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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88화 (88/103)

- 88화

“새 직장을 아무리 잘 구한다고 해도 일개 연구직 정도일 텐데, 호 위가 필요할 정도로 대단한 직책이 못 될 거예요.”

“불편하다 하신다면 언제든 떠나 겠습니다만, 허락만 해 주신다면 언 제까지고 지켜 드리겠습니다.”

이 충직한 남자는, 아무래도 내 주머니 사정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는 비뉴스의 고양이같이 긴 동공을 슬쩍 바라봤다가 작게 웃었 다.

뭐,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 가 있겠지. 일단 말이라도 저렇게

해 주니 마음은 고맙다.

난 더 이상 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커튼을 옆으로 밀고 창밖 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축제 때문에 온통 꽃 장식이 되어 있는 수도의 봄 공기는 향긋했다.

“어? 저분…… 혹시 그분 아니 셔?”

“어머, 저분이 그분이셔?”

“헉, 어떡해. 실물을 직접 뵙게 될 줄이야.”

수군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 다. 어디 유명한 사람이라도 나와 있는 걸까?

난 목을 더 길게 빼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집 앞마당을 정리하고 있던 듯 보이는 아낙네들 은 꺅꺅거리며 내 쪽을 보고 있었 다.

“어머, 이쪽을 보신 것 같은데 말 걸어 볼까?”

“함부로 말 걸었다가 달아나시기 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황 제 폐하께서도 아직 구애 중이라고 하시던걸!”

“어쩜…… 황제 폐하의 구애라니, 나라면 단박에 넘어갔을 텐데.”

“으휴, 우리랑 같겠어? 정말 너무

로맨틱해. 빨리 폐하의 마음을 받아 주셨으면 좋겠다.”

멍하니 듣고 있는 사이에 그들 중 하나와 시선이 정확하게 맞닥뜨 렸다.

급히 그 아낙네가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나머지 사람들도 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제서야 길거리에 나와 있는 많 은 사람들, 개를 산책시키고 있거나 아카데미 연회에 참석하려는지 드레 스며 정장을 차려입고 나와 있는 사 람들,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시 선이 전부 나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설마 방금 들은 게 내 얘 기란 말인가?

“셀레스티아 님, 고개를 오래 내 밀고 계시면 위험합니다.”

비뉴스의 말이 등 뒤에서 들려왔 다. 나는 멍하니 그에게 이끌려 마 차 안으로 고개를 다시 넣고 커튼을 내렸다.

사미디온이 내가 황제의 반려가 되는 걸 사람들이 반긴다느니 했을 땐, 도대체 무슨 소린가 했는데. 정 말이지 헛소문이라는 것은 원래 순 식간에 자라난다.

선전 포고 한 번으로 소문이 이 렇게까지 커지나? 사람들은 그렇게 떠들 거리가 없나?

빨리 떠나라고 등을 떠밀린 기분 이었다. 이 소문이 더 자라기 전에 떠나려고 했는데 이건 무슨, 이미 장안의 화제도 이런 화제가 없다.

난 괜히 의회 사람들을 머릿속으 로 떠올리며 씩씩거렸다. 황태후 파 의 처벌을 빨리빨리 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다른 흥밋거리가 없어서 저렇게 구는 거잖아!

“빨리 가요.”

“알겠습니다, 셀레스티아 님.”

마차는 속력을 올려 아카데미의 입구를 향해 달렸다.

드레스를 입고 마차에서 내리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발에 익지 않 은 구두를 신은 탓에 휘청거리며 디 딤판을 밟았다. 어디에선가 기다리 고 있었는지 파랑 머리의 남자아이 가 황급히 다가와 손을 잡아 주었 다.

제대로 바닥을 디디고서야 고개를 들어 앞에 선 남자애를 보았다. 파 란 머리칼에 잘 어울리는 푸른색

상.하의 연회복은 그에게 꼭 맞게 재단되어 말끔하고 우아했고, 목에 감은 흰 크라바트까지 굉장히 어른 스러운 차림이었다.

“빈첸조!”

“셀레스티아, 기다렸어.”

정말 그와도 오랜만에 만나는 기 분이다. 그가 내 손등에 인사하는 게 너무 웃기고 간지러워서 깔깔거 리며 웃자, 빈첸조가 내 손을 제 팔 위에 놓았다.

“오늘은 내가 에스코트하는 거 다?”

“응. 잘 부탁할게.”

마차를 세우는 곳을 지나 긴 회 랑을 따라 걷는 사이에 빈첸조는 긴장한 듯한 어조로 문득 물어 왔 다.

“황제 폐하의 반려라는 그거, 정 말이야?”

빈첸조까지 이렇게 묻는 걸 보면, 정말 소문이 단단히 잘못 나긴 한 모양이다. 그야 정정해야 할 주체인 황제 폐하께서 손을 놓고 있으니 어 쩔 수가 없다.

난 고개를 붕붕 저었다.

“무슨 소리야. 황제 폐하는 그저 내 상사이실 뿐이야. 내가 반려라니

당키나 해?”

“정말이야?”

“뭘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보고 그 래.”

“하지만 그럴 생각도 없으신데 선 전 포고에 적은 사실을 아직까지 정 정하지 않으셨다는 건, 황제 폐하께 서도……『

또 시작이다. 황궁을 나와도 어째 이 화두에서 벗어날 수가 없네. 난 기가 막혀서 손가락을 하나 펴서 살 랑살랑 저어 주었다.

빈첸조는 뭔가를 더 말할 듯한 기세였지만, 그가 다시 입을 떼기도

전에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 다.

“꺅! 그만해, 멍청이들아! 아악!”

그 악에 받친 외침은 분명 아는 목소리다. 비키?

난 길게 이어진 회랑에서 구석으 로 빠지는 샛길 쪽을 슬쩍 살펴보았 다.

수풀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는 쪽에 어른어른 대여섯 명의 인영이 보였다. 빈첸조와 나는 목소리가 들 린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 큰 기둥 뒤에 섰다.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바

닥에 웅크린 채로 온갖 주스를 뒤집 어쓰고 있는 백금발의 머리통이 보 였다.

하얀 드레스가 온통 주스로 얼룩 덜룩하게 물들어 있어 알아보기 어 려웠지만, 비키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자들은 그간 비키의 추종자라고 생 각했던 관료 반의 아이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비키에게 침을 뱉었 다.

“반역자의 자식이 어떻게 뻔뻔하 게 고개를 들고 나올 생각을 해?”

“그동안 너와 어울렸던 시간이 아

깝다, 비키.”

비키와 함께 같은 클래스의 평민 들을 괴롭히던 애들이었는데, 이제 는 비키로 상대가 바뀐 모양이었 다.

비키가 이제 와서 안쓰럽게 느껴 지지는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그녀가 저 꼴이 되지 않았다면 그녀 는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해 지금도 친구들의 위에 서서 턱으로 그들을 부렸을 거니까.

하지만 계속 돌아가며 누군가를 학대하는 꼴이 보기 좋은 것은 아니 다.

어쩔까 생각하고 있는데 안경을 쓴 곱슬머리 남자아이 하나가 그 무 리의 가운데로 다가가더니 비키에게 수건을 휙 던져 주었다. 비키가 고 개를 들고 누군지 확인하곤 놀란 얼 굴을 했다.

비키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놀랐으니까. 그 남자아이는 비키가 그렇게 지겹도록 괴롭혔던 오클라였 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 다.

“네 도움 따위 필요 없어!”

“아, 그래? 나도 널 도울 생각은 없어. 다만 네 잘못이 아니라 네 부

모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일이라면 누군가는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 을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오클라의 말은 비키가 절 신분을 이유로 괴롭힌 게 얼마나 멍청한 짓 이었는지를 통렬히 비판하는 것이 다. 오클라도 많이 달라졌네. 마지막 에 봤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느낌은 아니 었는데 오

대체 뭐냐는 듯 다시 돌아서는 오클라를 노려본 귀족 자제들은 다 시 비키를 신나게 괴롭힐 셈인지 손 에 들고 있는 장난감 화약에 불을 붙이려 했다.

아주 작게 폭발하는 화약이지만

옷이 엉망진창이 될 게 틀림없었다. 모처럼 연회에 온다고 새로 맞춘 듯 한 그녀의 드레스는 척 보기에도 몹 시 값비싸 보였다.

비키는 제가 자주 한 짓임에도 깜짝 놀란 얼굴로 다급하게 소리쳤 다.

“……잠, 잠깐만! 오클라, 거기 서!”

오클라의 발이 딱 멎었다.

“내 이름 처음 부르는 거 알아?”

“아, 알아! 내가 미안해. 도와줘.”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오클라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얼 굴이었지만 비키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귀족 자제 나리들의 눈에 그 광경이 얼마나 웃 기게 보였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 들은 혀를 차며 오클라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쳤다.

“네가 뭔데 끼어들고 난리야?”

“영웅 나셨네. 넌 반역이 뭔지도 모르냐? 반역자의 자식한테 잘해 주 다니, 평민 자식은 뇌도 가난해서 썩었나?”

주먹다짐이 될 모양이었다. 이미

한 대 맞은 오클라가 바닥에 나뒹구 는 게 보였다. 순간 눈이 홱 돌았 다.

거기까지다. 내가 참고 봐줄 수 있는 건.

아마 오클라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나도 끼어들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 금껏 웬만한 사태에도 나서는 법이 없던 오클라가 저렇게까지 용기를 내며 나섰다는 건 내겐 큰 의미가 있었다.

그래. 부모님의 지위, 부모의 잘 못 때문에 자식이 덤터기를 쓰는 것 도 한계가 있다.

내가 끼어들자 자연스레 빈첸조도 합세했다.

“대체 또 뭐야, 썅!” 하고 중얼거 리던 그들이 우리를 보곤 딱 굳어 멈춰 섰다. 참으로 시류에 잘 편승 하는 귀족 나리의 자제분들께서 지 금의 소문을 듣고 날 어떻게 대할지 는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다. 몇 걸 음 뒤에서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굴고 있는 비뉴스가 직접 나 설 필요도 없었다.

귀족 자제님들은 뭐라고 어물거리 다가 손을 털고 자리를 떠 버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비키와 오클라만 우리의 앞에 남은 셈이다.

비키는 오클라가 일으켜 주는 대 로 일어나서 온 치마에 묻은 오물을 짜증스레 노려보았다.

“오랜만이네, 비키.”

“지금 비웃는 거야?”

“사회인이 된 다음 마주하면, 우 리의 위치가 사뭇 달라서 말도 못 걸 거라고 했잖아, 네가. 기억나?”

“……하.”

“그래서 네가 졸업하기 전에 부지 런히 말을 걸어 두려고.”

“……황제 폐하가 너 같은 거랑 정말로 결혼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

하는 건 아니지? 멍청한 평민 주제 에!”

빈첸조가 한숨을 푹 쉬더니 내 손을 끌어당겼다.

“저 꼴이 돼서도 변한 구석이 하 나도 없네. 괜히 상대하지 마. 마음 만 상해.”

빈첸조는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평민 주제에라는 말로 마음이 상하 는 건 무리다. 고아라는 말을 빈민 촌에서 들으며 자라 온 나로서는, 그냥 그게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 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빈첸조가 마음을 써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난 방긋 웃으 며 비키와 오클라를 일별하고 다시 회랑 쪽으로 돌아갔다.

긴 회랑을 지나 본관의 옆에 딸 린 거대한 연회 홀 앞에 도착하자 아주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오늘 을 위해 한껏 꾸민 차림을 한 남녀 아카데미생과 졸업생들이 짝을 지 어 줄을 서서는 초청장을 보여 주 고 한 쌍씩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 었다.

“셀레스티아 님이셔.”

“뭐, 셀레스티아 님?”

내 이름이 들린 것 같아서 고개

를 돌리자, 빈첸조와 내 앞에 서 있 는 그 기다란 줄이 내 쪽으로 모두 돌아서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많은 시선에 노출되는 건 솔직히 좀 공포스러운 일이다. 내가 깜짝 놀라 굳어 있자, 검표를 돕고 있던 흰 머리의 강사님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아아, 소문의 그 조기 졸업생이 군요.”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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