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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90화 (90/103)

- 90화

“폐하, 저는……;

“그런데 그건 그거고,”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난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 힘들어 내 손 을 한번 보곤 다시 황제 폐하를 바 라보았다.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 었다.

“다른 남자와 춤추는 꼴을 상상하 니 화딱지가 나서 안 되겠더군.”

“폐하……?”

아니,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짜 준 일정을 다 팽개치고 여길 왔단 말인가. 기가 막힌다.

빈첸조도 황당한 얼굴이었지만 황 제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나랑 춤 을 추겠다고 우길 수도 없는 모양이 었다.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내 손을 스르르 놓아주었고, 난 예의라 곤 없이 끼어드는 황제를 쏘아보았 다.

황제가 내게 얼른 제 손을 잡으 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악단이 기다리고 있질 않나.”

저 멀리 단상 위를 쳐다보자 악 단 단원들이 어느새 나타나 의원들 옆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 그래. 어쩐지 처음부터 음악이

없다 했다. 무슨 연회가 음악도 없 나 했더니, 황제가 꾸민 계략인 모 양이다.

음악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연회장에 빼곡한 인물 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려 있다는 것쯤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냥 내빼고 싶었지만, 황제의 손 이 언제까지나 기다릴 태세여서 어 쩔 수 없었다. 등을 떠밀리듯 그의 커다란 손에 내 손을 얹었다. 황제 는 자연스레 내 손을 쥐어 제 팔에 얹곤 의기양양 댄스 플로어를 향해 나아갔다.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싼 그와

춤을 추는 것도 이게 세 번째다. 그 리 어색하진 않았다. 다만 설렘보다 는 불만과 짜증이 더 컸다. 난 그의 발을 밟지 않으려 애쓰며 쫑알거렸 다.

“아니, 제가 좀 친구랑 재밌게 노는 꼴이 그렇게 보기 싫으셨어 요?”

“또 그러는군.”

“제가 뭘요?”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 말이다.”

“제가 뭘……/

황제의 발이 멎었다. 얼결에 그의 발을 밟을 뻔한 내가 놀라서 고개를

쳐들자, 황제의 붉은 눈이 나를 똑 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셀레스티아.”

그 깊은 눈을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안 된다. 더 듣고 싶지 않다. 심장이 난동을 부렸다.

황제가 빙긋 웃다가 웃음을 거두 었다. 몇 번 본 적 없는 진지한 얼 굴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씀이 뭔진 모르겠지만…… 이딴 식으로 사람 을 조롱거리로 만드셔야 했습니 까?”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하지?”

“폐하……!”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에 불만이 섞여 있었다.

“맨날 옆에 서 있으면 뭐 하지? 말만 하려고 하면 요리조리 도망가 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했나? 꽁 꽁 묶어 놓고 말을 듣게 해야 하 나?”

“그런 것이 아니라……,”

“일이 이렇게 된 건 다 그대 탓이 다. 난 똑바로, 제대로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뭘 듣는 척이라도 해 야지. 그대를 부릴 수 없다면 나머 지 전체를 부려 먹는 수밖에 없잖

아?”

“……그렇다고 해서 의회 회의를 아카데미에서 하는 법이 어딨습니 까?”

황제가 어깨를 으쓱하곤 내 왼손 을 쥐어 제 가슴팍에 올렸다. 쿵, 쿵. 조금 빠른 듯한 가슴 고동이 손 바닥으로 느껴졌다.

“미안하지만 네 그, 못 알아듣는 척도 오늘까지다. 최선을 다해 봤지 만 안 되겠다. 셀레스티아, 네가 아 니면 안 되겠다.”

“그, 그게 무슨……

“네가 그 썩은 구정물에, 황궁이

라는 더러운 바닥에 함께 남아 줬으 면 한다.”

“폐하, 하오나……”

“네가 그 좋은 머리로 도대체 무 슨 걱정을 그렇게 많이 하고 있는지 는 대충 짐작이 간다만, 그것들은 내가 해결할 문제다. 그리고 황태후 의 사례를 본 뒤가 아니냐. 난 외롭 게 제 후계자만 보며 살다 간 비극 적인 여자를 만들고 싶지 않다. 내 가 사랑할 수 있는 비는 너 하나밖 에 없는 것 같다.”

심장이 쿵쾅거려 제대로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황비? 설마 지금 내게 황비의 자 리를 말씀하고 계신 건가?

물론 황제의 반려니 뭐니 하는 소리를 지난 한 달 동안 귀가 따갑 게 듣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전략의 일환이었으니까.

“진심이신 겁니까?”

“그래.”

“ 진정……;

“몇 번을 물어도 다시 말해 주지. 진심이다.”

얼굴이 새빨갛게 타오르는 것 같 았다.

왼 손바닥으로 옮겨 온 고동이 온몸으로 달려나가는 것 같았다. 피 가 다니는 곳마다 맥박이 뛰는 것 같았다. 두근, 두근. 제 주제도 모르 는 심장과 맥박 같으니라고.

황제 폐하는 제 심정을 그냥 토 로하듯 말했지만, 나는 대답을 해야 한다. 난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발도 더 움직이지 않았기에 난 멍하 니 가만히 섰다.

일단 아니라는 건 안다. 황제 폐 하께서 뭐라고 하든 간에 난 저 말 을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 다. 그러니까 이 나라는 내가 살아 왔던 골디나를 손쉽게 흡수할 수 있

을 정도로 거대한 나라이고, 황제 폐하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도 아 마 내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런 나라의 황비로 어울리는 자는 또 얼 마나 대단한 자겠는가?

일단 황제 폐하에게 할 대답이 ‘그래요.’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 명 확했다.

그래서,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 따위는 없으니까. 문득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머리가 좋아도 문제군. 대답을 듣기 전엔 안 나갈 셈이었으니까. 2 층에 가서 차분하게 의회 구경이나 하지.”

중얼거리는 소리가 문득 들려온다 싶더니, 그가 나를 안아 올렸다. 난 내려 달란 뜻으로 가볍게 발버둥을 쳤지만, 황제는 웃기만 했다.

“지금 도망갈 생각이잖아. 아닌 가?”

“그거야……;

시선이 마주친 그의 얼굴에서 미 소가 사라졌다. 황제는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쳤다. 그의 손 끝에 눈물이 묻어났다.

“내가 또 울렸군.”

“내버려 두세요.”

우는 게 딱히 창피하지도 않다. 천하게 자라 와서 그런가. 나는 억 울하고 화낼 일 같은 것은 아주 널 려 있는 세상에서 자라왔으니까.

내 입으로 나의 천함과 부족함을 말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싫고 억울해서 그런다. 내가 그에게 어울 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곁에 서게 된다면 황제의 위상까지 추락할 것을 말할 것이 짜증 나서 그런다.

그런 줄 알면서도 생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이게 다 무슨 짓인가.

눈을 한 손으로 가리고 안겨 있

는 사이에 그가 느긋하게 걷는 발걸 음이 느껴졌다. 오래지 않아 연회 홀 2층에 도달한 그는 나를 내려놓 았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1층과 는 달리 2층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황제 폐하의 곁이라면 어디 에나 있는 디펜더들이야 이 어딘가 숨어 있겠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았 다. 간신히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 았다.

아래가 내려다보이게 되어 있는 넓고 긴 소파에 나를 내려놓은 황제 는 내 옆에 걸터앉았다.

너무 무거운 말을 들어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 지 모르겠다. 그저 이런 짐 덩어리 같은 상황에 나를 처하게 한 그에 게 화가 나고, 밉게 느껴졌을 뿐이 다.

좋은 상관과 좋은 부하로 잘 지 내다가 헤어지면, 그러면 언젠가 다 시 그의 얼굴을 보러 올 수 있을지 도 모르는데. 나는 그걸로 족한데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드디어 제대로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 연회 홀을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뭐라 말을 걸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저 같이 앞을 바라볼 뿐이 었다.

춤곡 한 곡의 연주가 끝날 때까 지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문득 말 했다.

“널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뜻밖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황제의 붉은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는 들었다. 비뉴스가 그때 힘들어했 다고도 들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 서 어떻게 지내셨는지를 들은 적은 없었다.

그저 잘 지내셨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정이 많은 그니까, 내가 그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으면 힘들었 을까?

“버틸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

무거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진심임을 읽을 수 있었기에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주, 그런 것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 건 풀린 뒤였으니까. 쓸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왜일까, 생각을 해봤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고백은 내 입

장도 생각해 주지 않고 계속되었다. 심장이 속절없이 뛰었다.

“네 웃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왜 그렇게까지나 비참 하고 힘이 드는지 말이다. 내겐 널 잃고도 제국이 남았는데.”

“ 폐하.”

“그때 알 수밖에 없었다. 나의 여 러 가지 부분 중에서, 그저 한 명의 사람으로서 다른 누군가를 마음으로 사랑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 널 원했 다. 외국에 납치당해 있는 힘 없는 부하직원 주제에 황제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 너를, 그 와중에도 나의 신변을 생각하는 멍청한 너를 원했

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나보고.

그의 사랑 고백이 절절하고 마음 에 와 닿을수록 억울한 마음이 더 컸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그 아랫부분이 지끈거리며 아팠다.

황제가 쥐어오는 손을 뿌리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눈물 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소맷단으 로 훔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넘쳐흘렀다.

부드러운 손길이 뒤통수를 쓰다듬 는가 싶더니 날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품으로 몸이 끌려갔다. 따뜻한

품에 안겨 등이 어루만져지는 것은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다. 따뜻할수 록, 든든할수록, 그게 더 사람을 힘 들게 했다.

그래도 소리 없는 눈물이 자꾸만 흐르는 중에 얼굴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것 하나는 다행이었다. 그러다 무심코 눈물에 푹 젖어드는 보랏빛 제복이 얼마나 비싼가를 머릿속으로 따져보고 있는데, 한숨 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셀레스티아.”

대답 대신 가만히 있기만 하자, 황제가 다시 나를 달래듯 불렀다.

“셀 레스티아.”

대답을 안 하면 영영 계속 부를 것 같아서 안긴 채로 고개만 끄덕였 다.

“내가 네게 너무 큰 부담을 지워 준 것인가? 그럴 생각은 아니다. 강 요할 생각은 없다. 처음부터 넌, 노 예 주제에 황제에게 고함을 질러 대 는 여자였으니까. 황궁이라는 답답 한 공간을 벗어나더라도 네 인생을 잘 꾸릴 테지.”

“ 폐하……?

“다만, 외부의 시선 때문에 내 손 을 놓는 거라면 그것만은 못 봐 주

겠다는 것뿐이다.”

내게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어 떻게 그걸 안 볼 수가 있어? 안 들 을 수가 있냐고!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난 울컥해 서 그의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 다. 시선을 마주하고 고함치듯 대꾸 했다.

“폐하께선 가볍게 생각하실 수 있 을지 모르겠지만, 전…… 제가 비서 가 되겠다고 했을 때, 제 출신에 대 해서 의원들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 억하시는지요?”

난 진지하게 말한 건데 황제는

픽 웃었다.

“난 네가 화를 내는 게 제일 마음 에 든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람. 사람 이 화내는데.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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