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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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소란스럽게 해 드려 죄
송합니다.”
“아닙니다.”
“자꾸 비서님과 아는 사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해 대서 말입니다. 혹 시 몰라서 여쭙습니다만, 설마하 니…… 역시 아니겠지요?”
나는 빨리 포승줄을 풀어 달라는 듯 묶인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대 는 세렉을 빤히 바라봤다.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고 싶었 다. 무엇을 해도 아깝지 않았지만, 가진 게 없어 내 능력을 모두 주려 했었다. 하지만 그는 뒤로 다른 여
자를 만났고, 나를 경멸했고, 노예로 팔아넘 겼다.
그런 그를 내가 아냐고? 아니, 권 력의 맛을 보기 시작하면서 딴판으 로 달라진 세렉은 내가 알던 세렝게 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나는 그를 모른다.
난 차갑게 말했다.
“아니. 모릅니다.”
“셀레스티아……? 셀레스티아! 저 기, 잠깐만! 왜 그렇게 말하는 거 야? 농담하지 마!”
“모른다고 하시잖아! 정말 시끄러 운 놈이군. 빨리 걸어!”
“셀레스티아! 셀레스티아! 잠깐 좀 있어 보라고!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이렇게 나올 거야? 너, 나 없인 못 살잖아! 못 살잖아!”
이제 그에게 남은 거라곤 하나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도 남아서 정말 잘됐다.
나는 질질 끌려가는 세렉의 뒷모 습을 일별하고 자리를 옮겼다.
하루 만에 난장판이 된 성을 쓸 고 닦고 되돌려 놓아야 했다. 밤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큰 사건에
휘말렸던 식솔들이지만, 누구 하나 불평 없이 제가 맡은 일을 시작했 다.
그들에게도 성의 주인이 큰 위기 를 겪어 내고 다시 당당히 돌아온 것이 큰 기쁨이자 자랑이었으리라.
내게도 그랬다.
나도 제대로 자지도 못한 상태였 지만 어쩐지 밤새 겪은 일에 대한 흥분과, 돌아왔다는 고양감에 심장 이 뛰어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창을 열어 환기하고, 쓸고 닦고 광내고 새로운 요리 재료를 손질하 는 등의 사소한 일로 소리 없이 많
은 일손이 움직이는 사이를 지나 얼 른 내 방으로 올라갔다.
황제의 바로 옆방. 그곳이 나의 공간이 었다.
내 방은 주인이 떠나 있는 동안 에도 아주 잘 정돈되어 있었다. 쌓 인 먼지 하나 없었다.
황제가 오갔을까?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책이 더 널브러져 있었고, 어린 시절 사진 액자가 가운데 탁자 에 올려져 있었다.
난 기쁜 마음으로 오랜만에 마주 하는 비서 제복으로 갈아입곤 머리 를 틀어 올렸다. 나도 기운 내서 이
모든 것의 정상화에 힘을 써 볼 참 이었다. 떠날 땐 떠나더라도 지금은 지금 할 일을 해야 했으니까.
오늘의 할 일을 대강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의상을 골라 주는 시중은 따로 있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 아니 던가? 모처럼이니 새 의복을 골라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틀림없이 오늘은 의회의 대거 물갈이로 인해 하루 종일 시끄 러울 테다.
점심 즈음에 소집될 테니 그 이 전에 제대로 식사하실 수 있도록 하
고, 가능하다면 잠깐 눈을 붙일 시 간을 만들어 드려야겠다. 일단 폐하 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나서 전체 스케줄을 조정해야지.
기합을 넣고 황제 폐하가 머무는 방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방과 방 이 문 하나로 이어져 있어, 내가 드 나드는 것은 시종이 일일이 보고해 주지 않으니 내가 스스로 말하고 들 어가야 한다.
“황제 폐하, 폐하의 비서 드옵니 다.”
“그래, 들라.”
대답이 있는 쪽이 더 별난 일이
다. 보통은 그냥 답이 없어도 드나 들라고 하셨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황제는 창가 에 기대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환복하는 사이에 그는 씻고 나온 모양이었다. 검은 머리칼이 물에 젖어 착 가라앉 아 있었다.
그가 예를 차리는 걸 그리 좋아 하지 않는다는 건 뻔히 알고 있었지 만, 오랜만에 황제의 방에서 마주하 는 거다.
조금 감회에 젖어 무릎을 굽혀 인사해 보이자 그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오늘의 일정 말입니다, 폐하.”
“이리 가까이 오라.”
내가 한 발짝을 옮기고 그를 빤 히 보자, 그가 손을 다시 까딱거렸 다. 나는 다시 한 발짝 더 다가가서 멈춰 섰다.
단둘이 있는 방에서 그의 곁에 가까이 있는 건, 내겐 솔직히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다. 그가 어떻게 할까 봐 무서운 건 아니다.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구름 위의 존재처럼, 모두가 하는 방식으로, 닿지 않을 완벽한 존재에 대한 동경만을 가지고 싶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선 그가 괜한 농을 던 지거나 내게 닿거나 하면, 그것과는 조금 다른, 소모적이고 쓸데없는 감 정에 휩쓸릴까 무서웠다.
“그래서 오늘의 일정 말입니다 만……
“가까이 오라는 게, 그대에겐 싫 은 일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폐하.”
“그럼 내가 가지.”
황제는 키도 크고, 전체 신장 대 비 다리도 길다. 성큼성큼 몇 발짝 떼 놓지도 않아 그는 금방 내 앞에 있게 되었다.
바로 앞에 선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야 지칠 만도 했으니까. 전장에서 귀환한 뒤 밤낮을 꼬박 황태후와의 일전에 소모한 셈이었 다.
일정이니 뭐니 하려던 이야기들이 다 쏙 들어갔다. 그는 지친 곰처럼 몸을 구부려 나를 안았다. 이제 저 주가 풀렸을 텐데도 그의 몸은 뜨끈 뜨끈했다.
잘못 느꼈나 싶어 황제의 등을 옷 위로 슬쩍 만지자, 손에도 열감 이 금방 묻어났다.
“폐하, 혹 몸이 안 좋으십니까?”
그는 대답 없이 한참을 내 어깨 에 코를 박고 있었다. 나도 더 이상 그를 채근할 수 없어져서 그대로 그 의 품에 안긴 채로 가만히 서 있었 다.
“그럴 줄 알았어.”
“뭐가 말씀이십니까?”
“내 비서는 시원하니까.”
“……무슨 사람을 냉각제 취급하 십니까.”
“실제로 그렇잖아.”
“약은 챙겨 드셨을 터인데도 이렇 습니까?”
“이렇게 힘을 많이 쓸 줄 알았다 면 몇 알 더 주워 먹었을 텐데. 좀 오버하긴 했나 보지.”
“……폐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긴 했 지만, 또 그 지긋지긋한 괴로운 감 각을 맛봤던 걸까 싶어 염려가 앞섰 다.
날 안고 있는 큰 덩치의 황제의 어깨에서 망토를 떼어내고, 윗옷 아 래로 손을 넣어 등을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저 마 법의 과잉 사용으로 몸이 지나치게
지치고 열기가 있을 뿐, 상처가 나 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 폐하.”
“이 목소리가 이렇게 부르는 걸 들으려고 황제 하는 거겠지.”
그의 느긋한 목소리에는 웃는 듯 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걸 듣고 누가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나도 사람이다.
심장께가 둔탁하게 아팠다. 듣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라고 저렇게 말하는 걸까?
난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시고, 그렇게까지 몸이 안 좋으시 면 눈을 좀 붙이십시오. 그럴 정도 의 시간은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 다.”
“지금 누우면 앞으로 이틀은 내리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 나?”
약한 소리를 하는 법이 없는 황 제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그 정도로 몸이 안 좋으십니까? 그렇다면 의회 일정을 조율하고 담 당의를 불러올리겠습니다.”
“셀 레스티아.”
“……네?”
“내 비서는 입을 쉬는 법을 모르
는군.
걱정되니까 그러지. 난 입을 비죽 이며 더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안 그래도 이 상황이 어색한데, 침묵까지 찾아들자 괜히 숨이 막혔 다. 말로 정적을 메우는 것이 더 좋 다. 생각할 공백을 두고 싶지 않은 데.
하지만 의식하면 안 된다, 하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이미 글러 먹은 거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다 들릴 것 같다.
그가 손을 들어 내 머리칼을 쓰 다듬었다. 묘하게 손짓이 부드럽다. 이런 식으로 그가 나를 만진 적이 있었나?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강한 예감이 머릿속을 두드려 댔다. 그는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드디어 조용해졌군. 셀레스티아, 기억하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순서가 바뀐 것에 대해서, 내가 말했었지.”
분명 그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
다.
“네게 먼저 물어야 할 것을 다른 자들에게 먼저 물은 것이 있어 그리 말한 거였다. 그것은……/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화첩 들이었다. 가까이서 들여다보지 않 아도 그것의 용도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갖은 보석을 써서 표지를 장식한 것도, 다채로운 채색을 한 것도, 양 피지를 아낌없이 쓴 것도 웬만한 용 도의 책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호화 로운 구성이었으니까.
황제의 비 후보를 고르기 위한 목적의 화첩임에 틀림없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는 것에 심장이 왜 이렇게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걸까? 이상한 것은 저 책이 아니라 내 쪽 이다.
황제 폐하가 뭐라 더 말을 잇기 전에 나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 다.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몸을 똑바로 세웠다. 난 의 아할 정도로 속이 가라앉았지만, 얼굴에 티 내지 않고 가볍게 웃었
다.
왜 그러냐는 얼굴로 날 보는 황 제와 시선이 마주치자, 난 빠르게 말을 주워섬겼다.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점심 식사 이전까지 주무실 수 있도록 조 처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황후 후보 에 대해서 그동안 검토하신 부분을 제게 알려 주신다면 연락을 취하여 일정을 잡겠습니다.”
붉은 눈동자가 사납게 날 쏘아보 았다.
“……셀레스티아, 그 좋은 머리로 왜 그렇게 행동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군.”
“어떤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금 싫다는 것을 억지로 끌어안았나? 내 의도를 몰라서 그 대로 안겨 있었던 건가? 나는 그대 가 제대로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 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모르겠고, 알아듣고 싶지도 않았다.
“주무십시오. 물러가겠습니다.”
“셀레스티아!”
“오늘은 마법을 많이 쓰셨으니 절 껴안으신 거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미 제가 그리해도 좋다 말씀드린
부분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만두 기 전까지 앞으로 이런 일은 다시 없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기가 막힌다는 듯한 눈빛이 날 쏘아보고 있는 줄 알면서도, 나는 지금 물러나면 무례하다는 것을 알 면서도 더 이상 거기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려 내 방으 로 돌아와 버렸다.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그는 날 쫓아오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난 그가 내 몸을 껴안았던 감촉을 잊으 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기를 몇 번 반복해야 했다.
사죄라도 하러 가야 할까 생각해
봤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점점 생각이 복잡해지기만 한다.
아, 몰라. 그냥 내일 생각하자.
결국 침대에 풀썩 엎드려 버렸다.
쓸데없다. 처음부터 감정이라는 것은 내 인생을 망가뜨리기만 했다. 그래서 괜한 생각과 깊어진 감정으 로 삶을 더 꼬아 놓고 싶지 않았다. 난 부러 생각을 잘라내며 눈을 감았 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