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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80화 (80/103)

- 80화

그들이 당황하는 것은 그간 황태 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결코 나쁜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민심이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를 잘 알 고 있는 그녀는, 제가 시집오며 겪 었던 서러운 이야기를 교묘하게 풀 었다.

두 번째 부인이기 때문에 반이 잘 따르지 않는다든가, 지금은 죽은 황제의 부인을 항상 존경하고 있다 든가.

부르크 국민들은 모두 황태후와 그의 아들을 동정하고, 우애 좋은 형제인 반과 막시의 사이를 늘 흐뭇 하게 여겼다.

그런 여론 몰이에 능한 까닭에 아직까지 반이 그녀의 목을 죌 수 없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이제 끝이다. 결착의 때가 왔다.

그리고 그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 은 황태후의 옆에 얼핏얼핏 보이는 면면들이었다. 꽤 많은 수의 골디나 출신 마법 장교들과 귀족들이 황태 후의 뒤에 서 있었다. 그들은 끝까 지 막시의 편에 서기로 한 모양이었 다.

아무리 후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증거가 잡혔다고 해도 그렇

지, 이건 아니잖아.

그리고 그중, 시종장님이 황태후 의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데 에는 진짜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 다.

황궁을 통째로 차지하고 들어앉았 다는 데도 리온과 황제는 무사태평 이었다. 아무리 이쪽이 우세하다고 해도 그래도 일이라는 게 백 퍼센트 는 없질 않은가? 어디서 어떻게 틀 어질지 모르는 건데. 다칠 수도 있 고.

또 나만 염려로 가득하다. 언데드 굴에 갈 때도 늘 그랬다.

난 입술을 비죽이며 황제를 쳐다 봤다. 그는 말의 갈기를 두어 번 쓱쓱 쓰다듬어 주곤 태평하게 말했 다.

“황태후. 어차피 이렇게 나올 거, 좀 일찍 뒤집어엎었으면 서로 좋았 질 않소.”

이 와중에 왜 화를 돋우는 걸까? 기가 막혔다.

황태후는 답답하다는 듯, 황제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 다는 듯 제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 다.

“저는 이번 전쟁을 지켜보며 일방

적인 의사 결정을 내릴 줄밖에 모르 는 폐하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여,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 정한 것뿐입니다.”

“그냥 쿠데타를 일으키고 있는 것

뿐이면서, 언제까지나 말만 번드르

르하게 하는 건 변하질 않는군. 내

동생 막시가 그 황제 관을 달라던 가?”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내가 한 잘못이 많다니 어디 한번 읊어나 보시게.”

황제의 말에 황태후는 못 들은 척, 팔을 들어 성벽 쪽을 가리켰다.

“말싸움을 해 봐야 소용없을 줄 압니다. 지금껏 막시가 황제의 자리 에 더 어울리는 유능한 인물이라는 것쯤 뻔히 알아내셨을 텐데도 굳이 황좌를 내놓지 않으셨던 분이 아닙 니까?”

“거참, 그래서?”

“이 황궁은 제 손아귀에 있습니 다. 그대를 위해 봉사했던 식솔들의 목이 하나씩 떨어지는 꼴을 보고 싶 지 않으면 무리하게 성으로 들어오 진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목이 떨어지다니? 너무 악당의 대사인데……, 설령 저런 말을 하고

나서 정말 황궁의 주인이 되었다고 한들, 시민들을 이끌어 나갈 수 있 긴 하단 말인가?

그녀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황 태후의 손이 가리킨 방향의 황궁 성 벽 위에 마법사와 병사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은 인질을 한 명씩 붙들고 있었는데, 그중엔 시녀 세레나와 하녀 루아나도 있었 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녀 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병 사들의 곁에 세렉의 얼굴도 있었 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황태후만 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아직까지는

의식을 잠식당하지 않은 것 같았 다.

그렇게 먼데도 그는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을 잘 읽을 수는 없었다. 정말이지, 세렝게 반. 끝까지 한심하게 구는구나.

황태후도 이미지의 실추를 각오하 고라도 꺼낸 파격적인 패일 테다. 시민들의 동요가 느껴져 왔다.

황제가 픽 웃었다.

“몸에 악마를 불러들이는 금기 마 법으로 키운 마법사들은 다행히도 아직 배반하지 않고 잘 붙어 있는 모양이군. 그대로라면 의식을 잠식

당한다. 당장 항복하고 내 곁으로 오면 인간으로 남아 있게는 도와주 마.”

황제의 제안에 시민들은 일제히 눈이 휘둥그레져서 각자 중얼거렸 다.

금기 마법? 악마를 불러들인다 고?

그런 사이한 기술을 쓰다니, 미친 거 아니야?

황태후가 금기 마법으로 마법사를 키웠대.

그러고 보니, 황태후의 마법 양성 소에 들어가기만 하면 갑자기 마법

실력이 는다는 게 뭐였겠어? 안 그 래?

“그대가 일단 거기 있는 동안에는 아카데미에 공격 마법을 쓰는 무도 한 자도 달리 없을 테니, 오히려 어 떻게 보면 안심이오.”

황태후가 아카데미에 마법을 쓴 당사자라고?

아니, 하지만 왜?

그런데 부인하질 않잖아? 정말인 거 아니야?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 점 더 커졌다. 황태후에게 해명을 해 보라는 수백, 수천 개의 눈길이

모였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싸늘하게 이쪽을 보고만 있을 뿐이 었다.

황태후는 제 죄목이 낱낱이 까발 려지는 자리에 참석한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지, 혹은 모두 예상한 것인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뒤 를 돌았다.

막시는 테라스에서 한참을 더 서 있다가 모습을 감추었다.

황제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았다. 성벽에 저렇게 인질이 줄줄이 걸려 있어서야 당장 손쓸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멈춘 자리에서 임시 로 진을 칠 것을 명했다.

이렇게 자국 수도에서, 황제는 바 깥에, 막시와 황태후는 황궁 안에 있는 묘한 대치가 시작되었다.

리온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 황제 는 제 궁전의 바로 앞에 보이는 병 영 천막이 썩 마음에 드는지 그것을 이리저리 구경하곤 안으로 들어갔 다.

경호 기사들을 죄 밖으로 내보낸 그는 바닥에 깔린 두꺼운 짐승 가죽 위에 반쯤 드러누웠다.

이런 때에 저렇게 태평한 태도라

니. 난 금방 쳐들어가기라도 할 줄 알았다. 세레나와 루아나를 생각하 니 너무 기가 막혔다.

“정말 어디서든 잘 누우십니다, 폐하.”

“칭찬, 고맙군.”

“황태후가 저렇게까지 일을 벌였 는데 어쩌실 셈입니까?”

“아, 그거. 그건 정말 큰 경사겠 지. 정말 속 시원하군. 이제야말로, 아주 오래 걸리적거렸던 큰 혹 덩어 리를 떼 버릴 수 있게 되어서. 정말 이지 저렇게 할 거면 진즉에 해 주 면 좀 좋았나.”

절로 쓴웃음이 났다. 안 되겠다. 이 황제 폐하, 전혀 걱정할 기미가 없다.

“그리고 황좌를 무력으로 되찾는 과정에서 피를 보는 것도, 그리 내 키지 않기도 하고. 가뜩이나 무거운 황관인데 거기에 피까지 묻혔다간 어찌 되겠냐고. 그럴 거면 이참에 영영 가져가 줬으면 좋긴 하겠다 만……

기가 막힌다. 정말 기가 막혀.

“언사를 조심해 주십시오, 폐하.”

다른 신하들이 들어오기 전이라 다행이었다. 정말 가만히 두면 정도

를 모른다니까.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잔소리를 하자 그가 입꼬리 를 올렸다.

“돌아왔군, 내 비서.”

하여튼 비꼬는 것도 능력이다.

“주제넘게 잔소리를 하여 정말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푸크크크.”

웃을 일이냐고.

아니, 저 앞의 잖아. 집도 절도 아. 사실 까놓고 나 나나 다를 게

저렇게 여유 만만인데?

황궁이 자기

없는 입장인

말해서 지금

뭐냐고. 그런데 왜

집이 거잖 황제

물론 절대적인 병력의 우위는 우 리에게 있다. 하지만 황궁을 통째로 날려 버릴 것도 아니고, 전면전으로 들어서면 많은 피해를 낳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아무리 압도적 이라고 해도, 죽음의 잔치가 눈앞에 있는데오

게다가 저기에는 내가 그동안 함 께 생활해 온 사람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채로 성벽에 고개 를 내밀었던 루아나와 세레나, 그리 고 다른 하녀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왜 그렇게 죽상이지?”

“……폐하께서는 뭐가 그리 즐거 우십니까?”

기분이 상한 채로 다가가자, 그는 바닥에 누운 채로 팔을 들어 내 손 을 꽉 쥐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잘될 테니까.”

또, 괜히 진지한 눈을 하고 이렇 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만진다. 싫음과는 다른 감정으로 속이 불편 하게 두근거렸다.

감정을 비워 둔 채로 있고 싶은 데, 시급한 이 상황도 모르고 멋대

로 따끔따끔한 속이 불편해서 손을 억지로 빼내었다.

황제는 순순히 놓아주었다. 내 표 정을 살피기라도 하듯 빤히 응시하 는 시선에 난 조급하게 말을 주워섬 겼다.

“하지만 여기에 해외의 원조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이 엉망진창 이 될 겁니다. 테포다의 황제와 저 희 황태후의 유착은 하루 이틀 있 어 왔던 것이 아니니, 틀림없이 아 주 사소한 지원이라도 할지도 모릅 니다.”

그도 그리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 덕였다.

“그 부분은 손을 보고 왔다.”

해외 원조를 막았다고? 어떻게?

“뭐든 말보다는 주먹인 법이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지 않는 문화 강국 부르크의 황제께서 는 그렇게 말하곤 입술을 당겨 웃었 다.

난 계속 내 눈이 있는 곳을 따라 오는 시선을 피하고 싶어 더 캐묻지 못하고 일단 천막에서 물러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제의 곁을 보필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은 많았 다.

황제를 차례로 알현하고 의견을 조율할 수 있도록 도착하는 귀족들 의 일정을 짜고 황제의 옷가지를 챙 겨 주는 등등의 일이었다.

뜬금없이 자국의 수도에서 병영 천막을 치게 된 우리에게 식량 원 조 같은 것이 끊임없이 들어왔으니 까.

뿐만이겠는가? 누구보다도 목숨 부지를 위해 노력해야 할 본래 황태 후 파였던 귀족들 중 일부가 황제에 게 병력을 보내겠다고 통보해 오기 도 했다.

원래 찔리는 게 있으면 발이 빠

른 법이다. 아마 시간이 지남에 따 라 훨씬 더 많은 병력 증가가 있을 거다.

바삐 일하는 중에 황제와 몇 번 이고 눈을 마주쳤지만, 시선을 먼저 피하는 건 내가 되었다. 그는 금방 달아날 초식 동물을 보는 맹수처럼 날 줄곧 쏘아봤으니까.

반과 부르크의 세력이 제 나라로 돌아간 뒤, 락은 내내 한숨만 푹 내 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회가 되었다.

역시 그 저주를 풀어주는 게 아니었 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꼴만 되었다.

그러고 있는 락에게 황급히 올라 온 보고가 있었다.

“황태후 측에서 기별이 왔습니 다.”

“이제 와서 부르크의 황태후가 또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야? 뭐라고 하던?”

“황궁을 점거했으니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지원만 해 준다면 제 아 들을 황위에 앉힌 다음 전폭적인 지 원을 약속한다고.”

기가 막혔다.

그 황태후라는 여자는 지금 제가 어떤 괴물과 싸우고 있는지 모른다. 이쪽 황궁은 아직 그 황제가 마지막 에 보여 준 마법 때문에 사흘째 충 격에 휩싸여 있는데 말이다.

아니, 어떻게 일개 인간이 물길을 틀 수 있단 말인가? 이쪽에서는 반 년에 걸쳐 물길 트는 공사를 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던 차였는데.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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