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대로 두었다가는 계속해서 입술 을 탐할 듯한 황제를 간신히 밀어냈 다. 상기되었을 볼을 손등으로 누르 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보랏빛 옷을 입은 흑발의 남자가 내 볼에 키스하는 것을 보며 천천히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어쩌다 이렇 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
멀어졌던 연회 음악 소리가 뒤늦 게 귀를 파고들었다. 하프까지 가세 한 연주를 들으며 새삼 깨달았다.
그래, 여긴 연회장의 2층이다.
“ 폐하.”
“반이라고 부르지.”
“……어떻게 갑자기 그래요.”
“반이라고 부르지.”
“폐하, 그게 아니라……,”
“반이라고 부르지.”
도대체 어느 누가 황제보고 반이 라고 부른단 말인가? 내가? 내가 어떻게?
기가 막힌다는 듯 황제를 쳐다봤 지만, 그는 아직도 저를 반이라고 안 부르냐는 얼굴로 날 태연하게 보
고 있었다.
“차차 천천히 하나씩 바꿔 나 가면 되잖아요.”
“ 반.”
와, 진짜 내가 이 남자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무 리였다. 제국의 황제가 왜 황제인지 는 모르겠지만, 고집 하나는 정말이 지 부르크 제국에서 제일가는 사람 이다.
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반. 됐어 요?”
푸스스, 그의 입가에서 부드러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달콤하 고 천진한 얼굴을 지을 거라고는 생 각지도 못했다. 이미 쥐어짜듯 아프 던 심장에 무리가 온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웃는데 다시 황제니 폐하니 하고 부를 수도 없었다.
“반, 여기에 더 있을 거예요?”
“왜 그러지? 어차피 오늘 일정은 비웠다.” 느
별건 아니다.
그저 황제다운 규모의, 의회를 활 용한 프러포즈 이후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카데미 사람들의 반응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
하게 괴로웠다. 그들이 날 얼마나 뚫어져라 바라볼 것인가. 축하하느 냐 그러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죽도록 창피했다.
게다가 저기 저렇게 버젓이 연세 가 많으신 의원님들께서 잔뜩 모여 서는 황제 폐하의 반응만 기다리며 뷔페를 즐기고 계신다. 그들의 목적 이 애초에 나를 설득하는 것이라는 걸 상기해 볼 때, 난 다시 그들을 볼 낯이 없었다. 나 하나 때문에 이 렇게 되었다니.
난 가만히 그의 손을 흔들었다.
“곧장 황실에 복귀할 생각이 없으 시다면 잠깐 밖에 나가요.”
“밖이라니, 여기가 밖이다.”
“황궁만 나오면 밖이 아니에요. 여기 말고, 야외에 가서 바람도 쐬 고…… 좀 걷고 싶어서요.”
황제는 별로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창문을 가리켰다. 남들이 다 가는 문으로 다니는 법이 없는 이 황제는 아카데 미 안이고 어디고 간에 마법을 함부 로 쓰는 경향이 있으시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따끔하게 잔 소리를 늘어놓았을 나도, 다른 이들 의 눈에 띄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만 있다면 이번만은 찬성이었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황제의 팔을 가만히 쥐었다.
반의 품에 안긴 채로 날아가며 본 야경은 아름다웠다. 하늘에는 촘 촘한 별들이, 지상에는 촘촘한 조명 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디로 가지?”
난 순간 그를 조금 골려 주고 싶 은 마음이 앞섰다. 나를 사귀겠다는 그의 결심은 가상한 것이었으나, 정 말 그가 천민이나 평민의 삶에 대해 서 뭘 알까 싶어서.
정말 내가 살아온 모습을 보여 주면 그도 한 걸음 물러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미 반의 손을 쥔 것은 맞았지 만, 무른다면 지금밖에 없었으니까.
아무리 번성한 부르크 제국이라고 는 해도 도심 외곽에는 슬럼 지대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쪽을 가리켰다. 반은 거절하 지 않았다. 순순히 내가 손짓한 야 시장 방향 쪽으로 비행하여 사람들 의 시선이 없는 뒷골목에서 안전하 게 내려섰다.
그가 땅을 밟는 것과 동시에 한
열 명이 땅을 딛는 듯한 소리가 들 려오긴 했지만, 난 경호들이 옆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단 생각하 지 않기로 했다.
수도 중심가의 말끔한 조명에 대 비되는, 그을음이 가득한 침침한 조 명들과 꿉꿉한 냄새. 어쩐지 습한 공기로 가득한 데다 쓰레기도 여기 저기 나뒹구는 모습이었다. 반은 빛 이 잘 들지 않는 골목을 쓱 바라보 곤 내게 물었다.
“이런 곳엔 왜 왔지?”
“바람 쐬고 싶다고 말씀드렸잖아 요‘?”
그는 어딘가 불만이라는 듯 눈살 을 찌푸렸다.
“비서로 고용했을 땐 머리가 좋은 게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반려로 들일 생각을 하고 보니 그 똑똑한 작은 머리통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 는지 알 수가 없는 게 좀 불편하 군.”
황제는 구운 벽돌로 지어진 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듯했다. 하 지만 짐승이나 사람의 가래, 침, 배 설물 같은 것들이 어디에나 널브러 져 있는 골디나 천민 골목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었다.
난 아까 공중에서 이미 봐 두었 던 야시장 쪽으로 황제를 이끌었다. 반은 내가 그 짧은 사이에 지리를 외운 것에 대해 감탄하는 눈치였지 만 굳이 입으로 옮기지 않았다. 항 상 길잡이와 시종, 디펜더들을 끌고 다니는 자신과 내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겠지.
야시장의 불빛이 가까워져 오는 것을 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다 가, 나는 문득 우리가 이 야시장의 엄청난 불청객이라는 것을 깨달았 다. 일단, 황제 폐하의 보라색 옷감 자체가 범부01호)가 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족의 전유물인 보
랏빛 옷감을 걸치고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 폐하.”
그게 도대체 누구냐는 듯 못 들 은 척 걸음을 옮기는 그가 보였다. 하여튼 못 말린다.
“반.”
고쳐 부르자 단숨에 그가 날 돌 아봤다. 의원들은 물론 오늘 일과까 지 팽개치고 밖에 나온 이 상황 자 체가 재밌다는 듯 평소에 보기 힘든 미소를 입가에 마음껏 매달고 계셨 다.
“저기, 그
“왜 부르지?”
“이렇게 입고 어딜 갈 순 없으니 까요.”
“그래서?”
“반은 너무 고귀한 차림을 하고 있으니까, 좀 단추 개수도 적고 옷 감도 후줄근한 것을 좀 구해 입어 볼까요?”
이러저러한 반박을 예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정말 이지 뜻밖에도 그는 기분 좋게 웃으 며 고개를 끄덕이곤 내 이마에 키스 했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밤이지만, 얼굴이 이렇게까지 화 끈거리는 건 누구에게든 보일 거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똑바로 들은 것 맞아요? 평민 옷을 입자고 말씀드린 건데……;
“그러자고 했다. 어차피 짐꾼도 있고, 어려울 건 없지.”
그 짐꾼이라는 게 설마, 황제의 경호 기사가 되기 위하여 평생을 수 련해 온 디펜더들을 일컫는 것은 아 니겠지? 내가 만약 그런 소리를 들 었다면 직업 만족도가 한없이 수직 하락했을 테다.
난 반의 말을 반쯤 못 들은 체하
곤 시장의 입구에 있는 작은 가게에 들렀다. 반은 꽤 체구가 큰 편이어 서 헐값인 낡아 빠진 옷들 중에서 신중하게 골라내야 했는데,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 가판대를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 달려 나온 사내가 그대 로 굳어서는 머리를 땅에 박을 듯 인사했다.
“어이쿠, 이렇게 귀하신 분께서 저희 가게까지 다 들러 주시다니 요.”
“네? 아니에요, 전……/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요. 저잣거 리에 얼굴이 다 나붙은걸요. 황제 폐하의 반려님이 아니십니까?”
아이고, 나는 또 내가 입은 옷이 화려해서 귀족으로 오해를 샀나 했 는데, 이건 더한 오해다. 아니, 이제 오해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도 곤 란하다.
“이것만 살게요.”
“아닙니다요, 이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목숨 바쳐 고생하신 반려님 께 제가 어떻게 돈을 받습니까. 그 냥 드리겠습니다요. 이런 것이 어디 쓸데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더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가지십쇼.”
“……아니에요.”
지불하겠다는 돈을 한사코 거절하
는 노점 상인에게 억지로 돈을 쥐여 주고 도망치듯 돌아 나오는데 문득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오늘 아침의 일이 머릿속으로 지 나갔다. 황궁에서 오랜만에 마차를 타고 외출하는데도, 분명 지나가는 이들이 모두 날 보고 수군댔었지. 내 얼굴이 뭐 얼마나 잘 알려져 있 다고. 다들 날 알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황제의 반려니 뭐니 하는 이야기 는 테포다 제국 원정 사건 이후 가 라앉아 있어야 정상일 텐데.
하지만 방금 들은 ‘얼굴이 다 나 붙었다’는 이야기를 조합해 보면 하
나의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사미 디온이 들었다고 하는 그 여론이니 뭐니, 희대의 로맨스니 소문을 들은 황제가, 냉큼 초상화를 여기저기 걸 어서 소문에 장작을 넣어준 게 아닐 까?
골목 그늘에 서 있는 것뿐인데도, 당당한 기개가 뿜어져 나오는 황제 폐하의 얼굴이 보이는 곳에서 나는 발을 멈췄다. 조각처럼 잘생겼지만 차가워 보이던 얼굴이, 날 발견하곤 사르르 풀어지는 게 보였다. 물론 남이 보면 여전히 날카로워 보일 테 지만
이 황제 폐하, 정말로 날 놔줄 생
각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던 걸까?
“오래 걸리는군.”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거적에 가까운 옷을 그에게 어떻 게 입힐지 옆의 건물을 슬쩍 쳐다보 는데, 바로 옆으로 온 황제가 바로 앞에 보이는 수도 경비대 초소로 쓱 발을 들였다. 아니, 그렇게 아무 데 나 막 들어가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놀라서 쫓아가는데, 나보다 더 놀란 건 가엾은 수도 경비원들이었다.
저녁 근무 중에 갑작스레 상관 중의 상관인 황제가 등장한 셈이 되 어 버린 수도 경비원들은 앉아서 무
기를 닦거나 카드를 하고 있다가 깜 짝 놀라 다 집어 던지고 벽에 나란 히 붙어 섰다.
“장소 좀 빌리지.”
“네…… 네네, 넵! 폐, 폐하!”
“쉬어도 좋다.”
“여, 영광입니다!”
저렇게 말을 더듬다간 혀를 씹겠 는데.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들의 도움 을 받아 무사히 공간을 제공받은 우 리는 평범한 촌민으로 변장할 수 있 었다. 뭐,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귀티까지 숨기는 것은 무리라서 어
떻게 봐도 평범해 보이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어떻게든 녹아들 수는 있 을 것이다.
황제의 안위가 가장 우선이다. 아 무리 갑자기 그를 이끌고 아카데미 를 뛰쳐나온 몸이라 한들, 나는 그 정도는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호 위가 어려운 좁은 장소나 막다른 골 목엔 가지 않는다. 지나치게 인파가 많이 몰린 곳도 경계한다. 그 정도 는 숙지한 상태에서 야시장을 쏘다 녔다.
양고기 꼬치를 파는 상인 앞에 선 황제가 그것을 기묘하다는 듯 쳐 다보았다. 불에 바로 구워서 내놓는
꼬치구이 같은 걸 본 건 그도 처음 이겠지. 나는 얼른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황제의 입에 한입 물려 주었 다. 거북해할 줄 알았는데 잘도 받 아먹는 황제는 묘한 얼굴을 했다.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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