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난 짜증스레 그의 가슴팍을 주먹 으로 두드렸다. 황제가 눈을 접고 길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네?”
“그래서 네가 포기했나? 아니잖 아? 넌 그때 이 제국에서 태어난 사람도 읽어 본 적 없을 고대서까지 모두 섭렵하고 조기 졸업장을 따내 질 않았나? 보기 좋게 네가 그럴 만한 요건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뭐가 무섭 지?”
대답할 말이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질 않 나. 어떻게 다르냐면…… 이건 그의 위신에 영향을 미치니까.
난 고작 노예 출신이다.
게다가 그때는 그의 몸을 낫게 해 준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 지금 은 더 출중한 비 후보가 두 손으로 도 못 꼽을 만큼 즐비하다. 화첩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던지.
“폐하, 저는……/’
내가 뒷말을 뱉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셀레스티아, 내가 황제가 될 때 는 찬성 여론이 많았을 것 같나?”
“……네?”
상상도 못 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아카데미에서 부르크 제 국의 역사를 다룬다고는 해도 아주 최근의 현 황제의 근현대사까지 다 루는 것은 아무래도 객관적 조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잘 하지 않는 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반 황제 폐 하의 삶에 대해서, 그 어떤 황제의 삶에 비해서 잘 모르는 셈이다.
하지만 적장자였고, 본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반대 여론이 라고 할 만한 게 있었을까?
내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 자, 황제가 호전적으로 웃었다.
“황위를 승계할 때, 나는 어렸다. 아바마마를 모신 신하를 제대로 보 호해 줄 힘도 없었고, 나를 보호할 힘도 적었다. 그저 아무 약점도 없 는 것처럼 가장하며 하루하루를 견 뎌내는 게 최선이었다. 의회에서도 휘둘리기 십상이었지. 황태후 파가 지금까지도 그리 득세했는데, 당시 에는 나를 인정했을 것 같나?”
“그것이……/
“황위에 오르기 전엔 당연히 더 했지. 아바마마가 살아 계실 때도
황태후가 아바마마의 곁에서 매일 달콤한 말을 속삭여 대는 통에, 내 병까지 들키면 황태자 자리에서 끌 어내려지는 것은 물론, 위협이 된다 는 이유로 목이라도 달아날 판이었 다.”
“그런 일이……;
“그때 내가 그냥 포기했어야 했 나? 나에게 반대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았으니 말이다.”
막시가 황제가 되었더라도 어울렸 을지도 모른다. 물론 황태후 파의 득세가 내 입장에선 정말이지 달갑 지 않았지만, 막시의 품성과 능력에 대해서는 그리 잘 모르니까.
하지만 권력을 탐하는 아귀 같은 외척 무리들을 생각하면, 막시가 황제가 되었더라면 제 의사를 한 마디 제대로 펼쳐볼 수도 없었으리 라.
게다가 생존을 위하여 투쟁했던 반 황제의 어린 시절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그렇다면 너는?”
“네?”
“여론에 따르는 것은 황제에게는
정말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건 맞 다. 만약 여론이 모두 일어나서 네 가 내 옆에 선 것이 큰 문제라고 시위라도 한다면 나도 재고해야 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런 것도 아니다. 조금 전 봤다시피 의회 의원들도 전혀 반대하지 않고 말이다.”
난 그만 픽 웃었다.
그들이 어디 내가 마음에 들어서 저런 쇼에 동참했겠는가? 속으론 울 며 겨자 먹고 있겠지.
의회 회장에 들어왔다가, 오늘은 밖에서 회의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 는 황제에게 반대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나왔을 노인네들과 각 가문의 장손들이 어찌나 가엽던지. 황태후 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급히 황제 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 된 이 들이 태반인 의회다.
“의원들을 그만 좀 괴롭히세요, 폐하.”
“내가 괴롭히다니, 정말 어이가 없군.”
그가 내 손을 쥐어 손등에 키스 했다.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을 간신 히 참아 보려고 했지만 잘되었는지 는 모르겠다.
“알아서 기는 건 저들이다. 그리
고 저들은 제 말과 의견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일이야. 손바닥 뒤집 듯 번복할 순 없을 거다.”
“저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말해 봐.”
황제 폐하의 곁에 있을, 그러니까 황비가 되지 않기 위해 이유를 설명 해야 하다니. 그 뒷골목 출신의 내 가.
조기 졸업 시험보다도 이 상황이 어렵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가, 그가……오
“내가 싫나?”
“폐하, 제가 어찌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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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로 내 눈을 보고 말해. 그러 면 놓아주지.”
“……폐하.”
저렇게까지 자신감 있는 말투가 짜증 난다. 못 할 줄 알고?
황비라는 자리가 얼마나 거대한 자리인지 알고 권하는 걸까? 그걸 이렇게 밀어붙이듯 말해도 되는 걸 까?
‘버틸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는 말이 자꾸만 귀에서 맴 돌아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 었지만,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
다.
원하는 대로 말해 주자.
그러면 놓아준다고 하질 않는가?
심호흡을 하고 숨을 들이켜고 시 선을 돌렸다. 차분한 황제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볕 아래에서 검을 휘두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가볍게 그을린 얼굴.
고뇌의 깊이를 보여 주는 미간에 남은 작은 주름과 늠름한 얼굴의 생 김생김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제 왕의 그것이었다. 붉은 눈과 시선을 맞닥뜨리고 나는 준비한 말을 꺼내 려 했다.
‘황제 폐하가 싫습니다.’
입은 아교로 달라붙은 듯 떨어지 지 않았다.
“폐하, 저는……/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근거림은 점점 심해져서, 나는 말을 하는 법도 잊은 사람처럼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뒷말을 어떻게 든 혀에 올려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돌처럼 굳은 혀는 내 마음 대로 되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나를 사랑 한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사람으로 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 날 원한다고 말할 줄은 몰랐 다.
나는 황제 폐하를……오 이름 붙이 기조차 두려운 그 감정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오
얼마의 침묵이 지났을까?
황제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 감정이 변할까 봐 무섭나?”
“……네?”
“이젠 이름도 생각나질 않는군. 그 개새끼가 네게 한 멍청한 짓거리 때문에, 이제 감정을 신뢰하지 못하 겠나?”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듣고 나니 그 의문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무서워서, 모든 게 무 섭고 너무 큰 도전이 어려워서 그런 다.
“믿지 못해도 좋다. 이것도 한때 찬란했다가 꺼져버릴 감정일지도 모 른다. 미래의 일까지 장담할 수 없 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그만두세 요.”
“하지만 지금의 감정의 여분으로 미래를 장담하고 싶을 만큼 네가 어
여쁘게만 보이고, 네 말이 달게만 들린다.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내가 네게 흘려 있는 동안 실컷 내 권력 을 뽑아먹어 등을 돌릴 수 없게 해 두어도 좋겠지. 넌 머리가 좋으니 까.”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다. 권력 이니 뭐니.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황제 는 눈을 접어 웃으며 빈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쥐었다.
“이젠 끝이다.”
“ 네?”
“거절할 거였다면 일찍 했어야지.
난 분명 도망칠 기회를 여러 번 주 었다. 이젠 아니야.”
가까이에서 마주치는 기뻐 보이는 시선에 나는 그를 싫어한다는 말을 할 기회를 잃었음을 알았다.
아니다. 그냥 그 말을 할 수 없었 을 뿐이다. 대답을 할 용기가 난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황제에 대한 감정을 부정하는 말은 입으로 나오 질 않았다.
황제의 뺨에 손을 올려 보았다. 손안에 따뜻한 감촉이 가득하다. 이 사람은 사람을 항상 이렇게 몰아붙
인다.
그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말랑거리는 입술의 촉감이 윗입술에 닿는 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꽉 눌 러 감았다가 다급하게 말했다.
“ 폐하.”
닿을 듯 가까이에 있는 눈이 사 르르 떠지고, 그 눈길이 날 다시 바 라보았다.
“그래.”
“저는, 비천한 존재입니다.”
“나도 한때 가진 것 없이 거리를 떠돌았던 자에 불과했다.”
“감정은 흘러갈 것입니다.”
그가 안달 난다는 듯 내 몸을 추 켜 안고 내 아랫입술을 핥았다.
“같은 말을 여러 번 하게 하는 군.”
붉은 시선에는 단호한 확신이 어 려 있어서, 나는 여전히 겁먹은 채 였지만 도망갈 수 없어 마지못해 물 었다.
“그런데도 정말 저로…… 저로도 괜찮으시 겠습니 까?”
“네가 아니면 안 된다.”
한시라도 빨리 내 입술을 탐하고
싶어 하는 듯한 황제를 보는 게 낯 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제국의 황제가 날 원하고 있다는 게.
결국 나는 지금껏 피해온 자문자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래, 좋아 한다. 사랑하냐고 한다면, 그래. 사 랑한다. 이 입에 키스하는 것이 달 고, 이 품에 안기는 것이 좋았다. 그의 등을 만질 수 있는 존재는 나 밖에 없기를 언젠가부터 조금씩 바 라는 욕심이 자라나 있었다.
정말로 그래도 좋은 걸까? 사랑 이라는 모호한 것에 의지하여 이렇 게 어마어마한 신분 차이를 극복해
도 그는 괜찮은 걸까?
어떻게 하지? 이제 와서 누군가 를 사랑하고, 사랑에 의지하며 지낸 다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갈림길에 심 장이 두근거리는 내가 있다.
잠깐의 꿈이어도 좋다면, 꾸어도 좋지 않을까? 그의 걸림돌이 된다고 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면……오 이 후에 다른 비에게 밀려난다 한들, 첩으로 격하된다 한들, 혹은 내쳐진 다 한들……노
황제가 내 손에 쥐여준 기회에, 욕심이 한껏 자라났다. 이 사람을
사랑해도 괜찮을 시간을 받을 기회 가 있다는 것에-
나는 고개를 조금 떼어내고 아주 조심스레 한 마디 한 마디를 말했 다.
“만약 제가 싫어지신다면, 질리신 다면 언제든 내치셔도 좋습니다. 그 때는 다른 황비 후보를 제가 물색하 여 올리겠습니다. 혹은 정치적인 이 유로 다른 비를 들이신다고 하시면 그때도 자진하여 물러나겠습니다. 그것으로도 좋다면……
“좋다면?”
채근하는 시선에 떠밀리듯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정녕 좋으시다면……, 청 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픽. 그가 길게 입술을 찢으며 웃 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보 는 건 즐겁고 심장이 뛴다. 그의 손 이 내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이 말을 듣기가 이렇게 어렵군.”
그는 내 손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 깍지 꼈다.
그리고 곧장 짙은 키스가 밀려들 어 왔다. 내가 얼마나 엄청난 소리 를 지껄였는지를 후회하기도 전에 달콤한 키스가 사고를 집어삼켰다.
긴 소파에 언제 밀려 누웠는지도 모 르게 등이 닿았다.
갈증 끝에 아주 오랜만에 만난 물을 탐하듯 그가 나를 마셨다. 조 급한 키스는 차츰 부드러워졌다. 입 술을 이로 긁었다가, 내 입안을 천 천히 탐색하는 키스는 달콤한 백포 도주의 맛이었다.
“으음……소 골디나 산 셰리주 마 셨어요? 낮부터 술을 하시면 안 된 다고 제가……;
“직업 정신 하나 끝내주는군. 연 회에 와 있는 누구 때문에 속이 타 서.”
입을 맞대고 중얼거리는 낮은 목 소리가 등골을 타고 울렸다.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눈이 조금 가늘 어진 황제가 내 눈가와 이마에 키스 하더니 다시 내 입에 제 입술을 가 져다 댔다.
“그대에게 혼나는 순간이 제일 좋 은 것 같군.”
“ 폐하!”
못 산다.
더 말을 못하게 달게 입술을 삼 키는 그 때문에 난 눈살을 찌푸리다 가도 눈을 감아버렸다. 감정이 마주
닿은 것 때문인지, 부드러운 키스는 전에 없이 달았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