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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87화 (87/103)

- 87화

나는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재 활 운동 기구들뿐 아니라 이런저런 서적들도 쌓여 있는 게 보였다. 그 사이를 들춰 보자 처음 보는 사미디 온의 필체로 기초적인 내용들을 필 기한 것들이 보였다.

내가 신경 써 주지 못하는 사이 에, 황제 폐하가 가정 교사를 보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꽤 체계 적인 공부를 하는 모양이었다.

사미디온이 겨우 손에 넣은 안정 적인 환경이다. 이것을 빼앗고 싶지 않은데……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 었을까?

난 더 이상 있다간 또 울 것 같 아서, 사미디온에게 용돈을 주고 조 금 이야기를 나누다가 금방 나와 버 렸다.

그 뒤로 일주일이 어떻게 흘렀는 지 모르게 지나갔다. 정말로 모든 것이 정상화되었다는 것이 실감 났 다.

여느 때와 같이 바삐 오가는 황 궁의 식솔들, 별것 아닌 문제를 가 지고 들이닥치는 신하들과 머리를 감싸 쥔 황제.

그모든 걸 지켜보며 스케줄을 조율하고, 황제의 뒤를 조용히 쫓으 며 그가 당최 기억해내지 못하는 손 님들의 신분과 특징을 몰래 안내해 주는 일은 즐거웠다.

하지만 슬슬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황제가 새로운 비서 후보를 뽑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난 마침 빈첸조로부터 한번 얼굴 을 보고 싶다는 서신도 받은 차였 고, 아카데미의 봄 연회에 초청도 받은 터라 비서 후보를 직접 뽑아 올 계획을 세웠다.

“다음 주는 아카데미에 다녀오려 고 합니다.”

“아카데미?”

“마침 졸업자들이 정해질 시기이 질 않습니까.”

“그래서?”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제가 확 인하여 괜찮다고 생각되는 사람으로 몇을 후보로 올리겠습니다.”

그가 보던 책을 탁 덮었다. 그리 고 엎드려 있던 몸을 훌쩍 일으켜선 벽에 기대앉아 나를 쏘아보았다. 금 방이라도 사람을 잡아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런 얼굴을 한 사람이

황제라는 건 퍽 다행인지도 모른다. 길거리에 쏘다녔다간 사람들이 무서 워서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할 거 다.

내가 말을 번복하길 기다리는 듯 지긋한 시선이 한참을 쏘아보았지만 난 꿋꿋이 다음 말을 기다리고만 있 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보지.”

“어디서부터 말하면 되겠습니까? 방금의 대화를 다시 읊을까요? 아니 면 열 마디 전부터?”

그가 큰 오른손을 들어 제 얼굴 을 덮었다 떼어냈다. 붉은 눈에는

이제 가벼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정말, 미치겠군. 됐다.”

“오늘의 일정 소화는 무리 없으 시도록 모두 잘 지시해 두었습니다. 외부 손님도 적고 비교적 한가한 일정이니 제가 없어도 괜찮으실 겁 니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 다.”

그는 덮은 책 표지 위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문득 입을 열었 다.

“……이 일을 얻기 위해 네가 얼 마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기억나지도 않나?”

황제 폐하께서는 정이 많은 분이 다. 나를 잡아 주실 셈이다.

하지만 이건 내 욕심으로 버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난 반쯤 못들은 체하곤 얌전히 인사를 올렸다.

“하루의 휴가도 허락해 주지 못할 셈이시라면 제가 이 비서 자리에 남 아 있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보내 줘도 그만둘 셈인 거 아닌 가?”

난 남은 기간 동안 그와 잘 지내 고 싶었다. 그의 뚱한 대꾸에 최대 한 내가 지을 수 있는 밝은 미소로

화답하자, 황제는 진절머리가 난다 는 듯 짜증스레 말했다.

“그래, 갔다 와.”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예를 다하고 물러났다.

미루고 싶은 날은 더 빨리 다가 오게 마련이라, 아카데미 봄 연회의 당일은 금세 다가왔다. 일찍부터 일 어난 나는 미리 골라 두었던 드레스 를 꺼냈다.

황제 폐하께서는 그 짧은 비서

노릇을 하는 동안 퍽 많이도 옷을 하사해 주셨기에 고를 선택지도 많 았다.

침대 위에 퍼트려 놓은 붉은 드 레스 자락을 손으로 더듬는데 눈물 이 왈칵 솟았다. 뻔뻔하게 있고 싶 었다.

이제 황위 계승자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된 신세의 막시를 두고, 결혼 을 서두를 수밖에 없게 된 황제를 알면서.

그 황제의 부인이 나를 보고 퍽 도 좋은 얼굴을 하겠다. 왜 이딴 미 련이 남는 걸까?

화장을 하려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데 절로 내 입술로 시선이 갔다. 자 연스레 황제와의 키스가 떠올랐다. 눈을 꽉 감았지만 입 안에 남은 감 촉은 쉽게도 떠올랐다.

왜 그런 키스를 해서. 왜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흔들렸을 나를 더 흔 들어서. 부효과도 없는 그가 대체 왜.

황제라는 위치로 그냥 희롱한 거 라면 구역질이 나고 더할 나위 없 이 그가 싫어졌을 테고 이렇게 떠 나는 것에 더더욱 망설임이 없었을 테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게 부효과 에 휩쓸려 나를 그저 포옹했을 때에 도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틀림없이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내 감정이 보였을까? 내가, 바라 지 못할 나무를 꿈꾸는 내가 불쌍했 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마음을 잘 못 숨겼다. 종종 들키곤 했다. 그러니 그가 이미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나도 지금까지 눈을 돌려 왔 기에 인정해 본 적 없는 그 감정을, 그가 먼저 알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스스로에게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자라서, 황제 의 새로운 비께서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들 나는 그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먼저 견디지 못할 거다.

요즘 종종, 그를 볼 때마다 심장 께가 무너지듯 아팠으니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제 신분이 황제인 줄도 모르는 사람 처럼 혼자서 저 먼 이국까지 나 하 나를 구해내겠다고 온 그를 봤을 때 부터 였을까?

모르겠다. 언제나 이 감정은 되돌

이켜 시작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너 무나 어려웠으니까. 그저 처음부터 거기에 있는 것처럼 큰 부피로 사람 을 다른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곤 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또 다른 것은, 나는 한 사람에게 어렵게 빠지고 나 면 거기서 도무지 잘 헤어 나오는 법을 모른다는 거다. 그렇게 호되게 당하기 전에 수많은 징조들을 모두 무시했던 것만 봐도 뻔하지.

문득, 난 눈을 똑바로 뜨고 거울 안의 나를 직시했다. 그럴듯한 옷차 림과 화장을 하게 되었지만, 뒷골목 에서 지낼 때와 하나 변하지 않은

붉은 머리칼과 주황색 눈이 그대로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만하자, 이런 생각. 괜한 생각 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 뿐이다.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처럼 받은 하루의 휴가다. 아카데미의 연 회에 가서 마음껏 즐기고, 인사할 사람들한테도 인사하고, 비서 후보 로 추천받을 사람도 만나 본 다음 돌아와야지 오

황궁에서 처음 참석했던 연회에서 입었던 드레스를 걸쳤다. 처음에 입 을 땐 그렇게도 낯설고 내 것이 아 닌 것처럼만 느껴졌던 드레스를 입

는 것도 이제는 퍽 익숙해져 있었 다.

이번 아카데미 봄 연회의 드레스 코드에 맞추어 루아나의 도움으로 흰 봄꽃을 잔뜩 엮어 만든 화관도 머리에 얹었다.

황제 폐하께 받았던 보석들도 아 직 고스란히 있었다. 그걸 고르고 있자니 루아나가 들어와 드레스의 등을 여며 주었다. 요즘 날 놀리는 데 재미를 붙인 그녀는 내 목에 걸 린 화려한 목걸이를 톡톡 건드리며 씩 웃었다.

“이거 봐, 이게 다 흑심이라니까? 어떤 상사가 다이아 목걸이를 선물

하냐?”

난 그 목걸이를 물끄러미 바라봤 다.

그래, 일순 황제 폐하께서도 내게 마음을 가졌던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능력 때문에, 내게 끌 리는 것처럼 착각한 순간이었을 테 다.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원래 높으신 양반들의 감정 이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 도 있다. 그런 것에 일일이 휘둘려 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 다. 어차피 어울리는 짝도 아니고, 나는 떠나야 할 몸이니까.

난 어쩐지 무겁게 느껴지는 목걸 이를 꽉 움켜쥐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 냥 내가 황제 폐하를 곁에서 모시는 얼굴이니까 그렇지.”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 지 마. 눈빛만 봐도 다 안다니까? 원래도 그랬지만, 테포다 원정 이후 로는 아주 그냥……,”

“어휴, 그만 하라니까!”

루아나와 티격태격하는 사이 단장 은 모두 끝났다. 다이아 목걸이를 목에 건 나는 긴 의자에서 몸을 일 으켰다.

“준비 끝났어요, 비뉴스. 어때요?”

문 앞에 검을 짚고 서 있던 그는 날 돌아보곤 그 옅은 색의 눈을 둥 글게 휘었다. 내 손등에 키스하더니 입을 열었다.

“언제나와 같이 아름다우십니다, 셀레스티아 님.”

이, 정해진 답변만 말하는 기계 같으니. 이러니 그의 평가로 신뢰가 가질 않는다. 하지만 그게 이 기사 님의 매력이다-

비뉴스는 이제 내가 가장 의지하 는 편안한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있 었다. 난 방긋 웃곤 그의 에스코트

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황제의 탄생일을 기리는 축제는 본디 일주일간 거하게 치러진다. 올 해는 거기에 황태후 반역의 건과 테포다와의 짧은 격전 이야기까지 보태져,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러운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 다.

여기저기 행상인들이 사람들의 발 을 잡았고, 악단들이 거리로 몰려나 와 경쾌한 음악을 연주해 댔다. 봄 꽃이 하늘하늘한 광장의 여기저기에 햇볕을 담뿍 받으며 몰려든 사람들 이 저마다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우 리는 그 사이를 화려한 궁정 마차를

타고 느긋하게 지났다.

“ 평화롭네요.”

“그렇습니다.”

“비뉴스는 축제를 구경하지 않아 도 괜찮아요?”

비뉴스는 언제나와 같이 올곧은 시선으로 대답했다.

“전 셀레스티아 님의 곁을 지키는 것이 가장 족합니다.”

“……그렇게 사무적인 대답 말고 요.”

“정말입니다.”

안 되겠다, 이 남자. 이러다간 평

생 연애도 못 하겠다. 일 중독인 건 지, 기사 체계가 사람을 망치는 건 지 모르겠지만.

내가 비서직을 그만두면 비뉴스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다시 배정이야 받더라도 잠시 휴가를 받을 수야 있 지 않을까?

“비뉴스.”

“ 네‘?”

“여러 가지로 고생 많았어요. 저 랑 함께 있는 동안에…… 사건이 많 았으니까요. 그리고 신분도 낮은 저 를 지키느라 주위에서 말도 많았을 텐데, 일까지 성실히 해 주고 항상

고마웠고요.”

“앞으로도 계속 곁을 지키고 싶습 니다. 제 능력이 부족합니까?”

“그런 게 아니라, 제가 그만둘 거 라서 요.”

그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들었습니다만…… 상 관없습니다. 계속 곁을 지키겠습니 다.”

너무 평이한 목소리로 말하니까 아주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 지만 내가 무슨 공주도 아니고. 평 민은 평생을 살아 봐야 목숨을 위협 당할 일 같은 거 그렇게 많지 않으

니까. 호위 기사를 달고 다닐 수도 없고, 그때가 되면 월급을 줄 여유 도 없을 거다.

그리고 애초에 황제의 비서에게 호위가 붙는 것도 평범한 일은 아니 다. 단지 내가, 나의 능력이 황제에 게 필요했기 때문에…… 내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황제에게 약점 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붙은 호위 였다.

나는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저 었다.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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