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한 달 가까이 황궁에만 처박혀 있다가 밖에 나오니 그놈의 소문이 얼마나 퍼져 있는지 짐작도 안 되었 다. 난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부르크 제국의 영웅이신데 이런 하찮은 줄을 기다리시게 할 순 없 죠.”
“네? 아니에요. 굳이 그러지 않으 셔도.”
“자자, 이게 별거라고 이 정도도 못 해 드리겠습니까? 셀레스티아 님 께선 황제 폐하를 위해 목숨도 던지 셨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아니, 정말로 괜찮아요.”
“아뇨, 자자. 뭐 하는 거야, 빨리 길을 열어 주세요.”
난 목숨을 던진 적이 없다. 아니, 결과적으론 죽을 뻔하긴 했지만, 그 게 목숨을 던지려고 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닌데.
뭘 어떻게 해명할 수도 없어서 멍하니 강사님을 보고 있는데, 내 앞에 있던 그 기다란 줄이 무슨 사 열식이라도 하는 기사들처럼 두 줄 로 쫙 갈라졌다. 그 사이를 지나가 라고?
빈첸조는 제 일 아니라고 그저
재밌기만 한지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개진 나를 이끌고 그 사이를 당 당하게 걸었다.
거대한 연회 홀의 문까지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선 을 받아야 했는지 말로 차마 표현할 수도 없다.
난 어찌나 창피한지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문을 통과했다. 이래 서 귀부인 나리들이 쥘부채를 하나 씩 들고 다니나 보다, 하는 생각밖 에 안 들었다.
연회 홀 안은 화려한 샹들리에와 생화 장식으로 깔끔하고 보기 좋게 잘 단장되어 있었다. 입장이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꽤나 붐비는 사이를 지나 우리는 소파가 있는 쪽으로 다 가갔다.
빈첸조가 악단이 설 자리 쪽을 바라보더니 문득 말을 걸어왔다.
“그거 알아? 지금까지 우리 한 번도 춤 못 춰 본 거.”
“아…… 그랬나?”
“몇 번 기회는 있었는데, 줄곧 타 이밍이 나빴는지……-”
“춤이 뭐 중요한가.”
난 춤을 잘 추는 편도 아니라 어 색하게 웃었지만, 빈첸조는 어디까 지나 진지한 태도였다.
“그래도 난 너랑 춤춰 보고 싶었 어. 계속.”
하여간 그도 참 보기보다 활동적 이다. 파트너인 내가 춤을 안 추겠 다고 우길 수도 없어서 난 방긋 웃 어 주었다.
“응. 오늘 추자.”
문득 돌이켜 보니 내가 함께 춤 을 춰 본 대상은 황제 폐하 한 명 뿐이구나.
처음 황궁 연회에 참석했을 때는 그가 무슨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 며 부상(미1)으로 춤을 춰야 한다 는 소리를 해서 어쩔 수 없이 알지
도 못하는 춤을 춰야 했다. 그리고 그다음 아카데미 가면무도회 때도 황제 폐하가 궁을 뛰쳐나와서 연회 에 파트너로 참석하는 바람에 꼼짝 없이 그의 곁에만 붙어 있어야 했으 니까.
이제 남의 발을 밟아 대는 실력 이 만천하에 뽀록나겠군.
하지만 어째서인지 악단이 당장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회는 뷔페 서비스만 계속될 뿐 음악이 없 었다.
연어 카프레제를 열심히 집어 먹 으며 기다려 보았지만 꽤 오래 걸리 는 모양으로 부산스레 의자만 나르
는 모습이었다.
크게 상관은 없었다. 아카데미의 추억을 곱씹는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으니까.
아직까지 졸업하지 못한 다른 클 래스의 반장들과도 만난 우리는 즐 겁게 시험이나 강사들에 대한 이야 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새 비 서직으로 쓸 만한 인물들도 여럿 추 천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하 인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무대 쪽 조명을 밝히는 게 보였다.
“앗, 드디어 악단이 나오나 보다.”
“오늘따라 준비가 엉망진창이네.”
“그러게 말이야.”
웃으며 무대를 바라보는데 밝은 조명 아래 차례로 등장한 것은 눈 에 너무 익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였 다.
레건 의원? 브랑 의원? 내가 뭘 착각했나 싶었지만 계속해서 등장하 는 그들은 틀림없이 악단이 아니라 의원들이었다.
겨우 궁 밖으로 나온 단 하루마 저 의회의 구성원을 봐야 한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여긴 아 카데미의 연회장이다.
오케스트라라도 들어설 듯 많이 놓여 있던 의자를 채운 의회의 구성 원들은 태연하게 서류를 펴서 검토 해 댔다. 황태후 파의 대부분이 감 옥에 들어가 있는 터라 수가 확 줄 어들어 그들은 충분히 무대에 설 수 있는 인원이었다.
“이게 대체……;
놀란 것은 나 하나뿐인지, 아카데 미의 전 구성원은 놀라지도 않고 단 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미리 통보되어 있던 일정인가?
그 주목 사이를 꿰뚫은 것은 시 종 네 명이었다. 붉은색에 금테를
두른 화려한 의자가 운반되어 들어 왔다. 황제가 앉을 의자라는 것쯤은 누가 보아도 안다.
기가 막혀서 바라보고 있는 사이 에 눈에 익은 사회자가 나와서 진행 을 시작했다.
“422회 차의 의회 회의를 시작합 니다. 오늘은 안건의 특수성을 따져 다른 아카데미 구성원이 들을 수 있는 장소를 택하였음에 양해를 구 합니다. 오늘의 안건 첫 번째, 황제 의 비서 후보 발탁입니다. 지원하고 자 하는 후보가 있다면 현 비서에 게 이력서를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 다.”
워낙 전문적인 어투로 이야기하는 바람에 내용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 렸지만, 저게 무슨 의회 안건이란 말인가?
“두 번째 안건입니다. 황제 폐하 의 비 후보를 발탁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거론된 후보는 여럿 있습 니다만, 황제 폐하께서는 모두 싫 다고 퇴짜를 놓으셨기 때문에 새로 운 후보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 다.”
“새로운 후보 추천이 있습니다.”
“네. 발언해 주십시오, 리온 티아 헤브 공작.”
“저는 현 비서인 셀레스티아 님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나요? 나?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주고 리온 공작님을 째려봤지만, 공 작님은 내가 어딨는지도 모른다는 듯 뻔뻔하게도 말했다.
“품행이 방정하시며 황제 폐하를 위하는 마음이 아름답고, 황제 폐 하의 건강에 지대한 긍정적인 영향 을 미친 점 등을 감안한 것입니 다.”
웃기지 말라고! 나는 기가 막혀 단상으로 뛰어 올라갈 기세로 치맛 단을 부여잡았지만, 다행히도 여기
에는 의회 인원 전체가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정말 아주 사소한 안건에 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싸워 대는 자들인 것이다.
가령 왕성 정원의 꽃 종류를 아 네모네와 작약, 데이지, 튤립 중 어 느 것으로 할지, 비율을 1 대 2 대 7로 하는가, 2 대 2 대 6으로 하는 가 하는 정도의 안건에도 두 시간 동안 설전을 벌였다. 오죽하면 황태 후의 신변에 대한 문제도 아직 합의 되지 않았겠는가?
그들이야말로 이 나라의 미래이 자, 말싸움의 천재들이 아니던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안건을 내버려 둘 리가 없다.
난 조금 안심되는 기분이 되어 손을 든 레건 의원을 바라보았다. 그래, 언제나와 같이 말꼬투리를 잡 고, 태도를 지적하고, 말도 안 된다 며 탁자를 두드리라고, 후작님! 오 늘만은 그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 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은 나의 기대에 조금도 부응하는 것 이 아니었다.
“셀레스티아 님은 현재 공직에 있 기 때문에 비로 발탁하는 것이 어렵 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런 이유로 새로운 비서를 발탁 하고자 하는 안건이 먼저 상정되지 않았습니까?”
“아,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 군요.”
이게 무슨 꽁트도 아니고.
레건 의원은 이어 말했다.
“황제 폐하의 저주를 푼 공을 세 운 분이 아닙니까? 그분보다 황제의 비로 더 잘 어울리는 분을 찾을 수 가 있을지 의심스럽군요.”
저기요, 할아버지. 이제 은퇴하실 때가 되신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 모든 화제의 당사자인 셀레스티아, 바로 내 의견만은 아무 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회장 안의 모두가 오오오,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기가 막혀서. 오오오는 무 슨 오오오냐.
그때 다른 브랑 의원이 손을 들 어 발언권을 청했다.
“저는 다른 의견을 내고 싶습니 다.”
그래, 할머니! 믿을 건 역시 같은 여자뿐이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연회에 쳐들어와서 그런 농담 을 지껄이는 저들에게 빨리 면박을
주세요!
하지만 기대라는 것은 허망하게 무너지게 마련인가. 브랑 의원도 이 상한 소리를 시작했다.
“저는 그런 면보단 셀레스티아 님 의 지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 니다. 아카데미의 역대 조기 졸업자 들의 공적을 아시는지요? 그들은 신 화가 된 인물들입니다. 그렇게 아까 운 두뇌를 비서로 썩힐 수는 없지 요. 황제 폐하를 보조하는 일도 물 론 영광된 일임은 틀림없습니다. 하 지만 이 제국을 위해 더 넓은 시선 을 가지고 통솔하는 자리에 선다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습니
까? 그게 바로 셀레스티아 님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능력 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 드리는 것이 저희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저들은 내가 비서가 되겠다고 임 명 배지를 받는 순간에도 수없이 반 대를 했던 자들이다. 대체 왜 저렇 게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를 경멸하듯 보던 시선은 잊히질 않는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손바닥을 뒤집듯 구는 거지?
난 뭔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 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마주친 것은 내게로 쏠려 있는 모두 의 시선뿐이었다.
갑자기 놀림당하는 기분이 들었 다. 여기에 서 있고 싶지 않았다. 땅을 뚫고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이 었다.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빈첸 조가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이끌어 주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빈첸조의 인도로 허겁지겁 수없이 많은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누군가 의 가슴팍이 앞길을 막고 서 있었 다.
“……실례합니다.”
“기분이 상한 모양이군. 이런 연 출을 하는 걸 좋아하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말만 하려고 하면 도 망을 가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난 뒤로 한 발 짝 물러나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붉은 눈과 시선이 맞닥뜨렸다. 그러 고 보니 그의 옷차림도 오늘 입기로 예정되어 있던 검은 제복이었다.
“……폐하?”
“왜 부르지?”
그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뺨이라도 올려붙였을지 모른다. 공개적인 자 리에서 이런 일을 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내게 먼저 뭘 물어볼 수도 있었 잖아.
난 이를 으득 갈며 물었다.
우
이게 대체 다 뭡니까.”
“뭘로 보이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반 황제가 사람을 놀리듯 한쪽 입술만 당겨 비웃듯 말했다.
“계속 거짓말뿐이군, 요즘은.”
“제가 무슨 거짓말을 한단 말씀이 십니까?”
“정말로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정말 모르겠습니다.”
“알게 해 줄까?”
황제의 얼굴이 내 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설마 지금 이 자리에서 키스라도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 다면 정말 뺨을 때릴 거다.
내 눈빛을 읽었을 그가 손을 내 밀었다.
“이야기를 좀 하지.”
“싫습니다. 저는……/
“더 댈 핑계가 있다면 대도 좋겠 지. 하는 얘긴 다 들어 주겠다.”
기가 막힌다. 무슨 연극을 꾸미고 싶었던 걸까?
“나는 황궁 안의 생활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셀레스티아.”
우
폐하?”
“그래서 놔줄 생각도 했다. 지난 두 주 동안, 네가 내게서 달아나려 고 아주 착실히도 준비를 하고 있던 그 시간 동안에 말이다. 네가 그토 록 귀머거리에 멍청이인 척 굴면서 까지 떠나려고 하는 꼴을 보니까, 정말 그렇게나 떠나고 싶나 싶어 서.”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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