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79화 (79/103)

- 79화

승전을 알리는 파란 깃발과, 황제 를 나타내는 사자 기가 동시에 하늘 을 수놓았다.

그 뒤로 인파가 따라붙기 시작하 더니, 이제는 수도에 있는 사람은 다 기어 나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 로 바글바글했다.

아카데미가 있는 수도의 중앙 광 장에서부터 황궁까지, 그리 멀지 않 은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 점점 더 불어난 인파는, 황궁의 앞에 도달할 때쯤엔 가히 벌떼처럼 보일 정도였 다.

“황제 폐하 만세 — !”

“황제 폐하 만만세 — !”

“황제의 반려 만세 — !”

“황제군 만세-!”

현 황제, 반의 인기는 역대 황제 들 중에서도 다시 찾아보기 힘든 가 공할 만한 것이었다. 영웅은 난세에 태어난다고 하질 않는가? 언데드를 봉인한 고대 마법의 수명이 대부분 다할 시기에 반의 활약은 눈부신 것 이었다.

그것을 별론으로 두더라도 반은 훌륭한 통치자였다. 도시는 그 어느 황제 때보다 더 번영을 누렸으며, 새로 병합된 국가에도 공평하게 빈

민 구제 정책을 적용했다.

게다가 화룡점정으로, 부르크 제 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유 일한 제국인 테포다와의 전투를 마 치고 돌아온 것이다. 짧은 시간에 국경을 넓히고 납치당한 신하를 되 찾았다. 상상할 수도 없을 대승이었 다.

본디 제국민들의 마음속엔 제 영 주나 제 나라의 황제가 잘난 사람일 수록 느끼는 그 자부심이 있다. 더 할 나위 없이 신난 그들이 황제 폐 하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외치려 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황태후는 황궁 테라스에 앉아 벌 통에 몰려드는 벌들의 행진 같은 꼴 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꼴값도 가지가지 한다.

“ 아들아.”

“네, 어마마마.”

“마음의 준비는 되었니?”

“어떤 준비 말씀이십니까?”

“황제가 될 준비 말이다.”

막시는 멍청이가 아니다. 황제의 인기를 눈앞에 전시해 놓은, 바로 저 행진을 보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 는 것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다. 뒤는 낭떠 러지고, 앞엔 저 남자가 있다. 저 인파의 가장 가운데에, 누구보다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형이.

“승산이 있으면 좋을 텐데요.”

황태후는 손을 뻗어 제 아들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런 걱정은 말거라. 어미가 모 든 것을 다, 제대로 준비해 놓았단 다.”

“하지만 마법사 양성소는 이미 습 격당했다고 하질 않았습니까?”

“괜찮아. 아직 많은 마법사가 있

으니까. 그들 정도만 되어도 황제 의 약점을 공략할 수 있을 거란 다.”

“약점……,”

그의 형에게 과연 그런 것이 있 을까? 어마마마가 몇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해도 자꾸만 그런 의문이 들 었다.

눈앞에서 웃다가 칼을 휘둘러도 죽지 않을 게 뻔한 형이다. 형의 것 이라면 뭐든 갖고 싶었지만, 동시에 형의 것이라면 뭐든 영영 손에 들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넌 걱정하지 마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가서 황좌를 잘 지키고 있으렴.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것 이다.”

“하지만 어마마마, 어마마마의 고 향에서는……『’

공주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까 지 아무리 황좌가 탐이 나도 황제에 게 대놓고 반기를 들지 않았던 것 은, 그녀의 고향과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신하들의 안전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고려할 선 택지는 없었다.

“어차피 나를 도구로 시집보낸 나 라 따위, 내가 왜 신경 써야 하지? 그런 것은 다 필요 없다. 가서 시종 장이나 잘 구슬려 두렴.”

“……알겠습니다, 어마마마.”

막시가 테라스의 안쪽 방으로 돌 아가고 혼자 남은 황태후는 난간에 기대 저 멀리에서 천천히 가까워져 오는 소란을 쏘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런 질문을 받은 지도 수차례다.

아들뿐만 아니라 다른 신하들로부터 도. 어떻게 하면 좋냐고? 그건 제가 묻고 싶은 이야기였다.

고작 얼마 전에 있었던 마법 양 성소 습격이 너무 타격이 컸다. 그 사건 이후로 연락이 두절된 멍청이 같은 귀족이 한둘이 아니다. 대역죄 인으로 줄줄이 끌려 들어갈 덜미가 잡혔다고 생각했거나, 황태후가 그 런 일을 하고 있을 줄이야 미처 몰 랐던 거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손을 끊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귀족들 사이에서 황태후 파로 소문 이 다 나 있을 텐데. 차라리 끝까지

제 곁에서 싸워 낮은 가능성이나마 황좌 찬탈에 협조하는 게 더 낫질 않냔 말이다.

알량한 멍청이들 같으니.

까득.

주먹을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던 지 손톱에 붙인 보석이 떨어져 나 갔다.

그래도 이미 준비는 끝났다. 황제 는 서둘러 돌아왔다고 생각하겠지 만, 회담이 너무 길었다.

훨씬 이전부터 비밀리에 준비해 두었던 황궁의 점령을 실행으로 옮 긴 것은 디펜더들이 마법 양성소를

덮친 시점이었다. 이제 더 이상 미 룰 수도, 미룰 시간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멍청이 같은 시녀와 하녀들을 모 조리 지하에 몰아넣고, 힘을 좀 쓸 것 같은 남자 식솔들은 모두 내쫓아 버렸다.

끝내 시종장의 아내는 어디에 붙 들려 있는지 찾아내지 못했지만, 시 종장의 충성만은 손에 넣었다.

시종장은 정말로 수월한 패였다. 그가 황제의 편이 아니라고 믿는 이 는 없었으니까. 그의 얼굴을 우선 내밀고 명령하면 모두가 말을 들었 다.

황제에게 벌을 받고 근신하고 있 는 것을 찾아내어 억지로 불러올렸 으니, 그녀에게 충성하지 않고는 별 도리가 없었겠지.

본래도 그녀에게 황제의 약점을 술술 불던 시종장이었다. 그가 말했 던 것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된 지 금, 황태후는 시종장을 완전히 신뢰 하게 되었다.

황태후의 세력은 전투원들이 상주 한 구역부터 한 장소씩 점거해 나갔 다.

지금은 그녀의 사병과 황실의 병 사들의 전투도 마무리 단계였다.

황제의 인복도 여기까지인지, 들 려오는 소식은 모두 승리뿐이었다. 황제의 병사들은 좀 싸우는 척하다 가 질 것 같으면 금세 뒤꽁무니를 뺐다. 달아나는 자들은 놓아주었기 때문에 황궁은 텅 비었다.

여기까진 뒤통수를 친 터라 손쉽 게 황궁을 점거할 수 있었지만, 지 금부턴 아니겠지.

어차피 단판 승부였다. 두 번은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결정 난다.

그녀는 테라스에서 내려와 넓고 아무것도 없는 알현실로 향했다. 막

시는 황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그녀 를 쳐다보고 있었다. 알현실의 옥좌 에 앉은 아들이 그토록 어울려 보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널, 황좌에 앉게 해 주마. 계속 거기에 있을 수 있게 해 주마.

그녀의 마지막 패가 빛을 발할 것이다.

저 황제가 단 하나 모르는 게 있 었다. 황제가 저주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제가 알게 되었다는 것이 다.

현 황제가 비록 테포다와의 전쟁

에서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그녀와 의 전쟁에서는 아니었다. 황태후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수 싸움이었 다.

전면전으로 간다면 지금의 인기를 등에 업은 황제가 이길 것이 뻔했지 만, 황제의 목이 그들의 눈앞에서 떨어진다면 당연히 이야기는 달라지 리라.

제 아들은 현 황제를 제외하면 단 하나뿐인 정당한 황위 승계자였 으니까.

“세 멕.”

“네, 황태후 마마.”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황궁 코 앞까지 행진해 온 우리 행렬은 성의 입구에서 멈춰 섰다.

갑작스레 멈춘 행렬에 놀라 마차 밖으로 고개를 빼고 내다봤지만 사 람이 워낙 많아 뭐가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요?”

비뉴스도 모르는 일인 모양이었 다. 검 손잡이를 움켜쥔 그가 창문 바깥을 살피더니 몸을 일으켰다.

“제가 보고 오겠습니다.”

하지만 호기롭게 나갔다 온 것치 곤 성과가 신통치 않았다. 밖을 살 피고 돌아온 그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설명 대신으로 마차 위의 창문을 열어 주었다.

안에서 천장으로 고개를 내밀 수 있도록 위에도 창을 만들어 둔 형태 의 마차다. 난 거기로 상반신을 내 밀고 앞을 바라보았다.

저게 뭐지?

행렬이 멎은 곳의 앞에는 해자가 있었는데, 전시가 아니고서야 항상 내려져 있는 것이 당연한, 넓은 다

리가 없었다. 아니, 없어진 게 아니 라 황궁 쪽으로 끌어당겨 올라가 있 었다.

과연 이래서는 행진할 수가 없다. 비뉴스가 황당해할 만도 하다. 지금 나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황당하니 까.

저 다리가 올라간 모습은 처음 보았다.

황제가 바로 여깄는데, 이 나라의 주인이 여깄는데, 도대체 저 다리는 왜 저렇게 올라가 있는 걸까?

슬쩍 돌아보니 황제는 오히려 예 상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황

태후가 이런 일을 벌이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을까? 그래도 눈앞에

닥친 일에 저렇게 초연하게 구는 걸

보면 역시 반 황제는 웬만큼 간이

큰 인물이 아니다.

그가 태연하다면 그의 지휘를 받 는 군사는 모두 동요하지 않는다. 다들 어이없어하는 얼굴이긴 해도 당황한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동요한 것은 수도의 시민 들이 었다.

황제의 깃발이 내려가 있는 본성 에 다리마저 올라가 있다니,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 수군대 는 소리가 길목을 가득 메웠다.

내가 아는 지금 황제의 능력이라 면 저 멀리 보이는, 거둬들여져 세 로로 서 있는 다리를 다시 내리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다. 하지만 그 는 굳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뭔가 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쏘 아보았다. 황제의 알현실에서 곧장 이어져 있는 테라스에는 조명이 켜 져 있었다.

그래, 이렇게까지 준비해 둔 거라 면 슬슬 등장해서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황태후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내 등장했다. 막시와 함께 나온 게 아니라 저 혼자였다.

그녀의 등장에 시민들의 수런거림 이 더욱 커졌다. 중요한 정책의 발 표나 신년 인사를 할 때, 황제가 서 서 국민들에게 말을 건네는 장소에 서 있다니.

그리고 더욱더 이상한 것은 저기 에 나와 섰다면, 황제의 승전을 축 하하는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다리 를 내려 주어야 할 텐데 전혀 그럴 기색이 아니라는 거였다.

황태후와 황제가 않고 노려만 보고 두고 보아도, 둘의

서로 말을 하지 있는 이 상황만 반목 관계를 짐

작할 수 있을 터. 시민들은 무슨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제각기 예감했다.

나 또한 황태후와 황제를 몇 번 이고 번갈아 보는 사이에 심장이 미 친 듯이 뛰었다.

한참 동안 무언으로 대치하고 있 다가 간신히 황태후가 입을 여는 것 같았지만, 이쪽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황제는 손을 내밀어 튕겼다.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황태후의 목소리가 몇 배나 크게 증폭되었 다.

“이 황궁의 주인은 이제 바뀌었 습니다. 의회의 의견도 제대로 수렴 하지 못하는 황제는 없는 게 낫지 요.”

아주 큰 목소리로 울려 퍼진 폭 탄선언에 제국민들은 제가 뭘 잘못 들은 건가 하고 얼이 빠졌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