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황후, 셀레스티아
지옥이 있다면, 황제와의 약혼을 일주일 만에 준비하는 일정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비서 일을 인수인계할 만한 적당 한 사람을 고르고, 면접을 볼 때는 전임 비서님의 도움까지 받았다. 무 슨 황족들은 춤을 그렇게 많이 춰 대는지, 내가 저번에 연회에서 췄던 춤은 장난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배워야 하는 춤의 가짓수도 많고 복 잡하기 짝이 없었다.
뿐만인가? 예절은 또 뭐가 그렇 게 따지는 게 많은지, 예절 교사는 내가 밥 먹을 때도 걸어 다닐 때도 하나하나 다 잔소리를 하며 따라다 녔다.
거주 공간도 달라졌다. 나와 반은 지금의 생활 형태에 크게 불만이 없 었다. 하지만 궁정 예법에 따르면 황제의 여인은 마땅한 자신의 공간 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별수 없이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규모의 황궁 본궁과 떨어진 별궁의 방 하나를 별도로 더 가져야 했다. 그것의 실내 장식까지 일일이 내게 물어보고 허락을 받는 바람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뿐인가? 무슨 드레스를 맞추는 것도 스무 벌가량을 입어 보고서야 겨우 한 벌을 고를 정도라서, 나중 에는 그냥 나를 죽이고 시체에다가 대고 옷을 입혀 보든지 말든지 마음 대로 하라며 드러눕고 싶은 지경이 었다.
모두가 지옥 같은 사건들뿐이었지 만 개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 으라면, 단연코 내게 가발을 씌우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의회 분들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그래도 내 예식 절차와 관련된 일이라 하니 예의상 한번 객원으로 참석한 의회에서는,
그놈의 가발을 가지고 30분을 토론 해 댄 것이다.
“그래서 제가 가발을 써야 한단 말씀이신가요?”
내 질문에 스무 명이 넘는 의원 들의 고개가 동시에 위아래로 움직 여졌다. 그들은 그런 걸 왜 묻냐는 뉘앙스였다.
난 기가 막혔지만 그게 예의라 하니 그냥 써 줄 생각이었다. 그냥 지금도 죽을 것 같고 너무 힘들지 만, 가체 좀 머리에 얹고 가발 좀 쓰면 목이 더 아프기야 하겠지만 견 뎌 보겠다는 고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할아버지 의원 한 분이 이렇게 말을 한 거다.
“다른 나라의 손님도 있는 자리인 데, 붉은 머리 황후를 소개할 순 없 질 않은가.”
말하고서야 아차, 하는 얼굴이었 지만, 그제야 나는 그들의 본심을 깨달았다. 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처음부터 이국의 사람이고 천한 신 분이라고 싫다고 하든가, 아카데미 연회장까지 쳐들어와서 연극을 할 땐 또 언제고.
말문이 턱 막혔지만, 도저히 이건 못 들어 주겠다 싶었다.
난 의원들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하는 말은 다 들어 주겠다는 얌전한 태도를 버리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가발은 못 쓰겠습니다.”
“……세상에, 그게 무슨 소립니 까.”
“어차피 눈 가리고 아웅 해 봤자, 알 사람은 다 알지 않습니까.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의원들은 내가 진짜 말도 안 되 는 소리를 한다는 듯 웅성댔다.
그제야 알았다. 그들이 나를 황후 로 쉽게 받아들여 준 것은 첫째, 황 제의 권한이 워낙 막강한 까닭. 그
리고 둘째로는 내게 다른 뒷배가 없 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2의 황태 후가 되지 않을 인물이 필요했을 것 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나를 주무르기 쉬운 꼬맹이쯤으로 취급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완고하게 반대하자 의원들이 황당하다는 듯 다시 각자 의견을 제 기하기 시작했다.
“권위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는 때론 불편함도 감수해야 하는 법 입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권력을 가진 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떠들 테면 떠들어 봐라, 나는 안 듣겠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데, 누가 내 옆자리의 의자를 쓱 빼고 섰다. 올려다보니 반이었다.
나를 제외한 전 의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 대한 예의를 표했 다.
반은 앉아도 좋다는 손짓을 하는 대신, 붉은 눈으로 장내를 한번 둘 러보곤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전통은 구습에 지 나지 않소. 경들이 내 얼굴에 먹칠 하는군. 내 비가 달아나면 그대들을 문책할 테니 그리 아시오.”
“하지만 폐하! 이것은 구습이 아 니오라, 어디까지나 엄연히 권위에 대한 문제로……/
“그대들도 지금 일어서 있질 않 소? 권력이라는 것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하지 않을 권 리요. 연회에서 누군 잠옷을 입고 나오고 다른 이는 제복을 입고 나온 다면, 잠옷을 입은 쪽이 권력자가 아니 겠소?”
황제의 말이 너무 지당해서 의원 들은 할 말을 잃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들에게 황제가 다시 한번 당부하듯 말했
다.
“그대들이 내 비에게 함부로 굴 수 있는 것도 지금까지겠지. 결혼식 도 속행할 테니, 예정된 권력자에게 얼마나 함부로 굴 수 있는지 두고 보겠소.”
앉아도 좋다는 손짓에, 그제야 궁 둥이를 내려놓는 의원들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난 의원들과 사이 좋게 지내긴 글렀다는 생각에 쓰게 웃었다.
그 모든 전쟁 같은 일들이 다 지 나가고 정신을 차리니 지금이었다. 내일이 약혼식이라는 것도 실감 나 지 않았고, 그저 이 모든 것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빌 뿐이었다.
나는 혼자 쓰기엔 말도 안 되게 어마어마하게 큰, 사치스러운 욕조 에 몸을 담그고는 천장을 노려보았 다. 황제와 약혼한다는 게 좋긴 한 가. 수영해도 될 것 같은 욕조를 혼 자 쓸 수 있기도 하고.
“드디어 하루 남았는데, 기분이 좀 어때?”
루아나가 머리에 바를 오일과 목 욕에 쓸 꽃잎을 잔뜩 가지고 왔다. 손 들 기운도 없어서 물 밖으로 발 을 내밀어 손 대신 저었다. 말도 말 란 뜻이다. 루아나가 꽃바구니를 흔 들며 웃음을 꺄르르 터뜨렸다. 분홍
색 꽃잎이 수면 위로 와르르 쏟아졌 다.
난 보란 듯 발가락을 꼼지락거리 며 더 흔들어 주었다. 루아나는 이 제 욕조 모서리에 걸터앉아 배를 접 고 웃었다.
“이제 내일이면 예비 황후 폐하인 데, 이렇게 품위 없어도 돼?”
“이 매혹적인 발 기술로 황제를 꼬셨다고.”
“미친다, 진짜. 황제 폐하 앞에서 도 그 말 꼭 해라, 너.”
푸푸푸, 우리는 와르르 웃음이 터 져서 한참을 웃었다. 루아나는 한참
을 웃다가 섭섭한 얼굴로 수면을 손 가락으로 튕겼다.
“황후 폐하 되면, 나랑은 이렇게 못 놀겠네.”
난 줄곧 혼자 생각해 왔던 걸 조 르듯 물었다.
“그러면 하녀 그만하고 시녀 하면 안 돼?”
"시녀?”
“나랑 같이 맨날 이렇게 놀자. 네 가 시녀만 되면 전속으로 데려가면 되잖아.”
루아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 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평민 출신이 시녀가 되려면 정말 뼈 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녀는 허드렛일을 하지만, 시녀는 귀족과 황족의 직접적인 시중을 드는, 훨씬 더 인정받는 직업이었다.
“그게 가능해?”
“뭐, 지금은 불가능하겠지만……-그리고 내 마음대로 널 시녀를 시키 겠다 말겠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으 니까.”
루아나도, 나도 알고 있었다. 엄 연한 위계라는 게 있었다. 내가 하 녀인 그녀를 마음대로 내 직속 시녀 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명명백백했 다. 그리고 내가 함부로 그녀를 시
녀로 앉히겠다고 하는 것 또한, 설 령 가능하다고 한들, 위계를 망가뜨 리는 것이 되리라.
게다가 나와 친분 있는 하녀나 시녀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누구는 그렇게 해 주고 누구는 해 주지 않 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시녀의 지위 를 획득하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이 야기는 다르다. 어차피 내 전속 시 녀는 필요하게 마련이었으니까.
루아나는 곤란한 듯 머리칼을 자 꾸 넘겼다.
“시녀가 될 거란 생각은 해 본 적
도 없는데.”
“이참에 한번 해 봐. 정기 시험이 있다고 들었어.”
“그거 엄청 어렵고, 그리고 추천 인도 세 명 이상 있어야 되고, 무엇 보다 감독관으로 세레나 님이 들어 오신단 말이야.”
다른 데에선 그러려니 하다가도 세레나 님이라는 데에서는 나도 입 을 떡 벌렸다. 얼마나 깐깐하게 감 독할지 안 봐도 뻔하다, 정말.
내 표정을 흘끗 본 루아나가 한 숨을 푹푹 쉬더니, 포기한 듯 쏘아 붙였다.
“으휴, 내 팔자에도 없는 시험인 데. 난 그냥 빨래나 잘하고 수건이 나 잘 개다가 시집가도 괜찮았는데. 너 때문에 괜히 공부하게 생겼잖 아!”
그녀가 타박하며 내게 꽃잎을 뭉 치로 던지는 바람에 수면 위에 꽃잎 이 뭉텅이로 떠다녔다.
그래도 시험 준비는 해 볼 기색 이라, 미안하면서도 기뻤다.
“미안하게 됐다, 정말.”
“모르는 거 있으면 가르쳐 줘야 된다?”
“내가 아는 거면 다 가르쳐 주
지.”
“에휴, 황후 폐하보고 맨날 빨래 터로 오라고 할 수도 없잖아, 이제. 에휴, 친구 따라 수도로 간다더니, 정말.”
루아나가 아주 큰 짐을 짊어진 소녀 가장 같은 느낌으로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는 것이 너무 웃겨서 우리는 또 한바탕 웃었다. 루아나는 꽃잎을 다 솔솔 뿌려 주곤 머리를 매끄럽게 하는 기름도 발라 주었다.
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속 삭였다.
“아, 안 믿긴다. 이렇게 약혼한다 는 게. 앞으로 일주일 동안도 죽었 다 싶고……,”
루아나가 픽 웃었다.
“안 믿기긴 뭘 안 믿겨? 너도 참 웃긴다. 난 네 방 침대가 바뀐 날부 터 친구를 보내 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네요.”
“……그때면 너무 빠른 거 아냐?”
“빠르긴 뭐가 빨라? 황제가 방까 지 찾아와서 맨날 선물 안겨다 주는 데, 그게 그럼 달리 뭐겠냐?”
루아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정말. 그건 그냥…… 내가 가진 능력이 고
마워서 황제가 챙겨 준 것뿐이다. 지금에야 이렇게 발전한 건데……오
다 모르겠다.
반과 나의 마음이 언제부터 어디 에서 싹텄는지, 어떻게 이렇게 서로 를 마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는지.
난 괜히 부끄러워져 루아나에게 물을 잔뜩 튀겼다. 머리칼이 젖은 하녀가 나와 함께 목욕한 것은 비밀 로 해 둘 셈이었다.
씻고 밖으로 나왔을 땐 지칠 대 로 지쳐 있었다. 면 가운을 입고 빨
간 머리를 말리곤 침대에 누웠다.
심장이 너무 뛰어 잠이 오지 않 았다.
지금까지도 황제의 파트너로 연회 에 참가해 오긴 했다. 그런데 이제 는 그의 비서가 아니라 반려로 참석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눈의 앞 에 서게 될까? 한 제국의 황제 곁 이라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자리일 까?
난 괜히 참석자 명단을 꺼내 천 장을 향해 쳐들고 읽어 내렸다. 비 서로 참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 만, 그렇다고 해외에서 방문하는 인 사들의 명단을 외우길 게을리할 이
유는 없었다. 게다가 무엇인가에 집 중이라도 하고 싶었으니까.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한참 보고 있는 사이에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황제.”
“……잠깐만요.”
미친다, 진짜. 이런 시간에 별궁 까지 오다니 부지런한 건지, 뭔지. 그러고 보면 이 황궁 안 아주 구석 진 곳에 내 방이 있을 때도 황제는 잘만 찾아왔다. 새삼 이상할 일도 아니긴 하다.
가운만 입고 있는 게 어쩐지 민 망해서 뭔가를 걸쳐 볼까 하고 허둥 대다가 결국 포기하고 문을 열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