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내가 한숨만 폭 내쉬자, 루아나가 날 다시 의자에 끌어다 앉히고 저도 앉아선 설득 조로 말했다.
“이미 반려로 있기로 한 거라며?”
“하지만 시간을 더 주실 줄 알았 지. 이렇게 갑자기 약혼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꺼내실 줄은 몰랐 어.”
“네가 불안해할까 봐 일찍 약혼하 자고 제안하신 걸 텐데, 네가 거절 하면 어떻게 해? 비서도 그만두면 넌 신분이 붕 뜨잖아.”
“그건 그런데……,”
“약혼식 올리고 나면, 제대로 된
호위를 꾸려도 아무도 입 못 뗄 테 고. 이전 같은 일도 없을 테니까.”
내가 없어진 동안 반은 버틸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얻기 위해 아부할 사 람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정식 비를 따로 들이고, 나 같은 건 첩으로 두셨으면 좋겠어. 그러면 속이 편할 텐데.”
루아나가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 다. 황제와는 달리, 그녀는 내 입장
을 충분히 이해할 테니까.
“분수에 넘친다고 사람들이 뒤에 서 수군거리기야 하겠지. 앞에서야 웃는 낯이라도 뒤에선 다른 말 하기 도 하겠지. 그런데 셀레스티아, 너도 황제 폐하를 좋아하잖아.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 어.”
“루아나.”
“세간에서 그냥 하는 말이 아니 라, 둘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사랑 이라는 단어가 정말 있다는 걸 알 것 같아서.”
루아나가 지위 때문에 황비의 자
리를 움켜쥐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망쳐 버린 적이 있 는 나라서, 사랑을 도무지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감정을 외면하려고 그 토록 오래 애써 왔다. 하나 사랑하 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것, 그것 이 가능한데 잡지 않을 이유는 없 다.
그래, 가장 명료한 하나의 명제만 을 남겨 두고, 나머지는 뒷전으로 미루자.
“루아나.”
내 어깨에 기댄 채로 그녀가 멍 하니 대답했다.
“응?”
“그럼, 내 약혼식에 와 줄 거야?”
“……꺅! 하는 거지? 하는 거구 나?!”
몸을 바로 세운 그녀가 날 와락 껴안았다. 그녀의 기쁜 어조를 듣고 서야, 이게 기뻐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하 지만 일말의 확신은 섰다. 약혼, 어 디 한번 해 보자.
루아나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 눈 뒤, 동생의 얼굴을 보러 황궁을 나섰다. 이제는 질릴 만큼 익숙해진 으리으리한 사두마차에 비뉴스와 함 께 올랐다.
광장은 하루하루 달랐다. 어제 보 았던 광장도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 된 흥겨운 분위기가 퍽 좋았는데, 오늘은 슬슬 노점상들이 들어서 더 욱 활기찼다.
이국적인 외모의 손님들도 많이 보였다.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 한 외국 사절이 워낙 많다 보니, 그 일행의 수까지 포함해서 어마어마한 모양이 었다.
보통 황궁에서 기거하도록 조처하 지만, 미리 방문하여 관광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고 들었다.
하긴 일주일의 연회다. 아무리 돈 이 썩어나 잘 노는 것이 제 역할인 귀족들이라고 해도, 그렇게 대단한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큰 영 광이자 인맥을 넓힐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다.
초대장을 받을 수만 있다면 며칠 이 걸리더라도 꾸역꾸역 부르크 제 국까지 몰려왔을 거다.
그런 대단한 ‘황제 생신 기념 부 르크 제국 궁정 연회’에서 약혼식이
라니. 새삼 핏기가 다 가셨다.
이틀 전부터 내 세상이 뒤집힌 것 같다. 내가 도대체 뭘 수락한 건 지, 뭘 어떻게 하기로 한 건지. 루 아나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좀 진 정되고, 가닥이 잡혔다고 생각했는 데 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 다.
“비뉴스.”
“네, 셀레스티아 님.”
“광장 가는 길목에 손님이 많은 거 봤어요? 마차도 얼마나 많은지 길이 다 막힐 지경이잖아요. 진짜, 저렇게 사람이 많다니……/
비뉴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정말 그렇습니다. 호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닌데. 하지만 한층 더 눈빛을 번뜩거리며 창밖을 쏘아 보고 있는 창백한 피부의 미남자에 게 더 말을 붙일 수 없어 그만두었 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광장 의 한가운데를 지나는데, 높이 쌓아 올리고 있는 목재들이 보였다. 어떤 조형물을 만드는 것 같았는데, 아직 토대 부분을 만드는 중이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게 뭐죠?”
비뉴스는 힐끗 보더니 곧장 대답 했다.
“단두대 입니다.”
목을 굵은 밧줄을 묶은 다음 바 닥을 치워 버리는 게 골디나식 처형 이라면, 테포다 제국에선 아예 목을 썰어 버리는 방식이라고 듣긴 했다.
처형을 군중이 구경할 수 있도록 단을 쌓는 거구나.
난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며 물었 다.
“단두대라니, 황태후의 신변을 어 떻게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잖 아요?”
“굳이 황태후가 아니라고 하더라 도, 자를 목은 많이 있으니까요.”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긴……;
반역의 죄는 무시할 것이 못 된 다. 죽음은 가장 상냥한 처벌 축에 속할 정도다. 반역에 가담한 이들 전부의 목이 날아가겠지. 처와 자식 은 국외로 추방되리라.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반이 치하하는 동안, 그리고 어쩌면 그
후대까지도.
어떤 대의를 위한 반란이었다면 마음이라도 아팠을지 모른다. 하지 만 그들은 그저 황태후를 따랐을 때 의 제 사리사욕을 계산한 것에 불과 했다.
한 톨의 안쓰러움조차도 아까웠 다. 가족이야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어쩐지 생각이 많아진 나는 동생 이 머무는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더 말하지 않았다.
동생은 당연히 집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정원에 나가 칼싸움을 하 고 있었다.
어린애나 가지고 놀 법한 목제 장난감처럼 생긴 물건이었지만, 그 게 얼마나 대단해 보이는지 몰랐다. 상대는 검술 교사인지 사미디온이 하는 어설픈 몸짓들을 모조리 간단 히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 광경이 대체 왜 그렇게 울컥 하는지 모른다.
나는 정원이 보이는 큰 창문 앞 에 서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침대에 누워 있기 일쑤였던 사미디
온이 제대로 걷고 뛰더니, 이젠 간 단한 운동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탁, 탁, 나무칼 부딪치는 소리가 멎는가 싶더니 눈앞에 그늘이 졌다.
“누나, 언제 왔어? 뭐야, 울어?”
“누나, 안 울어.”
“왜 그래, 진짜. 눈물만 많아져 서.”
“아니, 그냥…… 그냥 다 고맙고, 다 행복하고…… 그래서 그래.”
사미디온은 창문을 훌쩍 넘어와선 내 등을 도닥거렸다.
“진짜, 울보라니까.”
어른이 다 된 것처럼 말하는 목 소리를 듣자, 조금 부끄럽기도 해서 난 얼른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내 곤 고개를 들었다.
사미디온은 내 붉은 머리칼을 헝 클어뜨리면서 중얼거렸다.
“누나가 좋으면, 난 여기 떠나도 돼.”
“ 어?”
“저번에 와서 말했을 땐, 내가 철 없이 말했어. 진짜 떠나도 돼. 아카 데미 같은 거 원래 관심도 없었고, 나도 돈 벌어서 누나한테 진 빚도 갚고, 결혼도 하고 해야지. 언제까지
기댈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든든하고 고마운 데, 어떻게 생각하면 아직 어린아이 같다. 사미디온은 내가 왜 지금껏 그토록 고생해 왔는지 아직도 잘 모 르는 것 같다. 사미디온에게 드는 약값은 어마어마하다.
난 모처럼 결심한 것처럼 말하는 귀여운 내 동생의 이마를 가볍게 튕 겨 주었다.
“어디 감히 하늘 같은 누나 머리 를 쓰다듬어! 10년은 멀었어.”
사미디온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치, 내가 걱정해서 말해 줘도 그
러네.”
“안 갈 거야, 아무 데도.”
사미디온은 내 말을 느리게 이해 했는지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고서 야 되물었다.
“정말이야? 아무 데도?”
“그래, 아무 데도.”
“그럼 이제 그 새 황비가 오면 누 나가 황궁에서 쫓겨난다는 문제는 잘 해결된 거야? 이제 안 쫓겨나고 계속 다니는 거야?”
그럼, 계속 다니지. 그런데 그게 말이지, 직책이 조금 변동 사항이 있는데 말이지.
어쩐지 쑥스럽기도 하고, 잘 실감 나지 않기도 해서 말문이 막혔다. 난 방 안을 두어 바퀴 빙글빙글 돌 고 온 다음에야 어렵사리 입을 뗐 다.
“그게 사실은 말이야, 누나랑 황 제 폐하랑…… 약혼할 것 같거든.”
사미디온의 얼굴은 볼만했다. 가 뜩이나 당황한 얼굴인데 붉은 머리 를 제 손으로 헝클인 탓에 머리칼이 쭈뼛 선 것처럼 보였다.
“약혼이라니……오 거봐, 내가 그런 소문 들었다니까. 그땐 그렇게 시치 미를 떼고 아니라고 하더니, 진짜였
네?”
“그땐 진짜 아니었어. 그런데 갑 자기 황제 폐하께서……?
“황제랑 약혼하면 뭐지, 그…… 황후 폐하…… 내 누나가 황후 폐하 라고……/
사미디온은 제가 말하고도 웃기고 안 믿기는지 몇 번이나 ‘황후 폐하’ 라고 더 중얼거려 댔다. 나는 동생 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내가 생각해도 진짜 이상하고 믿어지지 않으니까.
사미디온은 어쩐지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카펫 위 바닥에 철퍽 주저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나 어디가 좋대?”
나도 그 부분을 영 모르겠다.
“그러게.”
“그냥 덥석 하자고 해.”
“하자고 해?”
“그래, 황제 폐하 눈에서 콩깍지 벗겨지기 전에 냅다 약혼하고 한탕 하자.”
말하는 게 천상 뒷골목에서 자란 소년이라, 절로 웃음이 났다. 그래, 우린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 동 생과 내가 참 많이도 출세했다.
사미디온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거두곤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누나도 황제 폐하 좋아해?”
난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 다. 좋아하지. 좋아하니까…… 이런 말도 안 되고 언제든 목이 날아갈지 도 모르는 신분 상승 이야기에도 안 달아나고 있지.
“그럼 뭘 고민해? 그 또라이 자 식한텐 간도 쓸개도 다 줄 것처럼 헤헤거리더니, 이번엔 제대로 된 사 람이잖아. 그렇게 잘해 준다며, 누나 한테. 가서 얼른 약혼해.”
그렇긴 한데
난 사미디온에게 진지하게 말했 다.
“하게 된다면, 이 약혼으로 언젠 가 너와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알지? 너무 큰 바닥에 발을 담그는 거니까.”
동생은 내 진지한 얼굴이 웃긴다 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땐 또 달아나지, 뭐. 노예도 돼 봤는데, 뭐 더 잃을 거 있어?”
“그야 그렇지.”
쉽게, 쉽게 말하니까 또 쉬운 일 처럼 들리는 게 재밌었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사미디온이 덧붙여 말했
다.
“그리고 황제 폐하, 남자 좋아한 다는 소문까지 났을 정도로 다른 여 자에게 관심 안 두는 사람이니까. 난 든든하다고 생각해. 누나를 맡길 만해. 어디 가서 자랑하게 빨리 결 흔해.”
이미 굳어진 마음이었지만, 사미 디온이 말리면 그만둘 생각도 있었 다. 하지만 사미디온은 아무래도 황 제가 썩 마음에 든 눈치였다.
나도 시원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마음은 결정하고 온 거였으니까.
“그래, 알았어.”
“진짜 약혼하는 거야?”
“그래.”
“진짜지?”
“그렇다니까.”
내가 다시 황제 폐하에게 말하러 갈 때까지,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 는다면 말이지만.
사미디온은 배시시 웃었다.
“사실, 황제 폐하께서 오늘 아침 에 보내 주신 게 있어.”
뭐라고?
오
뭔데?”
『II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