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아군 마법사들이 막아 내기에 어 려움이 없는 규모였다. 스쿼드론은 방패를 앞으로 세우고 그 뒤에 몸을 숨긴 채로 방어막을 만들었다. 하지 만 우리의 대비를 조롱하듯 그 수많 은 화살들은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 낸 황제를 찾아 집요하게 방향을 틀 었다.
디펜더를 거느린 황제를 본 스쿼 드론 부대들은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다는 듯 완전히 놓이지 않은 다리를 억지로 이어 그 위를 달렸 다.
황궁 안으로 먼저 진입한 그들 중 일부가 다리를 완전히 내려 주었
고, 황제군은 물밀듯이 안으로 밀어 닥쳤다.
쾅! 콰광! 화살들이 성벽에 자꾸 만 부딪쳤지만 황제는 귀찮다는 듯 그것과 같은 수의 화살을 만들어 허 공에 뿌리더니, 그것들을 하나하나 격돌시켰다.
그냥 방어막을 만들어도 될 것을, 정말 어지간히 마력이 넘쳐 흐르신 다.
괜히 튕겨 나간 화살에 다른 자 가 맞지 않길 원하는 걸 수도 있지 만, 저건 그냥 마력의 낭비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보통은 저런 걸 시 도하려는 생각조차 못 하니까.
황태후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 그 녀는 기가 막힌지 주먹을 꽉 움켜쥐 고 허공을 내리쳤다.
“분명, 한계에 달했을 텐데!”
“저주에 걸렸으니까? 우습기 짝 이 없군. 왜, 그렇게 내 저주를 홍 보할 셈이면 누구 때문에 그 저주 가 생겼는지도 같이 홍보해 주지 그래?”
황제가 몸을 가볍게 띄워 성벽에 서 출발해 테라스에 발을 디뎠다. 그를 막으려고 달려드는 황태후의 호위병들은 디펜더들이 맡았다. 황 제는 불나방처럼 앞을 가로막는 몇
의 병사들을 손가락을 튕겨 날려 버 리곤 마침내 황태후의 앞에 가서 섰 다.
내가 선 곳에서 둘이 마주 본 모 습이 보이는 것이, 마치 하나의 극 을 관람하는 것처럼 묘하게 보였 다.
“슬슬 깨달았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린 황제가 손을 뻗 어 황태후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었 다. 제국의 황태후라고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민심은커녕 그녀를 살려 둘 수 있을 최후의 명분조차 사라진 상태다.
황제가 그녀의 목을 감아쥐는 것 을 보고도 어떤 병사도 놀라지 않았 다.
“도대체 왜……, 왜 아직도 똑바 로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이 정도 로 마력을 썼는데?”
황제의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지쳐 보였다.
“미안하지만 저주는 사라졌다.”
“지금 뭐라고……?”
“너와 테포다의 황제가 내게 선물 해 준 그 지독한 저주가, 나를 여기 까지 이끌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다지도 마법에 집착하지도 않았을
터. 생에 집착하지도, 황제 자리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살아남고자 노력 하지도 않았을 테지. 하지만 조금도 감사하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 뭐라고……?”
“저주는 사라졌다고.”
황태후의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그게 그녀의 마지막 패 였을 테니까.
“정말인가? 어떻게 그런 게 가능 하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어 떻게? 다른 나라의 수장과 손을 잡 는 멍청한 짓을 도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러니 이렇게 배신을 당하 는 거다.”
황태후는 테포다의 원조를 기대한 것까지 읽혔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 의 명백한 패배였다.
“네 눈으로 똑똑이 보아라. 이것 이 네가 만든 결과다.”
황제의 손이 가리킨 방향을, 황태 후와 막시가 바라보는 방향을 모든 병사와 내가 함께 바라보았다. 여명 이 밝아 오는 지평선에는 아른거리 는 형체가 있었다.
황제가 합류를 원치 않아, 병력을 끌고 오지 못하고 단출한 집단으로
달려온 수많은 귀족들이 깃발만을 휘날리며 수도 한쪽에 나란히 정렬 하고 있었다.
그 깃발 하나하나가 귀족 한 명 을 뜻했다. 수십, 수백을 족히 헤아 릴 수많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황제의 명령 하나만을 기다리며 일 렁이는 깃발들을 본 황태후가 조용 히 눈을 내리감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입도 한 번 열 지 않고 있던 막시는 투신이라도 할 듯이 테라스 난간 쪽으로 몸을 내밀 었지만 뛰어내리지는 않았다. 그저 거기에 서서 휘날리는 깃발을 응시 하고 있을 뿐이었다.
황태후는 제 아들의 등을 한번 바라보곤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어차피 내가 여기서 물러난다 한 들, 황제 당신의 그 어리석은 사랑 놀음이 제국을 갉아먹을 텐데.”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 았다. 출신이 천한 내 이야기를 하 고 있는 거다. 진짜 반려를 들일 때 내가 얼마나 걸림돌이 될지 그 이야 기를 하고 있는 거다.
황제가 거기에 뭐라고 대답을 하 는 것 같았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 다. 내가 있는 쪽에서 들리는 말은 거기까지였다. 마법을 해제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황태후를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달려 나온 병사들이 황태후와 막시를 구 속했다. 둘은 창과 칼을 든 병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그대로 테라스에서 퇴장했다.
그것이 황태후 파가 그나마 전의 를 가지고 있을 수 있던 마지막 순 간이 었다.
텅! 채챙-!
무기를 집어 던지는 소리, 마법 지팡이와 수정구를 던지듯 내려놓는 소리가 일제히 울렸다. 황태후 측의
병력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손을 머 리 위로 올렸다.
황태후와의 지루한 일전의 끝이었 다.
모두에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을 테다. 불덩이가 하늘을 수놓았었다.
승리의 향방이 결정되자, 대피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대피시킨 뒤임 에도 크게 함성 소리가 울렸다. 혹 시나 몰라 가슴을 졸이고 있었을 수 많은 귀족들과 사병들도 깃발을 휘 둘러 대며 현 황제의 공고한 승리를 기뻐했다.
황제가 황제의 자리로 돌아간다.
단순히 그뿐인 것이 오늘은 이다지 도 힘들었다.
그 비서의 사직서
잔존 세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내 부를 모두 정리하기 전까지 비전투 인원은 성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처되 었다.
전투 병력이 모두 성내로 향하는 것을 보며 나는 세레나와 루아나를 비롯하여 황성에서 일하는 동안 함 께 지냈던 이들이 있는 쪽으로 얼른 달려갔다.
시종장은 날 보고 환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우리를 배신한 일을
잊지 못하겠는지 그저 멀찍이서 인 사를 올릴 뿐이었다. 세레나가 내게 다가와 날 품에 꼭 끌어안았다. 다 행히도 모두들 다친 곳은 없는지 안 색이 밝았다.
“모두 무사해요? 다친 데는 없 고?”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모두 무사하답니다.”
“다행이에요. 왜 존대를 하고 그 래요, 세레나.”
세레나는 팔을 풀더니 생긋 웃었 다. 장난인가 했는데 아니다. 언제나 엄하게 날 꾸짖던 그 얼굴이 아니었
다.
“그러는 셀레스티아 님이야말로 존대를 거둬 주십시오.”
“왜 그러세요, 이상하게.”
“이제 황제 폐하의 곁에 계실 몸 이 아닙니까?”
이게 다 그 선전 포고의 영향이 다. 승전기를 앞세우고 행진해 올 때도 시가지에서 ‘황제 폐하의 반려 만세’니 뭐니 하는 말을 듣고 얼마 나 얼굴이 빨개졌는지 모른다.
아무리 다 나를 구하기 위해서 한 조처고, 나로서는 그 정도로 감 싸 주었던 것이 정말로 감사한 일이
기는 하지만, 후폭풍이 잘 감당되지 않는다.
“아하하그건 다 그냥 한 소 리예요. 세레나 님도 예상하셨을 거 아니에요.”
“저는 그저 황제 폐하의 말씀에 따를 뿐인걸요, 셀레스티아 님. 그보 다 테포다 제국에서의 일을 들려주 시겠어요? 이런 미천한 저에게라도 괜찮으시다면.”
“하하, 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죠?”
세레나 님이 원칙 주의자인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못 말
린다.
난 동이 완전히 터 올 때까지 루 아나와 세레나, 그리고 다른 시녀며 하녀, 궁내 일꾼들과 즐거이 이야기 를 나누었다. 각자 제가 겪었던 큰 모험에 대해 말하고 싶어 안달이었 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도 어쩌다 반 려가 되었냐느니, 이미 다 알고 있 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자꾸 걸어 왔지만 난 모르쇠로 일관했다. 괜한 오해가 더 퍼져 봐야 좋을 게 없었 다.
해가 완전히 다 뜨고서야 내성으 로 진입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
고, 우리도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성 앞 다리를 건넜다. 해자도 새삼스레 바라보게 되었다.
해자는 드물게 실제로 흐르는 강 으로 만들어져 있다. 바로 옆의 큰 강에서 빼내 온 지류로 만들어져 있 어 성을 한 바퀴 둘러 흐르는 구조 다.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깊은 바닥에 맑은 물이 가득 흐르고 있었 다.
이런 성을 상대로 공격한다고 생 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소모전으로 번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다리를 건너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 앞마당 바닥에 무릎 꿇려진 마법
사와 병사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중형을 면하긴 어려울 거다. 골디나 출신이 많을 것이 뻔 하지만 불쌍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꼰 제 인생이다. 황 제에게 반하는 게 쉬울 줄 알았을 까?
“이거 놔라! 무엄하게도 내가 누 군 줄 알고 이렇게 포승줄 따위로 날 속박한단 말이냐! 이 몸은
그냥 스쳐 지나갈 셈이었는데 문 득 익숙한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 렸다. 보리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띄 었다. 악을 쓰며 질질 끌려 나가고
있는 저 남자는 틀림없는 세렝게반 이다.
정말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이다. 마법 규모에 비하여 양측의 사상자 수가 현저히 적었던 싸움임에는 틀 림없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죽 고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어찌 저 자식은 생채기 하나가 없을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세렝게반이 내 쪽을 바라봤다.
“셀레스티아! 셀레스티아, 내 말 좀 들어 봐! 셀레스티아!”
바둥거리는 세렉의 하찮은 힘을 쉽사리 제압하고 포승줄을 묶고 있
던 병사가 창 손잡이로 그를 콱 찔 렀다.
“어디서 감히 그 입으로 비서님의 이름을 부르는 거지?”
“큭! 네놈! 이 일은 내 잊지 않 으리라! 셀레스티아, 나야! 세렉이 라고! 셀레스티아! 내가 널 구해 주려다가 이렇게 됐다고! 황제가 널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아서, 내 가 널!”
염병하고 자빠졌다. 구하긴 누가 누굴 구해?
처음에는 내 목숨을 내놓아도 아 깝지 않을 사랑이었던 그는, 언젠가
는 내 전부였고, 언젠가는 내 거대 한 원수이자 잊지 못할 복수의 대상 이었다. 하지만 황궁에 온 뒤로 그 를 마주칠 때마다 세렉은 너무 사소 했고, 그를 떠올리면 그저 수치스러 움이나 창피함이 조금 돋아날 뿐이 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대답할 용기도 나지 않아 이마와 눈을 손으로 가렸 다. 어째 기세가 등등해진 그가 더 큰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셀레스티아! 이봐, 병사. 내가 정 말로 저 여자를 안다니까 그러네. 저 여자랑 나랑 죽고 못 사는 사이 라니까? 정말이지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나중에 그러다 크게 경을 칠 거…… 크윽!”
“셀레스티아 님이 너와 그런 사이 라니, 웃겨서 말이 안 나온다. 거, 마법사 양반. 정신 못 차린 것 같은 데, 저분은 황제 폐하의 반려라고. 알아들었냐? 경을 칠 소리 하고 앉 았네. 철창에 들어가 보기도 전에 목부터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말조 심하지?”
“아니, 정말로 아는 사이라니까!”
아락바락 질러 대는 소리에 주변 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것이 느껴 졌다. 나는 언제까지고 모른 척할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내 눈을
가린 손을 치웠다.
포승줄을 다 엮고 세렉을 돌려세 우던 병사와 내 눈이 딱 마주쳤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