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살결에 닿는, 잘 정리된 침구의 기분 좋은 냄새. 황제 폐하가 직접 하사해 주신 폭신한 이불에 머리를 처박자 언제 불 비가 쏟아져 내리는 하늘 아래에 있었던가 싶게 편안하 고 아늑하고 몽글몽글했다.
가만히 엎드려 있는 사이에 마음 이 차츰 차분해졌다. 그래, 남들은 다 일하는데 나 혼자 놀고 있을 순 없다. 황제 폐하께서 일어나기 전 에 미리 봐 둘 일도 있으니까. 감 정적으로 굴어도 좋은 어린애도 아 니고.
난 가라앉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 다. 제 뺨을 두드려 정신을 차린 다
음 천장까지 닿아 있는 서가들 사이 에 놓인 테이블로 가 앉았다. 오늘 의 스케줄을 정리하다 보면 머리도 정리되리라. 난 야심 차게 노트를 펼쳤다.
아주 먼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나 벽 하나쯤을 사이에 둔 것처 럼 멀리서.
“다시 임명식이라도 할래?”
“미쳤군. 그 짓을 또 하라니, 차 라리 황제를 안 하고 말지.”
“또, 또! 그런 말을 들으면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 입장으론 기운이 빠진다니까. 그런 말 좀 하
지 마.”
이 목소리들의 주인은 황제 폐 하? 그리고 아마도 리온 티아헤브 공작님.
그리고 소리뿐만 아니라 달콤한 빵 냄새, 고소한 커피 향도 함께 났다. 하지만 눈을 떠서 확인할 수 는 없었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자 꾸만 아래로 처졌으니까. 정신이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것만 같았으 니까.
“난 솔직히 말해서 이런 반응일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민간에
서는 의외로 압도적인 지지던걸.”
“셀레스티아?”
“그렇다니까. 황제 폐하의 저주를 푼 평민 출신 여자라니, 완전 동화 가 따로 없잖아? 아무래도 국민들 입맛에 딱 맞는 정도의 가십거리겠 지.”
“……그 입맛이라는 것은 잘 모르 겠다만, 그래서?”
“그래서라니…… 아, 의회의 의견 은 아직 잘 모르겠군. 일단 그런 걸 물어볼 틈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 어느 때보다 황권이 공고해진 때잖 아? 이참에 콱 무력으로 밀어붙이면
다른 소리는 못 할 테니까.”
“그렇군.”
뭔가 답답하다는 듯 리온 공작님 의 목소리가 말했다.
“마음은 정한 거야? 지금이라도 다른 후보를 만나 볼 의향이 있다면 언제든……”
“아니. 그건 필요 없다.”
“그렇게까지 단호한 걸 보면 둘이 의사는 맞춘 거지?”
“아니.”
잠깐의 침묵 끝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청혼은 했어?”
“ 아니 /’
“그럼 약혼하자고 청하긴 한 거 지?”
“아니.”
“……뭐야, 도대체 뭘 했는데? 그 간 둘이 얘기할 시간 많았을 거 아 냐?”
아주 긴 한숨 소리.
“내 의견이고 뭐고, 저는 이제 떠 난다더군.”
“……아니, 뭐라고? 제대로 이야 기를 한 건 맞아? 이야기가 꼬인
거 아냐? 네가 이렇게 무뚝뚝하게 막 나오니까 얘기가 잘못 전달돼 서……-”
리온 공작님답지 않은 짜증스러운 어투에, 황제 폐하도 답답하다는 듯 한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설마, 달리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 거 아냐? 그 러니까 반려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부담스러워서……”
“다른 남자? 하, 다른 건 몰라도 그럴 걱정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해?”
“없다면 없는 거다.”
“어떻게 단언하냐고!”
고함을 끝으로 더 이상 대화는 들려오지 않았다. 잠결에 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 이 한 귀로 흘러들었다가 다른 귀로 빠져 나갔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를 생각하 는 사이에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 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포근한 침
대 위였다. 몸이 개운한 느낌이 썩 불길해서 깜짝 놀라 창밖을 쳐다봤 더니 해가 중천이다.
“……세상에, 대체 얼마나 잔 거 야?”
아니, 침대에는 또 왜 누워 있는 거람? 설마 또 황제 폐하가?
안 잘려고 일부러 테이블에 가서 있었는데, 혹시 졸더라도 그냥 곧장 일어날 셈이었는데.
나도 이제 세레나를 이해하고 있 었다. 이 일이 내게 충분히 자부심 을 주었고, 내 능력으로 따낸 직업 이기에 자랑스러웠고, 내가 모시는
상관은 충분히 내 시간과 충정을 쏟 을 가치가 있는 이였다. 나태하게 일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해 준 것 은 감사한 일이었지만, 왜 날 침대 에 눕혀서는……소
속으로 투덜거리며 몸을 급히 일 으키는데, 순간 잠결에 뭔가 중요한 대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꿈이었나?
하지만 꿈을 상기해 내려는 많은 노력들이 그렇듯, 뭔가 중요한 이야 기를 들은 기분이 들었지만 잠시 애 를 써 봐도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 었다. 그냥 정말 꿈이었겠지. 난 어 깨를 으쓱이곤 오늘의 일과를 해치
우기 위해 옆방으로 나섰다.
황제 폐하는 느긋하게 침대에 엎 드려 서류를 읽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라 서두르던 마음이 느 긋해졌다. 그가 날 흘끗 돌아보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일어났군.”
“제가 늦게까지 잤나요?”
“아니, 아직 나도 옷도 안 입은 참이다.”
그건 보면 안다. 누가 봐도 벗은 상체니까. 그러고 보면 이제 상처 랄 것도 없다. 그는 나와는 달리 마법도 잘 듣는 몸이고, 신체의 회
복력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일도 할 수 있다. 이제 부효과에 대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정말로 이제 내가 그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오히려 내가 그를 걱정하는 게 우스운 일이 되었 다.
내가 아니어도 정말이지 상관없으 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네?”
분명 서류에 코를 박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날 쏘아보고 있었
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 가시죠.”
“그래.”
황제는 한숨을 쉬곤 몸을 일으켰 다.
그날부터 이후로 일주일간은 황궁 안을 정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야만 했다.
종기처럼 불편하기만 하던 황태후 세력이라고 모두를 극형에 처해 버
릴 수는 없다. 반역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참작하여도 황태후나 되는 황족을 참수하는 데에는 또 의견이 분분하였고, 거기에 막시의 처우까 지 결정하려니 이만저만한 일이 아 니었다.
거물들의 처우뿐만 아니라 사소한 논공행상은 끝도 없었다. 황제 폐하 가 아예 귀족들의 참전을 막아 버린 것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영지 배 치라도 새로 해야 했을 정도로 다들 말이 많았다.
황태후 파였던 귀족들도 뻔뻔하게 얼굴을 내밀고 그 모든 일들에 참여 해 댔기에 일은 더 복잡했다. 게다
가 새로 편입한 영토의 분배와 방비 이야기까지 붙었다. 테포다 제국과 의 은원 문제도 남아 있었다.
가까스로 시간을 내어 사미디온의 얼굴을 잠깐 보러 다녀올 수 있게 된 것이 신기할 정도로 바빴다.
사미디온의 곁에는 황제가 붙여 준 간병인이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 들은 날 보고 꾸벅 인사하곤 물러났 다.
“사미 디온!”
“……누나!”
사미디온은 날 보고 달려와 안았 다. 난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
섰다. 병증이 퍽 완화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들었다. 불치병이 라곤 하나, 그래도 꾸준히 약을 먹 고 치료받기만 하면 괜찮은 것이 또 그의 병이었다.
하지만 달린다고?
팔다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 라, 근본적인 근육에 퍼진 질병이기 에 분명 제대로 걷는 것조차 불가 능했었다. 그래서 심장의 근육이 제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숨이 줄곧 가빴고, 곧 죽을 것처럼 힘들어했었 다.
그런 사미디온이 뛰다니
난 눈물이 왈칵 솟아서 그 자리 에서 사미디온을 껴안고 울음을 터 뜨렸다. 사미디온도 목이 메는지 뭐 라고 더 말을 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꺼이꺼이 울었다.
“너는…… 이렇게 많이 나았으면 나한테 말을 하지!”
“누나가, 누나가 살아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떻게 말을 해? 누나가 죽었을까 봐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 줄 알아?”
한참을 우는 동생을 보고, 난 내 가 납치되었던 시점부터 줄곧 걱정 을 끼쳐 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는 한참을 울고서야 겨우 눈물을 그 쳤다.
난 민망함에 사미디온의 붉은 머 리칼을 마구잡이로 흩트려 놓곤 웃 었다.
“이제 그런 일 없을 거야. 납치당 하고 그런 거…… 중요한 사람만 당 하는 거잖아? 이제 그냥 평범하게 살려고. 이제 우리 둘이서 다시 떠 나자.”
사미디온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 다는 듯 눈을 깜박거 렸다.
“떠난다니?”
“비서 일 그만두려고.”
“그만둔다고? 하지만, 누나는…… 비서 일을 하려고 그렇게 고생한 거 잖아? 아카데미도…… 그 멍청한 귀 족들 사이에서 눈총을 견디면서 다 니고.”
“그렇긴 한데…… 이제 됐어.”
사미디온이 눈알을 떼구루루 굴리 더니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또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침대맡에 주저 앉은 사미디온이 고함을 치듯 말했 다.
“되긴 뭐가 돼? 또, 또 나 때문이 야?”
“ 뭐?”
“또 나 때문이냐고. 누나는 항상 나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다 포기하 잖아. 나 때문에 그런 멍청한 세렝 게반 이후로 누굴 만날 생각도 못 한 거잖아? 이제…… 이제 드디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파서…… 내가 아파서 그러 지?”
울어서 퉁퉁 부어 있는 사미디온 의 눈을 보니까 가슴이 시렸다. 항 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사미디온.”
“그럼 뭔데!”
“누나가…… 있으면, 새로 올 황 제 폐하의 비께서 입장이 난처해 져.”
“……뭐?”
“나도 이 비서 자리가 너무 좋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황궁에서 입는 비서 제복이 얼마나 예쁜지 알아? 빳빳하게 풀을 먹여서 다린 옷을 입 으면, 정말 그럴듯한 직분이라도 얻 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그러면 누나…… 그냥 버티면 안 돼?”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러면 안 되 는 줄 알면서. 넘보면 안 되는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쯤은, 우리가 고아 원에서 자랄 때 이미 알았는데. 너 무 많이 잘 알았는데. 포기하지 않 는 법보다 포기하는 법을 훨씬 더 잘 알면서 자랐는데…… 요즘 그걸 잊고 살았나 봐. 나도 억울해. 그런 데 상황이 이렇게 된 걸 어떻게 해?”
“……누나.”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미디 온이 오히려 나를 위로하듯 토닥여 주었다. 눈물이 도무지 그치지 않았 다.
“너한텐 여기가 썩 좋은 환경이었 는데, 미안해.”
“……아냐! 하지만 누나, 소문에 는 누나가 황제 폐하의 반려라 고……, 그리고 사람들이 다 정말 좋은 이야기라고 하는걸? 그러니 까……-”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수록 내가 더 방해가 되는 거야.”
“ 왜?”
“황제 폐하에겐 당연히 어울리는 반려가 있는 거잖아. 나에 대해서 그렇게 말해 주신 건 그냥…… 정치 적인 거야. 납치당한 비서를 갖고 놀다가 죽여 버릴까 봐, 그게 걱정 되어서, 잘 대해 주라고 그렇게 말
도 안 되는 발표를 해 주신 거야. 정말 상냥하시지? 그러니까 나는 아 무도 원망할 수 없어.”
사미디온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누나, 알았어. 누나가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떠나도 괜찮아.”
“응. 대신에…… 누나 이제 졸업 장 있으니까, 그리고 황실 경력이면 어디서든 밥은 굶지 않겠지.”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