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그런데 이렇게 태평하게 계신 겁 니까?”
황제가 뚱하게 대꾸했다.
“그럼 내가 뭘 하고 있어야 하 지?”
그건 그렇다.
편하게 있으라고 할 수도 없고, 오늘 밤 중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 는데 긴장해서 신경을 바짝 쓰고 있 으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내가 입을 다물자 황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역시 일어나면 위협 적일 정도로 큰 키다.
빤히 올려다보자 그가 망토를 홀 렁 벗었다.
“그럼 전투 준비나 해 볼까.”
환복하려는지 그는 옆에 정갈하게 정리해 둔 새 의복을 바라봤다.
무슨 전투 준비를 혼자 한담. 다 른 병력들은 공격이라도 해 달라는 듯 삼삼오오 모여 앉아 카드놀이나 하고 있던데.
한숨을 푹 쉬며 그의 옷 시중을 들려고 다가갔다.
상의를 벗은 그의 등은 남은 흉 터도 희미해져 있었고, 탄탄한 근육 으로 뒤덮여 매끈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이다. 이젠 남의 시선을 피할 일도 딱히 없는데 왜 내가 옷 시중까지 일일이 다 들 어야 한단 말인가? 원래 이건 비서 의 일도 아닌데.
“ 폐하.”
“뭐지?”
“이제 옷 시중은 다른 시녀들께 부탁하십시오.”
“무슨 말이지?”
그가 몸을 빙글 돌려 나를 내려 다봤다.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그가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것쯤은 이제 눈빛만 봐도 알겠다.
“제가 시중들어 드리면 고작 옷깃 을 잡아 드리거나 단추를 잠가 드리 는 것 정도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지켜야 할 비밀도 없으니까 요.”
황제는 타당한 말이라고 생각한 눈치였지만,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는 않았다.
“손을 빌리지 않으면 되는 것 아 닌가? 다른 자를 굳이 부르고 싶지 않은데. 남을 내 휴식 공간에 두는 것 자체가 껄끄럽다.”
나도 충분히 남이지만, 나는 아무 래도 ‘구매 물품’이라 상관없는 모
양이었다. 기가 막혀 이기죽거리며 물었다.
“그 많은 단추를 스스로 끼우시겠 다고요?”
“그래.”
“그거 아십니까? 사람은 각자 제 가 해야 할 분야의 일이 있다는 거. 폐하께선 국정을 잘 돌보시면 됩니 다. 다른 일은 남에게 맡겨 두시
“걱정할 필요는 없다.”
황제가 제 앞으로 손을 가져갔다. 한 손으로 겹쳐 놓은 왼쪽 오른쪽 옷감 사이를 쓰다듬자, 그 많은 단
추가 스르륵 다 잠겨 들어갔다.
아니, 저런 걸 할 줄 알면 맨날 하든가. 이제 저주가 풀려서 마음껏 힘을 쓰는 건가? 하여간 쓸데없이 할 줄 아는 게 많다.
“그럼 넌 보기만 하면 되니까 이 제는 불만이 없나?”
“하오나, 언제까지나 제가 있을 것도 아니고, 그냥 시녀나 시종이 방에 들도록 허하심이 편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언제까지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무슨 말이지?”
아차.
지금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 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할 이야기 가 아닌데.
하지만 한번 빌미를 잡힌 이상, 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고 자리를 뜨도록 내버려 둘 황제가 아니었다. 그의 붉은 눈이 사람의 속내를 어디 까지라도 들여다볼 듯이 빤히 살펴 왔다.
난 그의 눈을 계속 마주 볼 자신 이 없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내가 떠나려고 떠나는 게 아니라, 그의 옆자리가 싫어져서 떠나는 것 도 아니라, 그냥 상황이 이렇게 된
거다. 황제와 그의 측근들은 나를 구하려고 그런 식으로 선전 포고를 했던 거다.
‘반려’라는 호칭이 나를 떠나게 만들었으나 그것 때문에 누굴 원망 하지는 않았다.
한번 나락까지 떨어졌던 나의 인 생을 구원해 주었던 그에게, 이제는 나도 꽤 빚을 많이 청산했으니까. 후련한 기분으로 떠날 수 있으리라. 물론 그가 다시 제자리에 앉게 된다 면.
겨우 다시 그를 똑바로 마주 바 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이 정리되면, 폐하께서 다시 황좌의 주인으로 정당히 앉으 신다면, 전 떠날 생각입니다.”
나의 의지에 반하는 말이라 혀에 올리는 것이 괴로웠으나, 상황에 가 장 잘 맞는 말이었다. 난 최대한 덤 덤하게 들리도록 말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황제는 고요한 시선으로 날 응시 했다.
난 그가 말하기 전에 그의 대답 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알겠다고 할 거다.
아카데미까지 보내 놨더니 떠난다
는데 단박에 그러라고 하지야 않겠 지만, 내 사정을 이해할 테니까. 이 미 수하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반 려’라는 호칭을 사용한 후폭풍에 대 해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까.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더라도 언 젠가 말이 나오게 되어 있는 이야기 였다.
하지만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는 확신이 틀렸음을 깨달아야 했다.
“폐하, 제가 지금 당장 떠나겠다 는 것이 아닙니다. 혹 오해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황좌의 주인이 되면 떠나겠다
니. 남들은 내가 쥔 게 없을 때 곁 에 없고 더 많이 쥐면 가까이 오려 하는데, 넌 인생을 살 줄 모르는 군.”
“인생을 살 줄 알았다면 이리 살 지는 않았겠지요.”
쓰게 웃는데, 황제가 내 얼굴 옆 벽을 짚었다. 다시 잘 갈아입은 자 르르 윤기가 오르는 소매를 따라 시 선을 돌리자,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 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다.
“폐하……?”
뭔가를 더 물으려고 하는데, 붉은 그의 눈동자가 긴 속눈썹 새로 스르
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이제 부효과도 없는 게 아니었 나?
질문을 할 새도 없었다. 거친 키 스가 급하게 밀려들었다. 하지만 숨 을 다 가져갈 듯하던 키스는 내가 반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차츰 부드럽고 옅어져서, 종래엔 몽글몽 글한 설탕 과자를 입 안 가득 문 것 같은 단맛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 었다.
본래 이랬던가? 키스라는 게. 이 렇게 정신을 못 차리게 달았나? 손 과 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모르 게 달아서, 마법을 쓴 것도 아니질
않냐는 질문도 그만 까먹을 것 같았 다.
쾅
그때, 바깥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던 키스는 그제야 간신히 멎었다. 얼굴을 떼어 낸 그가 내 아랫입술을 엄지로 홅곤 작게 웃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임하겠다던 맹 세라도 되새기고 있는 게 좋겠군. 곧 돌아오지.”
입 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하지 만’이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식으로 달게 키스했냐는 질
문도, 난 어차피 떠나야 하는 게 아 니냐는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급히 막사를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난 양손을 움켜쥐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생사의 앞 에서 이 정도 키스는 사소한 것이었 으니까.
나의 폐하께서 무사히 돌아오기 를, 그토록 바라던 황태후와의 일전 에서 아무런 탈 없이 승리하여 제자 리를 되찾기를 빌 수밖에는.
쿠궁!
정신이 든 것은 다시 한번 요란 한 굉음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천막
을 빠져나오자 까마득히 먼 곳에서 부터 하늘을 수놓은 작고 붉은 덩어 리들이 보였다.
한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 로 사방이 환했다. 그것들은 맹렬하 게 불타오르며 빠른 속도로 가까워 져 왔다.
밤하늘을 장식한 화려한 화염의 비를 보는 순간 압도되는 기분이 드 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카데미의 천장 위로 쏟아졌던 것과 꼭 같이 생긴 그것은, 수도를 모두 불태우고도 남을 것처럼 보였 으니까.
다들 미쳤나? 할 수 있는 마법은 충분히 많을 터. 하필이면 그렇게까 지 많은 지역에 피해를 끼치는 식의 마법을 써야만 했나?
우리는 부르크 제국의 수도 한가 운데에 서 있다. 조금만 벗어나면 곧장 시가지다.
지금이야 특수한 상황이라고 하더 라도, 본래는 여기서 마법을 쓰는 것조차 금지해 둘 정도로 민간과 가 까운 곳이다.
나는 멍청한 귀족들이 제일 싫었 다. 저러고도 잘도 황제 자리를 꿰 차려 할 거 같아서 기가 찼다. 황태
후와 막시는 절대로 민심을 얻지 못 할 것이다.
이를 부득부득 가는 사이에 눈에 익은 마법이 우리 진영의 왼쪽 날개 쪽에서 솟아올랐다. 그때 보았던 것 과 같이 작은 물방울처럼 생긴 방어 마법이었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비눗방울 같은 물 덩어리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 다.
물방울들은 허공에서 각 불덩어리 를 정확하게 집어삼키고 그대로 압 축되어 소멸했다.
하늘과 땅에서 각기 다른 속성의 원소 마법의 덩어리가 날아들어 가
운데에서 조각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은 전투라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광경 이 었다.
조용하고 정확했다. 황제 폐하의 솜씨다.
그를 찾기 위해 금방이라도 내 머리 위로 떨어질 듯 보이는 수없이 많은 붉은 돌덩어리들의 분열에서 간신히 시선을 떼었다. 어디지? 어 디에 있지?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자 막사 안 으로 들어가기 전만 해도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카드놀이나 하던 병사 들이 어느새 스쿼드론 단위로 큰 방 패막을 앞세운 진영으로 정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리가 난 순간 부터 내가 막사에서 나오기까지 걸 린 시간이라고 해 봐야 불과 삼사 분 남짓이었을 테다.
기가 막힌 반응 속도였다. 과연, 제국의 정예라 불릴 만한 집단이다. 제 주인을 닮아 오만하게 해이하다 가도 퍽 유능하다.
다시 시선을 돌리자 거대한 백마 에 올라탄 황제의 등이 보였다. 방 금 차려입은 가벼운 갑주를 입은 채 로 하늘을 향해 한 손을 펴서 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쉴 새 없이 방울방울 피어나는 액체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라가는 모습은 가히 장 관이 었다.
성벽 위에 선 인질들 곁에 나란 히 모여 선 마법사들의 수는 꽤 많 았다. 너무 멀어서 자세한 것은 보 이지 않았지만 지금 보니 골디나에 서 끌어모은 자들뿐 아니라, 부르크 제국민들 중에서도 꽤 많은 수를 끌 어모은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 많은 마법 사가 있을 리 없다. 마법사의 재능 을 가진 자라는 게 그렇게 강가의 자갈처럼 흔한 게 아니었으니까.
빈민 계층에 있는 자들에게 황태 후가 손을 내미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겠지. 나도 겪어 봐서 안다. 간절히 살아남고 싶은 감각을.
뿐만이 아니다. 황제군은 공성 병 기고 뭐고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데 반하여, 황태후 측에서는 투석기 까지 이용하고 있었다. 해자 너머로 돌과 화약을 던져 왔다.
펑, 퍼벙, 펑!
허공을 수놓는 마법과 물리적인 공격 양측을 격파하는 마법으로 하 늘에선 연신 귀청이 아프도록 굉음 이 났다.
순간 염려가 밀려들었다. 이런 식 으로 언제까지 막아 내는 식의 전투
양상이 된다면 큰일이다.
물론 이쪽에서도 방어 마법을 쓰 는 것이 황제 폐하 하나만은 아니 다.
각 스쿼드론 부대에서 보호하고 있는 마법사들이 하늘로 손을 뻗어 격추하거나 방어막을 펼치는 등 활 약을 보이고 있었다. 다만 저쪽 마 법사들의 수가 많았고, 인외 존재에 잠식당해 가는 저들의 힘은 꽤 강력 했다.
황태후의 노림수는 뻔했지만, 황 제 폐하의 속내는 읽기 어려웠다. 황제 폐하가 생각한 것만큼 간단하 게 이 사태가 종식될까, 정말로?
넋을 빼고 전황을 구경하고 있는 데, 비뉴스가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안전한 곳으로 가시죠.”
이 전황에서 장소를 조금 옮긴다 고 해서 더 안전하고 덜 안전한 곳 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비뉴스가 다칠까 봐 걱정되어서라도 난 바로 옆의 막사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저 멀리서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