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94화 (94/103)

- 94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나. 황당해서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웃음이 샜다. 내가 적당히 하란 눈 으로 그를 쏘아보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진지하게 날 당겨 품에 안았다.

넓고 단단한 그의 품은 평온하고 도 두근거렸다.

“하루 만에 갑자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왜지?”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맞닿은 몸을 통해 울려 들어오는 것 같았 다. 난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무 오글거려서 못 들어주겠어 요.”

그의 낮게 웃는 웃음소리가 전에 없이 평온하게 들렸다.

자꾸 사람을 들여다보고만 있을 것 같은 반을 밀어 내려 하자, 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오늘 일정 말인데, 아무 래도 다가올 연회 준비를 먼저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요.”

황제가 내 손에 들린 종이를 홀 끗 내려다보더니 좀 이상한 얼굴을 하곤 다시 나를 바라봤다.

“아직 이해를 못 한 건 아니지? 그 똑똑한 머리로……『

“또

뭘요?”

“이번 연회, 너는 참석하는 쪽이 아니라 개최하는 측이다. 이번 연회 의 주인공이란 것쯤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네?”

내 아연한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 지, 황제는 내 손을 살짝 벌리고 종 이를 빼앗아 갔다.

“이건 내가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내, 내놔요!”

“뭐 하려고? 이런 걸 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을 텐데.”

난 볼을 부풀렸다. 화를 내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황제가 웃으며 볼 에 키스하는 걸 보면 의사는 조금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키가 큰 그가 손을 위로 뻗고 있 으니, 내 손이 닿을 리 없었다.

진짜, 황당해서. 어린애도 아니고, 부르크 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이런 장난을 칠 줄은 몰랐다. 난 기가 막

혀서 그를 쏘아보았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한테도 제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고요. 제대 로 인수인계하기 전엔 못 그만둬요. 갑자기 반과의 관계가 좀 진전되었 기로서니, 하던 일을 내팽개치라 됴?”

“글쎄. 비서 일보다는 황비로서의 일이 좀 더 결정권이 많고 재밌으리 란 생각은 안 하나?”

황비라는 단어를 듣자 숨이 턱 막혔다.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꺼 낸담, 부담스럽게.

의견을 웬만해선 굽히지 않는 그 였다. 정말 안 줄 생각이라면 어르 고 달래도 안 줄 거다. 난 그깟 내 용 거의 다 외우고 있는 종이를 들 어 올리고 있는 그에게 코웃음을 쳤 다.

“어린애처럼 이러지 마세요. 반이 준 이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싶어 서 그래요. 오늘 안에 인수인계 다 한다니까요?”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곤 순순히 내게 종 이를 내밀었다.

“애정으로 하는 약혼도 그 나름의

문제가 있군.”

“뭐가요?”

“네가 하는 말은 다 들어줄 것 같 아서. 내 판단의 객관성 담보를 위 해 의회를 좀 키워야겠어.”

난 혀를 쏙 내밀어 보이곤 그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웃긴다. 뭐 얼마나 대단한 부탁을 들어줬다고 저렇게 의회까지 들먹이면서 유세인 지. 누가 황제인 줄 모를까 봐.

그가 다시 뺏어 가지 못하게 화 장대 구석에 잘 올려 두려다가 신경 쓰이는 단어가 떠올랐다. 냉큼 몸을 돌리고 다시 그를 바라봤다.

약혼이 요?”

황제의 고개는 참으로 당연한 질 문을 받은 사람처럼 위아래로 쉽게 도 움직였다.

“그러니까 그 약혼의 주인공 이…… 그러니까 연회의 주인공이란 소리가 그냥 파트너로 참석하란 게 아니라, 지금 연회를 틈타서 약혼식 이라도 올리자는 건 아니죠?”

황당함 반, 그가 부정해 주길 바 라는 심경 반으로 한 질문에 황제는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사람처럼 입술 을 조금 비틀어 웃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언제 물어봐 주나 기다렸다.”

“……폐하?”

“이런 건 정식으로 해야 한다고 하더군. 참관인이 없긴 하지만……, 사적인 허락을 먼저 구하는 게 그대 의 취향일 것 같아서.”

“대체 뭘요?”

말릴 새도 없었다. 그의 붉은 눈 이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셀레스티아, 나와 약혼해 주겠 나?”

황송하게도 고귀한 몸의 한쪽 무 릎이 땅에 닿아 있는 것과, 활짝 열

린 반지 상자가 내 쪽으로 내밀어져 있는 광경이 눈앞에 있었다. 마음이 너무 심란해서 오색 찬란하게 반짝 이는 반지의 큼지막한 보석조차 제 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어 찌할 바를 몰라서 치맛자락을 쥐었 다가 놓았다가, 다시 쥐었다가 놓았 다.

“반, 저기……,”

내가 망설이자, 황제는 부연 설명 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뻔 뻔스럽게도, 그 잘생긴 얼굴을 쳐들 고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고백을 받아 준 지 일주일 만에 결혼하는 건 조금

준비와 통보에 시간이 모자라다. 결 코 나와 그대에게 확신이 없어서 약 혼을 먼저 계획한 것은 아니야.”

안타깝게도 그는 내가 망설이는 이유가 곧장 결혼이 아니라 약혼을 하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이었다.

하지만 아니다.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좋았다. 그러나 역시 겁 이 났다.

“이번 연회를 빌려 약혼식 정도만 해치워 둘 생각이다. 또 도망가기 전에, 공표해 버리는 게 제일 속 편 하지 않겠나?”

나는 젖은 내 머리카락과, 그의 손에 들린 반지를 바라보곤 황제의 손목을 잡았다.

“거절하는 게 아닌데…… 정말 아 닌데요, 반. 일어나요. 동생에게 이 야기할 시간만 줘요. 그다음에 대답 할게요.”

“동생이 뭐가 중요하지? 동생이 반대하면 안 할 건가?”

“제겐 유일한 가족인걸요. 미리 말해 두고 싶다고요.”

황제는 더 조르지 않고 몸을 일

으켰다. 반지 상자도 다시 닫아 갈 무리했다.

그의 얼굴이 태연해 더 미안했다. 확신이 없는 게 아닌데. 이미 그러 자고 했는데. 그런데 한 단계 더 나 아가는 걸음마다 왜 이렇게 어려운 지 모르겠다.

미안한 마음에 그의 볼에 가볍게 키스해 주었다.

“사과치곤 짧은데.”

내가 미안해할까 봐 일부러 농을 치는 거다. 투덜거려 보려고 했지만 황제가 고개를 돌려 내 입술을 달게 삼키는 것이 먼저였다.

그와 키스할 때마다 온 세상이 적막해지고, 그와 나의 고동 소리만

남아 두근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잘 생긴 반의 눈꺼풀이 닫힌 모양을 볼 수 있는 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 다. 짙어지는 키스에 입 안에 설탕 과자 같은 달콤함이 번져, 나도 모 르게 눈을 감았다.

오늘은 황제의 곁을 따라다니지 않아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아 낸 나 는, 우선 비서 후보를 셋 호출했다.

어제의 아카데미 방문 건이 흐지 부지되긴 했지만, 모처럼 방문한 틈 에 꽤 괜찮은 인재를 여럿 봐 두긴

했다. 당장은 졸업하지 않았기에 써 먹을 수 없는 인재들까지도.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진 얼마간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난 루아나를 잠깐 방으로 불렀다.

어제 외출하는 길에 사 둔 머리 핀 같은 것들을 잔뜩 챙겨 놓고, 차 도 직접 우리고 테이블보를 깔아 쿠 키도 종류별로 담아 놓았다. 루아나 는 내 방으로 와서 내가 해 놓은 모양을 보고 놀라 눈이 화등잔만 해 졌다.

“셀레스티아 님, 누구 귀한 손님 이라도 오시나요?”

이제 루아나까지 툭하면 경어다. 난 오히려 웃으며 되받아쳤다.

“루아나 님이 오셨잖아요?”

루아나는 웃음이 터져 깔깔거리면 서 내 옆의 의자에 앉았다.

“뭐야, 요즘 줄곧 얼굴이 어둡더 니 오늘은 비 갠 날 해처럼 구네.”

“아…… 내가 걱정시켰지?”

“그렇다니까. 요즘 죽상을 하곤 마치 곧 떠날 사람처럼.”

루아나는 내가 따라 주는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곤 행복한 얼굴로 향 을 음미했다.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루아나도 내게 정말 소중하지만, 그 래도 이 자리를 떠나야만 한다고 생 각했었으니까.

차가 식기를 기다리는 루아나를 보며 난 후다닥 말을 꺼냈다.

“어제 일인데…… 황제 폐하께서 반려로 청해 주셔서…… 그러기로 했어.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하는 거 야.”

루아나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더 니, 양손으로 뺨을 감싸고 나를 바 라보았다. 놀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대하던 것을 들었다는 얼굴이었 다. 당황스러운 건 이제 나였다.

“……안 놀라?”

루아나가 픽 웃었다.

“놀라긴 왜 놀라? 오늘 아침에만 해도 빨래터에서 얘기했다니까.”

“뭘

“황제 폐하와 셀레스티아 님께서 얼마 만에 식을 올리실까, 이런 얘 기지 뭐. 새침데기 같으니.”

빨래터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생 각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기 도 했지만, 아무래도 황당하다, 진 짜. 처음부터 그 빨래터에선 나와 황제 폐하를 엮지 못해 난리였는데, 아직까지도 꾸준히 그런 분위기일

줄은 몰랐다. 정말 그 사람들도 망 상하길 퍽 좋아한다.

당황해할 루아나를 달랠 말들만 잔뜩 준비했다가 손해 본 기분이다.

멍하니 차를 홀짝거리는데, 쿠키 를 한입 야무지게 베어 먹은 루아나 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래서?”

“……뭐가?”

“결혼은? 약혼은 언젠데?”

어제라니까……? 아니, 이 사람들 은 하나같이 기다릴 줄을 모른다.

뭐가 언제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좀만 시간을 달 라고 말씀드렸어.”

루아나가 한입 베어 먹은 쿠키를 내려놓고 탁자를 손으로 두드렸다.

“아니, 설마…… 너, 아니지? 황 제 폐하께서 약혼하자고 청하셨는데 거절한 건 아니지?”

맞는데.

입으로 굳이 답하지 않아도 멀뚱 한 내 시선에서 알아서 답을 유추했 는지, 루아나는 의자를 밀고 벌떡 일어났다.

“아니, 너는 생각이 없어?”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해.

나는 그냥

“지금 덜컥 임신이라도 해 봐. 그 럼 혼외자가 태어나는 거잖아? 황제 폐하께서는 다 그런 네 불안함을 걱 정해서 빨리…… 읍읍.”

으악,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 야?

난 깜짝 놀라 루아나에게 달려들 어 입을 틀어막았다. 루아나가 좀 치워 보라는 듯 내 팔을 쥐고 흔들 어 댔다. 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오르는 걸 느끼며 하는 수 없이 그 녀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왜 사람 말을 막고 그래? 내 말

이 어디가 틀려? 아주 얼굴 터지겠 네/

“너무 극단적이니까 그러지.”

“극단적이긴 뭐가 극단적이야? 황 제 폐하랑 결혼하면 황위 후계자를 생산할 의무도 있는 거지, 뭐.”

맞는 말이긴 하다.

황제 폐하에 대한 마음 하나만으 로 결정하기에 진짜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자리라는 것이 다시 한번 실 감됐다. 내가 그 자리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압력이 어 깨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뭘 또, 그런 얼굴을 하고 그래.

황제 폐하께서는 지극 정성으로 너 만 바라보시던데, 그거면 됐지. 넌 사서 고민하는 타입이라니까.”

“으 ” 흐.

“또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냉큼 가서 약혼하겠다고 말씀드려.”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11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