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이 고기에서 향신료 냄새가 안 나는데?”
“하하, 형씨. 재밌는 말을 하는 군.”
반말을 듣는다고 해서 화내지 않 을 정도의 침착함은 있는 듯했지만, 여전히 호기심을 거두지 못한 황제 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반. 후추나 육두구, 카르다몸 같 은 향신료를 기대하셨다면, 그런 건 없어요. 값비싸니까.”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먹을 만 한데.”
“잡내를 잡기 위해서 소스를 잘
만드니까요. 어때요, 괜찮죠?”
황제는 그 호화로운 아카데미 만 찬을 뒤로하고 나온 것임에도,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날 붙잡고 싶어서 그러는 건지, 아 니면 비위가 좋은 건지.
난 각종 치즈와 다진 아몬드가 들어간 과자류, 콩 요리와 오트밀 수프, 그리고 야시장에선 가장 비싼 디저트인 시럽에 절인 배와 설탕 과 자까지 섭렵했다.
그러곤 더 이상 못 먹겠다고 손 을 젓는 그를 끌고 펍으로 들어갔 다. 물론 호위에 용이해 보이는 넓 은 공간이었다.
귀족 문화에선 보기 힘든 서민 펍 특유의 꿉꿉한 보리 냄새가 진동 했다.
황제는 아무도 우리를 반기지도,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에 놀라지 않는 눈치였고, 우리는 바 근처의 테이블에 앉았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사내가 주문을 받으러 다가오 더니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크, 죽여주는 아가씨가 한 명 왔 군. 주문은?”
칼, 차고 있었지? 이 황제. 난 즉 시 허리로 가져가는 황제의 큼직한 손에 냉큼 깍지를 끼며 만면에 미소
를 지어 보였다.
“여기 밀맥주 두 잔 주세요.”
“네네, 금방 대령해 드리지. 방금 막 딴 밀맥주가 한 통 있는데, 둘이 마시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고.”
여기서 누군가 죽는다면, 신나게 주문을 받고 바 뒤로 사라진 남자일 거다.
나는 어떻게든 작은 소리로 달래 보려고 반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 어서 방긋 웃었다.
“반, 화난 거 아니죠?”
“화난 건 아니지만, 여기서 화내 지 않으면 언제 화를 내지?”
검은 머리칼 아래의 붉은 눈동자 는 익숙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 이 황제 또 이상한 데서 결단 력을 발휘하신다. 이럴 때의 황제는 뜻을 굽히는 법이 없다. 내게 제 이 름을 반이라고 부르라고 하자마자 제 의견을 관철하셨던 분이 아닌 가?
난 어떻게든 그를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와락 황제의 목을 끌어안았다. 대체 뭘 할 셈이냐는 듯 눈살을 팍 찌푸린 황제는 순순히 몸을 굽혀 주었고, 난 그의 입에 키스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정도의 가벼운 것이었지만, 입술이 천천히 떨어질 즈음에는 이제 이 상황이 재 밌는지, 어이가 없는지 그의 눈이 가늘게 웃고 있었다.
“경고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아무 리 나라도 이런 곳에서 피를 보려고 들진 않아.”
“……하지만, 아까 칼에 손을
“말했다시피 경고하려고 했던 것 뿐이니까.”
괜히 입술만 낭비했다.
기가 막혀서 볼을 부풀리자, 황제
가 내 볼을 쥐고 당겨 다시 키스했 다. 입술만 부딪친 내 버드 키스와 는 달리 공공장소에서 해도 좋을지 모를 짙은 것이었다. 금방 입술이 떨어졌기에 망정이지.
나는 비서의 버릇이 남아 황제의 입가에 묻은 내 립스틱을 슬쩍 닦아 주었다.
맥주가 두 잔 나왔고, 그는 태연 하게 꿀꺽꿀꺽 그것들을 목으로 넘 겼다.
“……맥주 잘 마시네요?”
“못 마실 건 또 뭐지?”
“질 좋은 브랜디나 진이 아니면
안 마실 줄 알았어요.”
“내가 말 안 했나? 떠돌이 생활 을 한 적이 있다고.”
떠돌이 생활이라. 말한 적이야 있 지만 황태자의 떠돌이 생활이라고 해 봤자 한없이 호화로울 거라 여겼 지.
한결같이 서민 문화를 의연히 받 아들이는 그를 보자 재미가 없었다. 내가 그의 반려가 된다느니 하는 상 황도 조금도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 고, 그는 사람이 체할 것같이 계속 빤히 바라보기만 해 댔다.
어쩐지 자꾸 술이 빨리 넘어가는
바람에 나는 밀맥주 세 잔을 연거푸 비워 버리고서야 좀 취기가 오르는 걸 느꼈다.
“히— 히— 호!”
그때, 다른 테이블의 아저씨들이 노래를 시작하는 게 들려왔다. 골디 나나 부르크 제국이나 노동자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라는 건 으레 거기 서 거기이게 마련이다.
나는 냉큼 그들의 노랫가락에 참 여했다.
“나무껍질, 나뭇잎, 나무뿌리, 콩 깍지로 만든 빵은 이제 질렸네. 내 게도 흰 빵을 주오, 히- 히— 호!”
황제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쓰게 웃으며 날 바라봤다. 하지만 오랜만 에 듣는 노래에 흥이 오른 나는 신 이 나서 테이블을 두드려 댔다.
“내 동생은 말라 죽었고, 우리 염 소는 굶어 죽었고, 내 어미는 헤매 다 죽었고, 우리 개는 병들어 죽었 네. 옥수수 한 입만 주오, 히— 히 — 호!”
부르크 제국은 비교적 먹고살 만 한데도, 이 노래가 그대로 전해 온 것을 보면 나라마다 농민이 겪는 기 근이란 똑같이 흉흉한 법인 모양이 다.
반은 그 뒤로도 한참 노래하고 춤추는 셀레스티아를 지켜보았다. 솔기가 올올이 살아 있는 짧은 원피 스를 입고 펍 안을 맨발로 돌아다니 는 그녀는 볼만한 꼴이었다.
팔뚝만 한 맥주잔에 술을 부어 마시는 무식한 이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과 함께 춤추며 활짝 웃는 모습 은 보기에 기묘하고 이상했다.
그렇지 않아도 인상적인 붉은 머 리칼에 붉은 드레스, 램프 등에 비 친 그녀는 마치 불의 정령 같았다. 잘 꾸며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생기 가득한 그런 아름다움이 흘러 넘쳤다.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법
을 잘 알았다.
마음껏 웃고 뛰노는 그녀는 황궁 에서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 졌다.
그도 그렇겠지. 그가 그녀를 주웠 을 때, 그녀는 노예상이 모는 마차 에 타고 있던, 별 볼 일 없는 골디 나 출신 노예에 불과했으니까. 셀레 스티아의 일생은 오히려 이런 사람 들과 함께 자유롭게 일상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에 더 익숙하고 가까웠 을 것이다.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거리의 악 단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는지 아코 디언 소리가 반주를 넣었다.
머리끝까지 만취한 게 틀림없어 보이는데도 점점 더 생기 있게 움직 이는 셀레스티아가 테이블로 뛰어들 듯 다가와 반의 손을 쥐었다.
“이리 와요.”
“……진심인가?”
“왜요, 모처럼 왔는데 춤을 안 추 면 아깝다면서?”
처음, 그녀에게 춤을 청했을 때 제가 했던 말이다.
이 머리 좋은 아가씨를 당해 낼 수가 없다.
리온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평생의 놀림거리가 되겠다고 생각하 면서도 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의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 정중한 춤이 아니라니까? 자자, 여기서는 영 초짜죠? 거봐, 내가 춤을 못 추는 게 아니라 사람 이 자라 오면서 배우는 게 있다니 까.”
셀레스티아가 하는 말은 점점 발 음이 뭉개졌지만, 즐겁게 웃는 모습 을 본 반은 그냥 들어 주자고 생각 했다.
몇 번 어울려 춤을 추어 주고, 지 친 듯 무너지는 그녀를 안아 들었을 땐 완전한 밤이 되어 있었다. 반은
펍에서 나오자마자 디펜더들에게 신 호하여 즉시 황궁까지 이동할 것을 명했다.
일행은 황궁 바로 앞까지 순간 이동했고, 황제는 제 방의 창문까지 훌쩍 날아올라 뛰어들었다.
책상 위에는 셀레스티아가 오늘을 위해 짜 둔 완벽한 스케줄 표가 있 었다. 아쉽게도 오늘만은 제대로 지 키지 못했지만.
그는 그녀를 안아 제 옆방의 침 대에 눕히고, 구두를 벗겨 주고, 이 마에 키스했다.
셀레스티아가 없어도 이제 부효과
의 문제는 없지만, 어쩐지 그녀에게 닿을 때마다 차가운 느낌이 드는 것 이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게 느껴 졌다.
반은 그대로 돌아 나오려다가 탁 자 위에 올려져 있는 사진 앞에서 멈춰 섰다.
셀레스티아의 어린 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 만났던 적이 있 다는 것은, 어쩐지 입에서 잘 나오 지 않았다. 지금은 마법을 모두 잃 어버린 그녀였으니까. 그녀도 마법 을 배우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을 테다.
골디나와 부르크의 정규 교육 과 정에서 중시하는 마법이란, 대체로 공격 마법과 원소 마법에 국한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셀레스티아는 자신의 재능 인 마법진에 대한 부분을 어릴 때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들은 다 실패하는 마법 무효화의 진은 성공 했으면서도.
하지만 이제 마법을 배울 수 없 는 몸이 되었으니까, 상심하게 될 거다.
언젠가, 말하게 되는 날이 오겠 지. 네가 나를 구원한 것은 지금뿐
만이 아니라고. 아주 옛날의 내게도 용기를 주었노라고.
하지만 지금의 고백만으로도 부담 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이 말을 하는 날은 아주 먼 훗날이 될 것이다.
반은 지금 당장 그녀가 제 손을 잡아 준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하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눈을 떴을 땐, 여느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각이었다. 해가 아직 뜨지 않았다. 어두운 방 안을 더듬더듬 걸어 창문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정신이 들었 다. 어제 있었던 일들이 차례대로 뇌리를 스쳤다. 비서를 구하겠다고 나갔다가 술주정을 하며 들어오게 된 경위들이.
황제 폐하의 제안을 수락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너무 무 겁다. 그리고 너무 실감 나지 않는 다. 신경 쓰지 말라고는 하셨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일인지 잘 모르겠 다.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한참을 멍 하니 내다보는 사이에 아주 멀리에 서, 낮은 건물들 사이를 기어오르는 여명이 보였다.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이 안 나고 감정만 소모하는 생각에 계속해서 골몰해 있는 건 소용 없다. 오늘은 오늘 해야 할 일을 하자.
후다닥 씻고 나와서 한 손으론 머리를 말리고 한 손으론 오늘 반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보름 뒤에는 모처럼 황제 주최의 큰 연회가 있다. 그것을 위한 준비 로 오늘은 정신이 없을 예정이었 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로 온 거리가
축제 분위기인데 반해 막상 궁내는 죽은 이들과 반역자들의 수습으로 아직 분위기가 밝지만은 못했다. 그 런 탓으로 조금쯤 연회가 지양되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슬슬 본격적인 준비 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 거대한 규모 의 황제 탄생일에 맞춘 일주일 간의 긴 행사에 맞출 수가 없다. 정말이 지 그렇게 긴 연회라니. 생각만 해 도 벌써 어깨가 축 늘어진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지. 황제 는 내 사정은 신경도 안 쓰고 제국 의 어디 사는 누구 씨가 인사해 올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나만 빤히 보
며 정보를 요구할 테니, 지금부터 외워야 하는 명단도 많고……,
“그렇게 말리다간 평생 걸리겠 군.”
“꺅!”
깜짝 놀라 뒤를 돌자 익숙한 얼 굴이 바로 뒤에 기다리고 있었다. 하마터면 입술을 부딪힐 뻔했다는 것에 두 번째로 놀라 물러나려는데, 반이 웃으며 내 허리를 당겼다. 입 술과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가 떨어졌고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는 듯 굽혔던 허리를 폈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무슨 생각에 그렇게 골몰해 있는 지 모르겠군. 이제 나태해진 건가? 노크 소리도 못 듣고.”
“……제가 못 들었나요? 죄송합니 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느라……, 무슨 볼일로 찾으셨어요?”
그가 붉은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픽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서.”
……네?
“보고 싶어서 찾았다고 말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