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지 만…… 정말 우스운 건, 그 마법을 보는 순간, 제 아들 6 황자의 재능 이 갑자기 사무치게 그리웠다는 거 다. 부르크의 황제에 비견되는 마법 재능을 가진 이라고 칭송받던 것은 제 자식 중에서도 그 녀석이 유일했 다.
하여튼 그 반이 아끼는 부하 하 나를 잘못 건드렸다가 자신의 자식 과 국경 지역이 날아간 판이다.
그런데 그 황태후는 지금 황궁을 점거하고 전면전을 하려고 한다고? 코웃음이 나온다. 황좌를 얻기는커 녕, 체면이고 지위고 목숨이고 아무
것도 남지 않으리라. 무덤이나 제대 로 세울 뼈나 추리면 다행이지.
그렇게 오래 같은 황궁 안에서 살았으면서 어쩜 그리도 모를까?
하지만 또 그동안 투자한 걸 생 각하면, 겉으로 티가 나는 원조는 못 해 주더라도 물밑 작업을 몰래 시도해 보는 것 정도는 좋을지도 모 른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부르크 황제가 그 괴물이 아니라 다른 놈으 로 바뀌기라도 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니까.
“뭔가 적당한 지원이 있을까?”
“글쎄요, 폐하. 독극물을 준비해 주는 것 정도면 괜찮지 않겠습니 까?”
“역시 그 정도가 무난할까?”
락이 턱을 괴고 수염을 쓰다듬으 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순간 땅이 조금 흔들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지금 뭔가 느껴……
뭔가 말을 덧붙이려던 황제가 땅 이 세게 흔들리는 바람에 황좌에서 굴러떨어지다시피 내려왔다 .
호위 기사들이 황제의 옆에 순식 간에 달라붙긴 했지만, 그들도 제대 로 균형을 잡지 못한 탓에 황제의
머리와 몸을 보호한 채로 모두 몸을 웅크려야 했다. 알현실에 있던 신하 들도 모두 잽싸게 근처의 테이블 아 래로 몸을 숨기거나 기둥을 붙들었 다.
“이게 다 무슨……-”
“지진인가?”
그들이 덜덜 떨며 천장만 바라보 고 있는 사이에 불꽃이 피워진 채인 초들이 샹들리에에서 쏟아져 내렸 다. 알현실에 동석했던 마법사가 그 상황에서도 바닥에 진을 그려 물 화 살을 쏘아 냈기 때문에 불이 번지진 않았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심한 진동이 간신히 멎은 것 은 십 분 정도가 흐른 직후였다. 그 진동이 어찌나 심했던지, 짧은 사이 에도 알현실 내에 있던 기물들이 죄 다 넘어져 바닥에 굴러다녔다. 황제 의 길을 상징하는 붉은 카펫은 시종 이 쏟은 물과 흩어진 서류들로 순식 간에 더러워진 데다 군데군데 불타 구멍이 나 버렸다.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황제 락은 체면이고 뭐고 다 집 어던지고 협탁 다리를 붙들고 바들 바들 떨었던 게 민망하여 수염을 쓰 다듬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하 지만 일어서 있는데도 여진인지 건
물이 흔들거릴 정도였다.
“지진이라니…… 우린 그런 게 안 일어나는 지역이라고 안일하게만 생 각했는데. 이거 민간의 피해는 더 크겠소.”
그의 중얼거림에 신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회의를 빨리 파하고 민간의 피해 상황을 조사해 보자는 쪽으로 말이 모이는데, 시종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카펫의 끝에서부터 몸을 조아리고 세 번을 절하는 예를 취한 시종이 가까이 다가왔다. 온 얼굴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뭔가가 무너 지기라도 했어?”
“그, 그, 그런 게 아니옵고……!”
“아니면?”
“그, 그것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소 아니, 그러니 까…… 정원에…… 정원에……?
락은 답답해서 제 수염을 쥐어뜯 었다. 저런 말더듬이를 누가 고용했 단 말인가? 당장 내치라고 하고야 말리라.
정원에 뭐가? 왜? 정원에 있는 분수대에 값비싼 조각상이 있던 게 떠올랐다. 그게 무너지기라도 했겠
지. 좀 속이 쓰리지만 그런 거야 다 시 세우면 된다.
락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알 현실 문을 열고 나가 곧장 이어져 있는 복도를 지났다. 시종들과 호 위병들이 그의 뒤를 빠르게 쫓았 다.
급하게 달려왔던 시종의 상태가 수상하다고 느꼈는지,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한 다른 신하들도 황제와 함 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발 코니에 올랐다.
“……이게 대체 뭐요?”
“아니, 이건……『’
(4
오, 신이시여.”
정원의 가운데에 뻥 뚫려 있는 것은 아주, 아주…… 지나치게 눈에 익은 지형지물이었다. 계곡 루벤틀 에 있어야 할 동굴, 아니 자세히 보 면 그것과는 조금 다르긴 하다. 설 마, 지하로 굴을 파서 여기까지 연 결시킨 건 아니겠지?
아래에서 위로 바로 솟아난 두더 지굴처럼 생긴 그 구멍의 입구에는 떡하니 투명한 막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밖으로 튀어나오 려고, 기괴하게 생긴 손톱과 머리에 서 돋아난 촉수를 휘두르며 괴성을 내지르는 언데드들이 셀 수 없을 만
큼 들어 있었다.
차라리 보이지라도 않으면 다행 일 텐데, 굴의 가장 위에 쳐진 보호 막이 어찌나 투명한지 생생히 보였 다.
락은 절로 신음을 흘렸다.
“민간의 피해는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군. 미친 자식……-”
“……폐하, 이게 대체 무슨……
“제가 황태후를 처리하는 동안 쓸 데없는 수작을 부렸다간 다 풀어 놓 겠단 경고겠지. 정말 당치도 않은 놈이다.”
신하들은 눈앞에서 보는 언데드의
모습에 겁에 질려 손을 바들바들 떨 면서도 분노를 잃지 않았다.
“정말 그 몰상식한 부르크 황제는 이딴 일을 한단 말입니까? 아니, 다 른 나라 황궁에 지금……
“국경을 조절한 것으로 물러가겠 다고 약조를 했으면 지켜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앞으로 자국과의 교역 관 계에 어떤 불이익이 있을 줄 알고 이딴 짓을 하다니……-”
락도 화가 나는 것은 마찬가지였 지만, 그는 힘의 역학 관계를 냉정 하게 판단하는 것 하나는 제대로 할 줄 알았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 었다.
“아니, 우리가 먼저 건드렸으 니…… 아직 화가 다 가시지 않은 거겠지. 평생을 그 저주를 견디며 살았던 게 쉬웠겠나. 감수해야 할 벌이라고 생각하고, 저 부르크의 황 태후가 최대한 빨리 목이 날아가기 를 빌어나 주자고.”
“그럼 원조는 없는 걸로 합니까?”
“그래.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뭘 어쩌겠나? 그 여자에게 가서 전해 라. 우리는 온 나라가 6 황자를 잃 은 슬픔으로 가득 차 추모식을 하느 라 차마 다른 나라의 사정에 간섭할 여력이 없다고.”
“네, 폐하. 그리 전하겠습니다.”
황제가 그렇게 나오는데 신하들이 더 이상 말을 보탤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두들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름 다운 황실 정원 한가운데에 떡하니 나타난 언데드 굴을 바라볼 수밖 에.
황태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속속들이 퍼져 나감에 따라 각 영지에서 귀족들이 수도로 달려 왔다. 공작부터 자작까지, 대표 격
인 기사단을 보유한 자부터 겨우 한 줌의 정규군을 데리고 있는 자 까지.
이 기회에 공을 세워 보겠다고 눈이 새빨개서 온 자도 있겠지만, 대부분 황궁이 점령당했다는 전대미 문의 사태에 황급히 달려온 것 같았 다. 5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렇 게 어이없이 쉽게 황궁을 내준 사태 라곤 없었으니까.
얼굴이 새파래진 귀족들이 황제 폐하를 뵙게 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 는 것을 모두 정리하고, 천막 안 거 대한 테이블이 다 채워졌다가 비워 졌다가를 반복하는 사이에 밤이 다
가왔다.
그러는 사이 황제군은 스쿼드론 여덟 개 부대에 불과했다가 차츰 늘 어 열두 개 부대가 되었다. 거기에 마법 부대 두 개까지 해서 천 명이 조금 안 되는 수였다.
해가 지기 전까지 반나절 사이에 자꾸만 합류하는 군대를 보고 처음 에는 지원군을 수용했다고 생각했는 데, 아니었다. 테포다를 향해 원정을 시작한 최초의 인원이 다시 복귀한 것뿐인 모양이었다. 일부 병력이 남 아 있었지만 테포다 제국 쪽 국경 수비를 근처 영주군에게 넘겨주고 돌아온 것이리라.
황제 폐하는 지원을 전혀 안 받 으실 생각인 걸까?
황태후와 황제의 전력 차이뿐만 아니라 개인의 전투력 차이도 어마 어마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공 성(파나)하는 입장에서는 전력이 많 은 편이 든든할 텐데.
그리고 나는 황제 폐하가 마음껏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 서, 지치지 않는 기계도 아닌 그가 모든 짐을 다 떠안는 것이 너무 싫 었다.
손님 방문의 세례가 멎은 것은 한밤중이 다 되어서였다. 손님이 다
물러가고서야 막사 안으로 고개를 내밀자, 황제 폐하는 여느 때보다 훨씬 지치고 귀찮다는 얼굴로 턱을 괴고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폐하.”
“그래. 많았지.”
뒤로 몸을 물려 편히 앉은 그가 날 빤히 쳐다봤다. 막사 안의 호롱 불 빛을 받아 또렷한 이목구비가 주 홍빛으로 어른거렸다. 시선을 똑바 로 내 눈에 맞춘 채로 황제가 입을 열었다.
“셀레스티아.”
“ 네?”
“넌 어떻게 생각하지?”
“무엇을 말입니까?”
“멍청한 귀족 놈들이 쉴 새 없이 물어 오는 것들 말이다. 왜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있느냐는 둥, 왜 하 필 루벤틀 계곡을 점령했냐는 등.”
왜냐니.
황제와 리온이 내게 알려 주지 않아서 굳이 아는 체하지 않고 있 었지만, 돌아가는 정황을 보고 있자 면 대충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었 다.
“섣부른 짐작일지 몰라 입에 올리 기 어렵습니다만……/
“말해 봐.”
“황태후가 먼저 치길 바라고 계신 게 아닙니까? 이쪽에서 먼저 쳐들어 갔다간 인질들의 목이 달아날 뿐이 니까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마도, 황태후의 공격까 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오늘 귀족들이 줄을 서서 다녀간 것 은 좋은 선전이 되었을 겁니다. 황 태후는 이쪽의 군대가 불어날 것을 예상하고 몸이 달아 있겠지요.”
“그래서?”
“황태후가 가진 패가 무엇이든 승
산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황제 폐하 본인을 공격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 각했을 겁니다. 어쨌든 막시가 다음 황위 승계권을 가진 건 맞으니까요. 아마도……;
말하는 사이 조금씩 입술이 올라 가던 황제가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이 며 낮게 웃었다. 어째 큰 육식 동물 의 웃음소리처럼 들려 목 뒤의 솜털 이 서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그가 다 짐작하고 있을 내용을 말하는 게 시험당하는 기분 이 들어 기분 좋지 않았지만 마저 이어 말했다.
“아마도 오늘 밤 중으로 공격해
올 겁니다. 더 끌어 봐야 전력 차만 늘어날 뿐이니까요. 그런데 굳이 이 쪽에서 먼저 쳐들어가서 난이도 높 은 공성을 할 필요는 없지요.”
황제가 손을 뻗어 아이를 칭찬하 듯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커 다란 손이 내 머리를 매만지는 감촉 이 싫지 않았다.
“이거 봐. 웬만한 귀족 머리 스물 을 합쳐 놓은 것보다 너 하나가 훨 씬 낫질 않은가. 내가 말하지 않았 던가? 넌 내가 구매한 것 중 가장 잘한 거라고.”
“구매니 뭐니 하는 말씀은 이제
좀 그만해 주세요, 정말.”
입을 비죽이면서도 칭찬에 속은 즐거이 설렜다.
이게 문제다. 나는 황제에게 인정 받는 게 좋다는 것. 쉽게 사람을 인 정하지 않는 그였기에 더욱. 그 사 람의 노력과 본질을 너무나 잘 알아 보는 그였기에 더더욱.
그러나 비서 자리도, 황제의 곁도 내놓고 떠나야 하는 것을 모르지 않 는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 며 그를 바라봤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