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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96화 (96/103)

- 96화

사미디온이 내민 봉투에는 제국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 다는 증서가 들어 있었다. 난 그걸 뜯어 보고 기가 막혀 웃었다. 내 앞 에서만 바쁜 척하지, 실은 한가한 거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로 뒷공작을 잘한다.

“이걸 왜 갑자기 주신 거래? 아 무 말도 없이 이것만 달랑?”

“가정 교사가 계속 왔었잖아. 테 스트 통과하면 아카데미에 시험 칠 수 있게 해 주신다고 계속 말했었으 니까.”

“ 아하.”

뒷골목 출신 처지인 사미디온은 나와 다를 게 없다. 아니, 나보다 더하게 배움에 대한 갈증에 시달려 왔을 거다.

어떻게 생각하면 황제 폐하께서 친히 배려해 주신 거다 싶어 감사하 기도 한데,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이 렇게 애를 꿈에 부풀게 만들어 놓은 건 모종의 음모가 아닐까 싶어 의심 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난 괜한 의 심을 털어 냈다.

감사할 일이다. 도대체 누가 오갈 데 없는 우리 남매를 이렇게까지 신 경 써 준단 말인가.

그리고 마냥 받는 것처럼 느껴지 지도 않았다. 나도 황제 폐하를 위 해 한 게 꽤 많았다. 그의 저주를 풀어 준 것도 나고, 그를 위해 얼마 나 뼈 빠지게 일했는데. 이 정도 배 려는 받아도 마땅하다.

“안 떠날 거니까, 시험 쳐 봐.”

오으 바

진즉에 보여 주지. 사람 미안하 게, 떠나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 부터 다 하고 나서 보여 주기는. 사미디온의 이마를 다시 톡 두드려 주는데 동생이 눈알을 데룩 굴렸 다.

“그러고 보니 약혼식은 언제 하는 건데? 나도 가야 되나?”

“내 가족은 너밖에 없는데 당연하 지!”

“난 옷 같은 거…… 딱히 없는 데.”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사미디온의 연회복을 마련하 고, 나와 황제의 연회 드레스 코드 를 맞추고, 연회복을 주문하고, 그리 고 예식 절차를 익혀야 할 테고

난 그제야 황제 폐하가 왜 내게 “비서 일을 인수인계할 시간 따윈

없을 텐데.”라고 말했는지를 깨달았 다.

정말 이번 연회에서 약혼식을 올 린다면,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 다. 황족, 왕족들은 연회 기간 동안 매일 드레스를 갈아입던데, 설마 나 도 만약 그래야 한다면 어떻게 하 지?

얼굴이 창백해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나 이만 가 볼게.”

“어? 어, 잘 가.”

“좀 잘 챙겨 먹고, 그리고 재단사

는 곧 보낼 테니까.”

“알았어. 누나도 조심히 들어가.”

비뉴스가 다급히 나오는 나를 보 곤 마차 문을 열어 주며 손을 잡아 주었다.

“빨리 돌아가요.”

“네.”

비뉴스는 사미디온에게 목례하고 나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내 마음 과는 달리, 황제의 탄신을 축하하는 구경꾼, 광대, 악단, 노점상 등으로 몹시 북적거리는 광장을 지나는 마 차는 느릿하기 짝이 없는 속도로 달 렸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절부절 못하고 자꾸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는 내가 워낙 이상해 보이긴 했나 보 다. 웬만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내 게 뭔가를 먼저 묻는 일이 잘 없는 비뉴스가 내게 괜찮냐는 질문을 세 번이나 했다.

나는 마지막 질문을 듣고 나서야 비뉴스에게 되물었다.

“비뉴스.”

“네?”

“이건 제 경호 기사가 아니라, 그…… 뭐랄까, 일반적인 관점에서

대답해 주셔야 해요.”

“전 제 입장에서만 생각할 줄 알 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합니다.”

맞는 말이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그만 허탈한 웃음이 났다.

난 그의 올곧음에 기대 보기로 했다. 만약 비뉴스가 생각할 때 영 이상한 일이 아니라면 좋겠다 싶어 서.

“지금부터, 그러니까 황궁에 들어 가서 황제 폐하께서 하신 프러포즈 에 좋다고 대답할 생각이에요.”

비뉴스의 고양이 눈처럼 세로로 긴 동공이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았

다.

“그렇습니까?”

“비뉴스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는 나를 한참 더 빤히 바라보 더니 크게 결심한 듯 되물었다.

“알겠습니다. 황실의 중요한 분들 의 경호를 전담하는 기관은 따로 있 습니다. 경호 조직을 꾸릴 수 있도 록 상의해 두겠습니다.”

아니다. 그게 아니다. 그런 실무 적인 부분 말고 정서적인 부분을 상 담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황제 의 비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겠냐는 거지.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비뉴스 가 물었다.

“셀레스티아 님께서는, 제가 계속 해서 경호로 남기를 희망하십니까? 저는 모실 수 있다면 영광이라 생각 합니다만, 제 지난 실책을 질타하신 다면 저는……;

“무슨 소리예요. 저는 비뉴스 말 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본 적도 없 는걸요.”

“귀한 몸이 되시는 건데, 이제 저 하나로 경호하는 것은 무립니다. 하 지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계속 곁을 지킬 수 있어 안심입니다. 알

겠습니다. 경호원단으로서 인사를 드리는 것은 약혼식 직후로 해 두겠 습니다.”

그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 는다. 당연한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제가 가야 할 자리를 논하 고, 앞으로의 관계를 설정할 뿐이 다.

난 ‘내가 황제 폐하의 곁으로 가 는 게 이상하게 보일까’ 하고 묻는 게 오히려 그에게 무례할 수도 있다 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나는 그런 존중을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음 에도, 언제나 비뉴스는 날 존경할 만하다고 말해 주었다.

고마워요.”

이 충직한 기사는 내 감사 인사 가 도대체 무엇에 대한 것인지 알아 듣지 못했는지 눈을 몇 번 깜박였을 뿐이 었다.

나는 그에게 방긋 웃어 주었다.

그제야 조금 불안해서 미칠 것 같던 심장이 안심되었다. 세레나도, 루아나도, 그리고 동생도, 비뉴스도, 거기다 의원 나리들도 모두 내가 황 제 폐하의 곁으로 가는 것이 이상하 지 않다고 말해 준다.

몇 번을 더 확인한다고 해도 마 음이 안심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제 그 확신은 내 밖에서 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제 내가 그 자리에 당당해질 차례 였다.

반은 오전 내내 황태후를 비롯한 이번 반란 주도자들의 처벌에 대해 논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오전의 시간을 다 쓰고도, 점심시간이 다 지나서도 결론이란 것에 도달하지 못하자 화가 치밀었음이 틀림없었 다.

내가 황궁에 돌아왔을 때 반은

연무장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 다. 둥글고 넓은 연무장은 마법으로 그늘막을 설치하여 땡볕의 야외 시 설임에도 엷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 었다.

그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난 연무장의 입구에 서서 가만히 지켜 보기만 했다. 호위 기사들이 늘어선 가운데, 넓은 연무장 한가운데서 상 의를 벗고 티아헤브 공작과 목검을 부딪치는 모습에서는 야성미가 넘쳤 다.

그렇게 격한 정무에 시달리면서 도, 도대체 무슨 운동을 했기에 저 렇게 근육이 단단할까? 저것도 다

마법으로 어떻게 수를 쓴 것이 틀림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맨날 검술을 단련하는 현역 기사들만큼 몸이 좋냔 말이다. 아니면 황족의 우월한 유전자라는 걸까?

어째 땀으로 번들번들한 상체가 좀 야해 보이기까지 했다. 꼴깍, 나 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옛날에는 피부를 보이는 것조차 꺼려서 한여 름에도 긴 팔만 입었으면서. 이젠 아주 아무 데서나 웃통을 드러내고 그런다.

탁, 탁, 탁! 경쾌하게 목검을 연속 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 니 리온 티아헤브 공작이 다리가 꼬

여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의 목에 목검이 와 닿아 있었다.

티아헤브 공작은 심통이 났는지 고함을 쳤다.

“아이고, 황제가 재상 죽이네. 동 네 귀족들은 뭐 하나.”

황제가 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티아헤브 공작은 다친 곳도 없으면 서 자꾸 앓는 소리를 하며 그 손을 잡았다. 몸을 막 일으킨 티아헤브 공작이 문득 내 쪽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맞닥뜨렸다.

“어라? 황제 폐하, 귀빈께서 오신

것 같습니다.”

반이 내 쪽을 확인하지도 않고 옆에 선 하인에게 제 목검을 건네주 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리온. 좀 더 수련을 해 둬. 지나가던 꼬마한 테도 칼 맞아 죽기 딱이니까.”

“……거, 황제 폐하. 저는 문관입 니다. 듣고 계십니까?”

황제는 리온의 말을 듣는 둥 마 는 둥 하고 수건을 건네받더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반이 그늘진 곳을 벗어나 내 쪽으로 걸어오자, 역광 때문에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 게 되었다.

그는 차분한 걸음걸이로도 퍽 빠 르게 다가왔다. 다가오는 그를 보는 동안 머릿속이 차츰 새하얀 백지가 되었다- 뭐라고 하려고 했더라? 그 러니까 약혼을…… 황제를 잘 보필 해서…… 국민들을……오

아주 굵고 명료해서 꼬일 리 없 는 실타래라고 생각했던 내 머릿속 은, 급하게 처음과 끝을 쥐고 잡아 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엉 망진창으로 헝클어져 버렸다.

반은 어느새 내 바로 앞에 도착 해 있었다. 시선을 들지 않아서 땀 에 번들거리는 그의 가슴팍만 보였 다.

“날 걷어차고 신나게 외출하더니, 잘 놀고 온 모양이군.”

이죽거리는 목소리에서 놀랍게도 불안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도 불안 할 때가 있나? 놀라서 고개를 들자, 천천히 팔짱을 낀 그가 못마땅하다 는 듯 날 노려보고 있었다.

“반이 좋다고 했잖아요. 제가 걷 어차긴 뭘 걷어차요.”

“혹시 모르지. 예쁘고 영특하니까, 어딜 가도 사람을 흘리는 건 쉽게 할 것 아닌가.”

설마…… 이 황제…… 콩깍지가 씐 것인가?

“저 좋단 사람이 어디 그렇게 많 은 줄 알아요?”

“네가 눈치가 없다고 해서 있는 사람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그럼 한 명만 말해 봐요.”

“누구 좋으라고.”

진지하게 심통 난 듯 중얼거리는 그가 너무 웃겨서 심각한 생각들이 다 달아났다. 황제의 어깨에 걸쳐진 수건을 마구 두드리며 웃자, 그도 어이가 없는지 입술을 비뚜름하게 그었다.

한참 웃고서야 간신히 웃음을 그 친 내가, 그의 목을 내 쪽으로 끌어

당겼다. 황제는 순순히 내 쪽으로 목을 기울여 주었다. 난 반의 귀에 속삭였다.

“저번에 해주신 제안, 좋아요. 해 요, 약혼.”

황제가 다시 천천히 몸을 물렸다. 배부른 짐승 같은 얼굴이 된 그가 내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콧등에, 그리고 볼에. 그리고……오

나는 기겁해서 황제의 가슴팍을 양손으로 떠밀었다. 양손에 번들번 들하게 땀이 묻었다.

“으악, 땀 묻었어.”

황제가 짐짓 진심으로 상처받았

다는 얼굴을 하며 장난스레 속삭였 다.

“짐의 땀을 두고 지금 싫어하는 것이냐.”

“하지만 땀이잖아요! 이런 걸 누 가 좋아해요?”

“그렇게 싫다면 온몸에 묻혀 주 지.”

잽싸게 뒤로 물러나며 난 양손으 로 큰 가위표를 그렸다.

“으악, 진짜 싫어. 다 취소, 방금 한 말 다 취소예요!”

반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달아났 다. 그는 재밌다는 듯 나를 쳐다보

더니 눈을 길게 접으며 웃었다. 내 가 좋아하는, 그의 진심 어린 웃음 이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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