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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83화 (83/103)

- 83화

“만세 — !”

무슨 소리지?

문득 발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황성 쪽인 것 같긴 한데 도대체 어 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잘 못 들은 걸까?

“황제 폐하 만세-!”

귀에 익은 목소리가 선창을 하자,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다른 목소리들이 따라 외치는 소 리가 들렸다. 어디지?

“비뉴스.”

“ 네.”

“이 소리가 어디서 나는 거죠?”

“아무래도 다리 쪽 같습니다.”

다리라니. 다리는 올려져 있질 않 았나? 아니다, 그것은 다시 천천히 허공을 가로질러 완만한 각도로 내 려오고 있었다.

아직 채 다 내려오지도 않은 다 리 위를 이미 걸어 나오고 있는 무 리가 있었다. 그 선봉에는 시종장이 횃불을 손에 거머쥐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시종과 하녀들이 서 있었는 데, 멀리서 보아도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병사를 섞어 놓았던 거구나. 속으

로 절로 신음이 흘렀다. 폐하가 굳 이 이렇게 어려운 싸움 방식을 택한 이유는, 최대한 많은 식솔을 살려내 기 위해서라는 것이 차츰 이해되었 다.

우리 진영에서 스쿼드론 한 개 부대가 다리가 이어지는 쪽으로 마 중을 나섰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모두 이해되었 지만 시종장이 선봉에 있다는 게 가 장 의아했다. 짐작 가는 구석이라면 있었지만, 황제 폐하께서 그리하셨 을 리 없는 일이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 인질에

대한 선례를 만드신 건가?”

“뭐, 그렇습니다.”

내 혼잣말에는 의외로 대답이 돌 아왔다. 막사 안에서 고개를 내민 리온이었다. 눈을 마주치자 싱긋 웃 은 그는 말을 이었다.

“인질로 협박하는 자에게 넘어가 주지 않는다는 것이 폐하의 방침이 셨습니다만, 이번에는 랑그샤를 구 해 낼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게다 가……-”

“랑그샤라면 시종장의 부인이잖아 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시종장을 써먹을 수 있는 패로 만들려면 랑그

샤가 필요했으니까요.”

이렇게 전략적 판단에 의해서 구 해낸 거라면 구출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대체 누가 납치한 거였죠?”

“제국의 기사를 빌미로 정치적 요 구를 하는 멍청한 집단이 어디에나 있을 리 없질 않습니까?”

설마 그것까지 황태후가 한 일이 라고?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자 리 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지런한 적은 귀찮은 법입니 다.”

“기가 막혀서. 황제의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다 손을 뻗어 놓고 제 게 도움을 청하기만을 기다렸다니. 어쩜 사람이 그렇게 간교할까요?”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걸 들어줬 나요?”

새까만 머리를 쓸어올리며, 그의 파란 눈이 방긋 웃었다.

“그건 아니고, 다 죽였습니다.”

그 황제에 그 신하다. 황제와 친 우라는 데에서 이분도 이미 어지간 한 분이 아니시란 것 정돈 짐작했지 만, 어휘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다리는 거 의 다 내려왔고 여기저기에서 외치

는 구호는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성벽 위에 있던 인질들의 목에 창과 칼을 겨누고 있던 병사들은 대 부분 인질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없 었다. 아마 인질 쪽에게 반격을 당 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황태후는 제가 만든 인간 병기들의 충성은 살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황성 내 식 솔의 충성은 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인질들이 가장 염려되었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좌를 되찾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것 은 너무 큰 욕심이라는 것쯤은 안 다. 하지만 싸우기 위한 마법사나 병사가 아니라 황궁을 위해 일을 도

맡아 하는 이들의 목숨을 앗고 싶지 는 않았다.

하지만 다리가 막 연결되려고 하 는 그때, 허공을 뚫고 날아온 창 하 나가 다리의 끄트머리에 박혔다.

동시에 하늘에서 쏟아지던 불의 비도 멎었다.

테라스에 선 막시와 황태후가 보 였다. 그녀가 믿었던 것이 식솔들을 인질로 삼는 것이었다면, 이제 한풀 기가 꺾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 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선 그녀가 입을 열었 다.

“그 자리에 서서 모두는 들으시 오. 이제 황제의 목은 바닥에 떨어 질 것이오.”

마법의 힘으로 온 전장에 전달되 는 그 말은 꽤 제멋대로의 내용이었 다.

황제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아도 그의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붙어 있는 남의 목 가지고 농 담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겠지.

“모두 들으시오. 저 황제는 저주 에 걸려 있소. 마법을 쓰면 그 마법 의 부효과가 되돌아와 그 몸을 집어 삼킨다고 하오.”

한밤중의 연설은 민중이 아니라 병사와 측근들을 향한 것이리라. 저 주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을 리 없 던 병사들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 다.

“황제가 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 소? 그가 혼자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 때문에,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 때문에 남색을 한다는 말까지 돌 았던 황제요.”

정말, 저주에 걸린 걸까? 그런 의 문이 담긴 시선들이 일제히 황제를 향했다가 흩어졌다.

“다만 나는 알리고 싶을 뿐이오. 모두는, 그렇게 나를 배신하면서까 지 섬기는 황제가 어떤 처지에 있는 지 알 필요가 있을 테니까. 나마저 없다면 이 사태를 바로 잡을 이가 누가 있겠소?”

황태후는 시종장이 있는 쪽을 매 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긍정을 대 신한 황제에 술렁거리는 소리가 여 기저기로 퍼져 나갔다.

멀리서도 황태후의 미소가 보일 것만 같다.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

한 이를 섬길 셈이오? 그래서는 이 제국의 존속마저 위험에 처하고 말 것이오! 그대들은 잘 듣고, 제대로 판단하시오!”

다리를 넘어 금방이라도 합류할 듯 보이던 성내 식솔들의 무리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황태후의 말이 진실인지 판단해 보려는 모양이었 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통쾌히 웃는 목소리는 황태후의 것이 아니었다. 듣기 좋은 저음의 큰 웃음소리는 황 제의 것이었다.

황제는 때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 을 흘리며 어깨마저 들썩였다. 고개 를 든 그는 정말 우스운 것을 들었 다는 듯한 목소리로, 느긋하게 말했 다.

“하, 너무 웃었더니 배가 아프군. 황태후, 그대도 참 재밌는 사람이 오.”

“ 뭐요?”

“다 좋은데 그대가 모르는 게 있 소.”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하시 오.”

“저들이 내가 금방 죽을까 봐 두

려워할 것 같소? 황제가 금방 죽는 게, 이 나라에 조금이라도 타격이 있을 것 같소?”

“……당연한 것 아니오? 국가가 곧 황제요, 황제가 곧 국가이니.”

드디어 돌아 버렸냐는 어투로 대 꾸하는 황태후에게 황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거 보시오. 그러니 황태후 그대 도, 막시도 이 자리를 탐내는 게 아 니오?”

황제는 한 박자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죽어도 이 나라는 아무렇지

도 않을 거요. 지금이야 막시가 있 으니 다른 황위 계승권자가 나서지 않지만, 얼마나 숨겨진 방계의 자손 이 많소? 게다가 뭐, 정 계승권자가 안 보이면 적당한 공작 하나를 뽑아 다 앉히면 될 것이고.”

내 옆에 있던 리온의 얼굴이 새 빨개졌다.

“저 자식이 또 함부로 말을 지껄 여? 무슨, 공작을 뽑아다 황제 자리 에 앉히는 법이 어딨어? 누굴 반역 자로 만들려고!”

함부로 지껄이고 있는 리온을 보 며, 역시 유유상종이라는 말밖엔 떠 오르지 않는다.

황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들의 충정이 나 개인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저들 이 충성을 바치는 것은 내 무력도, 나의 핏줄도 아닌 나의 정당함이 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요?”

“그대도 알다시피 내가 그대를 죽 이고자 했다면, 진즉에 그대는 죽었 소. 알지 않소? 뿐만 아니라, 여기 에 있는 나에게 반하는 이들의 목숨 도 한순간에 끝이 났을 거요. 아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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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말을 조심하시오!”

“이딴 자리를 왜 그렇게 갖고 싶 어 하는 거지? 이 살아 움직이는, 꿈틀거리는 거대한 생명에게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한다고 그렇게 되는 줄 아시오?”

황제가 허공으로 손을 뻗자, 거대 한 바위가 하나 위로 떠올랐다. 그 것은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 로 곱디고운 모래로 순식간에 바뀌 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마 저걸 본 황태후 파 귀족들 의 목이 꽤나 서늘했을 거다. 아직 까지 저 안에 들어 있는 부르탱이며 지브 공작에게 너희들의 머리통도 이렇게 해 줄 수 있다는 시범을 보

인 거나 다름없으니까. 황제도 참 짓궂은 면이 있으시다니까.

‘정말로 황제가 저주에 걸린 게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이 병사들 사 이에서 떠오른 것을 느긋이 즐겼을 황제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그대가 이렇게 오래도 목이 붙어 잘 살아 있는 것만 보아도, 그 시끄 러운 신하들의 목소리에 치여 살아 가는 내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은 한 줌밖에 없다는 것을 알 텐데.”

황태후의 얼굴이 워낙 멀어 낯이 질린 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 는 게 아쉬웠다. 그녀가 이를 부득

부득 갈듯이 말했다.

“……갖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정당히 승계하겠다는 것뿐이오! 그 대는 곧 죽을 목숨이 아닌가? 이제 다 알고 있소. 셀레스티아라는 여자 가 반려 후보라는 것도 모두 그 여 자를 가까이하여 병증을 숨기기 위 한 것이라는 것을. 비서로 둔 것도.”

난 이렇게 온 나라가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하게 큰 목소리로 오가 는 대화에서 내 이름이 등장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적잖게 동요했다.

언제까지나 느긋하게 받아칠 것 같던 황제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왜 이런 데에서 조용해지는 건 데?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린데.”

“그러니 그 여자를 먼저 없애면 황제도 더 이상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닌가?”

“미안하게 되었지만 황태후. 짐이 미리 말하는 것을 잊은 게 하나 있 는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반기를 든 이상, 나는 그대가 하는 헛소리를 참아 줄 의무가 없소. 내가 언제까 지 방어만 하고 있을 줄 알았나? 이제 슬슬 힘이 다했을 거라 생각했 소? 그래서 제풀에 죽어 줄 줄 알

았나? 그 정도로?”

그 정도가 아니었다. 황태후도 여 기에 모든 걸 걸었으니까. 아카데미 의 공격으로 뜻하지 않게 황제의 전 력을 파악했을 테니까, 그것에 비해 훨씬 많은 마법사를 동원하여 광역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아군의 수도 늘었지만, 수도민을 고려하지 않을 만큼 절박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살 상 마법이었다.

황제는 장식이 들어가 밤중에도 희게 반짝이는 긴 창을 들어 황태후 가 있는 테라스를 가리켰다.

“미안하지만, 수도민이 다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식의 마법 사용부터

이미 민심은 그대를 떠났고, 내 사 람을 자꾸 건드리는 데에서 내 인내 심도 끝났소. 나머지 말은 내 궁을 되찾고 나서 듣지.”

“황제, 그게 무슨……;

뭔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겠지. 황 태후가 소매를 펄럭이며 손을 힘껏 휘두르자 힘이 다한 황제를 노리기 위해 수많은 화살이 동시에 쏟아져 내렸다. 그것 또한 마법사들의 지원 이 있어 중간부터 각종 원소에 휩싸 인 모양으로 바뀌었다. 불과 얼음 화살들이 아군 진영으로 쏟아져 내 렸다.

황제가 그것들을 신경도 쓰지 않

는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그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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