿐이었다.
크게 살펴 식순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황궁 테라스에 모여 있는 국민 앞에서 하는 인사, 황실 식솔 및 대귀족들과의 인사, 그리고 일주 일간 이어지는 축하연.
우리는 우선 테라스에 올랐다. 길 게 드리워져 있는 금빛 커튼 앞으로 나서지 않아도 큰 함성이 귀를 아프 게 때렸다. 성 앞에 얼마나 많은 국 민이 몰려들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
었다.
“황제의 반려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후 폐하 만세!”
“만세 — !”
황제가 연설을 준비할 때, 몇 번 이고 이 커튼 뒤에 함께 서곤 했었 다. 하지만 이젠 내가 앞으로 나서 야 한다. 만세를 연호하는 목소리에 등 떠밀리듯 황제와 함께 테라스로 나아갔다.
저 멀리 해자 너머, 대광장 너머 좁은 시장 골목이 시작되는 곳까지 빼곡하게 모여든 인파로 가득했다.
정말이지 인산인해라는 말밖에는 떠 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가득 모인 사람들은 나와 황제가 모습을 드러 내자 일제히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귀가 울릴 정도의 큰 함성. 그리 고 모두가 손에 쥐고 흔들고 있는 붉은색과 검은색 천의 물결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고양감이 밀려 왔다. 반이 내 손을 꽉 쥐었다.
“저 붉은 천의 수만큼 너를 환영 한다는 뜻이다.”
광장에서부터 성 바로 앞까지를 메우는, 붉고 검은 천의 물결이 도 대체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는데 그
제야 깨달았다. 부르크에서는 머리 카락 색을 닮은 천을 흔들어 결혼을 축하하는 의식이 있다고 한다. 저 천의 색이 바로 나와 반의 머리카락 색이다.
저들은 알까? 각료 회의에서도 괄시당한 나의 붉은 머리칼을 저렇 게 반겨 주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 인지.
본래도 그깟 차별 따위 아무렇지 않았지만, 이젠 더 괜찮았다. 고맙다 는 표현을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반 을 돌아보자, 그가 내 뜻을 눈치챘 는지 입을 열었다.
“손을 흔들어 줘.”
쑥스러웠지만 나는 비어 있는 손 을 들어 그들에게 흔들어 주었다. 만세를 연호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 다가, 앞으로 나선 재상 리온이 말 하겠다는 뜻으로 손을 들자 일제히 잦아들었다.
리온은 음성 확장 마법을 시험하 듯 몇 번 속삭여 보았다.
“존경하는, 존경하는 국민, 국민 여러분, 여러분분분분.”
황제가 직접 쓸 때는 퍽 깔끔하 게 들리던 음성 확대 마법이 메아리 처럼 들렸다.
“지금부터, 지금부터 황제 폐하의,
황제 폐하의 연설이, 연설이 시작됩 니다, 시작됩니다다다.”
반이 고개를 끄덕이곤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조율했다. 그러곤 연단 에 올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셀레스티아와의 약혼을 선포하는 기쁜 자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항 들을 알리려 한다. 일단 결혼식도 이번 달 안에 하리라는 것을 먼저 말해 두겠다.”
갑작스러운 선포에도 아무도 놀라 지 않았다. 지금의 약혼식은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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