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78화 (78/103)

— 78화

나도 그리 생각한다. 약자에겐 강 하고 강자에겐 약한 것이 귀족들의 속성이었다. 제 주머니를 챙기는 일 에 대해서는 한없이 약삭빠른 자들 이었다.

황태후가 명분도 잃고, 키운 마법 병력도 잃고, 아들을 황위에 앉힐 가능성조차 잃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내 뺄 게 틀림없었다.

황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 정리가 된 거군. 그럼 이제 락에게 돌아간다고 통보해 봐야겠 군.”

“네, 폐하.”

“아, 그리고.”

“네, 폐하?”

대답하지 않는 그 때문에 갑작스 러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묘하게 진 지한 눈을 한 그는 내 볼의 상처 근처를 슬쩍 손으로 만졌다가 손을 거두었다.

“이야기의 앞뒤가 바뀐 것에 대해 선 나중에 제대로 다시 말하지.”

“어떤 말씀이세요?”

이야기의 앞뒤라니, 무슨 이야기 지? 짐작되는 거라면 서른 가지쯤

있었다. 되묻기도 전에 황제는 회담 장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하여튼, 제멋대로라니까.

난 이제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에 화도 나지 않았다. 그 저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한숨으로 진정시키곤 그의 뒤를 따랐다.

병사들이 지고 들어온 검은 관은 회담장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6 황자가 한 만행에 대해 서는 그들도 알고 있었지만, 6 황

자가 황태후와 손잡고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그들도 알 필요가 있었다.

분명 그 변형된 금기 마법은 테 포다 황실의 고서에서 나온 것이라 고 했다. 여기 모인 석학들 중에는 그 마법진을 알아본 이도 있었다.

“……거기까지 간섭한 줄은 몰랐 구려.”

“댁의 황실에서 우리나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제 알았소?”

“그래서 원하는 게 뭐요?”

“공식적인 사과.”

락은 침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

도 여기에는 뭐라 할 말이 없어 보 였다. 당장 눈앞에 반쯤 마수화가 진행된 인간이 있으니 말이다. 그것 도 제 나라 황실에만 알려져 온 방 법으로.

제 이익을 위해 남의 제국 황제 를 실각시키기 위해 황태후에게 적 극 협조하는 것도 정도껏이니까. 저 주에다 금기 마법까지 동원하여 더 러운 술수를 모두 써 가며 도왔다는 것은 거의 국제적 망신이다.

락 황제는 짜증스레 콧수염을 당 겼다 놓았다. 저 관에 든 시신을 본 순간부터 5분 안에 5년은 더 늙은 듯했다.

같은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사이에 신하들이 잠깐 다시 상의하 고 오자는 듯 눈치를 보냈지만, 그 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뭐요, 그 사과라는 게.”

“저희 측에선 황태후를 어차피 실 각시킬 셈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다려 온 이유는 황태후를 매장해 버릴 만한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입 니다. 이 금지 마법과 저주, 이것들 을 황태후와 손잡고 해 온 내력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해 주십시오.”

“하…… 어쩐지 회의가 지지부진

하더라니. 그대는 전대 황제에 비해 백배는 더 능글맞군.”

“그리해 주시겠습니까?”

“……그거면 됐소?”

“뭐, 이미 죽은 6 황자의 목을 내 놓으라고 할 수도 없으니 자국 황태 후의 목을 주십시오. 그러면 다른 것은 바라지 않고 조용히 물러가 드 리겠습니다.”

이미 기울어져 있는 군사력의 차 이야 뻔했지만, 제국의 테두리 안에 서 오래 살아온 신민들의 마음을 설 득하는 건 귀찮고 시간이 오래 걸리 는 일이다.

아무래도 반 황제는 당장은 그런 귀찮음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국경을 늘리느니 내정에 더 신경 쓰기로 한 것 같았다.

락 황제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물었다.

“그렇다면 그…… 언데드 굴은 어 찌 되는 것이오?”

난 얼굴을 팍 찌푸렸다. 날 앞에 두고 잘도 물어본다, 정말. 지금도 그때 입에서 악취를 내뿜던 흐물흐 물한 언데드들 사이에 있던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절로 쳐졌다.

저들의 골칫덩어리였던, 그것 때

문에 6 황자가 저주를 풀어 주겠다 느니 했을 때도 승낙할 수밖에 없었 던 그 문제.

락 황제는 일이 이렇게 된 김에 자존심이고 뭐고 내던지고 물어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반은 못 들을 걸 들었다 는 듯 피식 웃었다. 마치 멍청한 제 자를 나무라기라도 하는 투였다.

“왜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저희 땅은 제가 알아서 잘 다스리도록 하 겠습니다. 쓸데없는 염려는 거두십 시오.”

장내엔 정적이 흘렀다.

락은 너무 어이가 없어 목덜미를 잡았다. 재상과 눈이 마주쳤다. 혹 이런 식으로 영토 경계가 재설정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든 저것이든 하나만 요구해야 할 것 이 아닌가. 설마 그런 소리를 해 대 면서 내사에 관한 일도 해결해 달라 고?

“방금은 황태후의 목이면 됐다고 하질 않았습니까?”

“저희가 지금 어디서 이 회담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 국과 그대 나라의 사이가 아닙니 까?”

락 황제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테이블을 쾅 두들겼다.

“그렇게까지 싸고돌아 놓고 알고 보니 다른 여자와 다시 마음이 맞아 새 반려를 찾게 되었다. 이딴 소리 가 들리기만 해 보시오.”

락 황제는 할 말이 없으니까 또 내 이야기를 걸고 넘어가는 게 우스 웠다.

난 우리 황제가 당연히 비웃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반은 이죽거리 듯 입꼬리를 치켜세웠을 뿐 대답은 잘도 했다.

“그럴 일은 없으니 안심하시오.”

아니, 외교 하는 관계에서는 사실 아무런 말이나 막 해도 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호언장담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 알겠소.”

“공표는 저희가 돌아간 뒤, 즉시 해 주십시오.”

“알겠소!”

“아, 그리고…… 하나 더.”

“또, 뭐요?”

“저희가 계곡을 가져가면 테포다 쪽으로 흐르는 강이 사라지질 않 소.”

(4

그렇소.”

“지류라도 하나 내드리지.”

“그런 것을 어떻게……,”

본디 두 나라를 가르는 경계는 거대한 강줄기였다. 그 강에서 테포 다 쪽으로 흐르는 지류가 있었지만, 몇 년 전인가 산사태로 막힌 지 오 래 였다.

“이건, 빠르게 자식 목을 친 데 대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두시오.”

이건 내놓으라고 말하기도 전에 6 황자의 목을 쳐 일을 수습하려고 한 락 황제에 대한 비난이다. 락 황 제도 그걸 알아들었는지 자꾸만 수

염을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반 황제가 천막을 걷고 나오자 나머지 일행도 줄줄이 따라 나왔 다.

이건 일종의 경고이리라. 군사력 은 남아돌지만, 국내 사정을 먼저 마무리하기 위해 돌아가는 것뿐이 라는. 더 이상 무례를 범하지 말라 느

계곡 위에서 내려다보니 저 멀리 어렴풋이 산사태로 막힌 지류가 보 였다. 이제는 말라 버린 강바닥이 구불구불 테포다 안쪽으로 말려 들 어가 있는 것도.

마법진다운 마법진을 그리지도 않 았다. 황제는 허공에 손가락을 몇 번 쓱쓱 긋는가 싶더니 양손을 합쳐 쥐었다가 손을 서서히 벌렸다.

그 손안에서 새까만 암흑 같은 것이 자라났다. 정확히 정체나 테두 리를 보려고 의식해도 그 형체를 보 기 어려운 기묘한 물질이었다.

그가 한 손짓의 모양을 본 나는 그 마법의 정체를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소멸 마법.

저 많은 흙을 어떻게 할 셈이었 나 했더니, 말 그대로 지워 버릴 셈 이다.

누군들 저 마법을 쓸 줄 몰라 여 태껏 쓰지 않았겠는가. 인부를 동원 해 지금껏 공사를 한 게 저 모양인 거다.

그런데 저 넓은 범주의 변형된 땅을 모두 지우겠다고? 거의 산의 반절을 소멸시키는 셈이다. 소모되 는 마법력도 마법력이거니와, 기술 력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도 의 것이다.

입을 떡 벌린 것은 나뿐만이 아 니다. 언제나 황제의 곁에 있어서 웬만한 마법에는 이제 놀라지 않는 디펜더들도 낯빛이 변해 뚫어져라 그의 손 사이에서 늘어나고 있는

‘소멸’의 물체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의 손안에서 자라난 물질은 더 이상 황제의 양팔로는 감싸 안을 수 없을 만큼 크게, 크게 자라 하늘 을 반절 가릴 만큼의 크기가 되었 다.

그는 가벼운 것을 던지듯, 양팔을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내밀었다. 소 멸의 덩어리는 그대로 날아가 흙덩 어리에 처박혔다.

서걱.

칼로 오이라도 자르는 것 같은 작은 소리. 그게 전부였다.

3년 가까이 말라 있던 지류에는 갑작스레 둑이 터진 듯 강물이 흘러 들었다.

계곡 위에서 함께 그 광경을 보 고 있던 테포다의 병사들은 오금이 저리는지 바닥에 철퍽 주저앉았다. 이미 설치되어 있는 마법진이나 병 기의 효력도 저만큼 강할지도 모른 다.

하지만 걸어 다니는 한 개인의 지나치게 강한 힘은, 사람을 심리적 으로 무너지게 만든다.

락이 쓰게 웃었다.

“이거 너무한데. 자네 재위 기간

동안 우리 애들은 덤빌 생각도 못 해 보겠군.”

반이 그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럼 덤빌 생각을 할 셈이었나 봅니다.”

마주 웃는 두 정상의 웃음 사이 에는 싸늘한 기색만이 감돌았다.

실각

귀환을 준비하는 동안 비뉴스는 이상할 정도로 내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고, 황제도 계속 나와 함께 움직였다.

나는 스케줄 관리라도 제대로 해 보려고 했지만, 둘이서 어찌나 잔소 리를 하는지 계속 치료를 받거나 얌 전히 누워 있어야 했다. 당최 자료 를 보질 못하니 멍청이가 된 기분이 었다.

막상 짐을 꾸린 다음에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순식간이었 다.

나머지 일행 중 다수의 기병과 일부 마법사는 계곡에 계속 주둔해 있을 모양이었고, 황제와 함께 돌아 온 나머지 일행은 몇 번에 나누어 이동 마법을 사용한 결과였다.

이제 내 집처럼 익숙한 부르크 황궁의 윤곽이 멀리 보였다. 돌아왔 다는 기분이 물씬 들었다. 차례로 기병이 말을 달려와 현 상황을 보고 해 왔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이변은 없는 것 같았다.

이변이라고 한다면, 황태후의 세 력들이 현 사태를 슬슬 눈치채고 꼬

리를 자르기 시작했다는 걸까?

“농성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이 상하게 잠잠하군.”

“그러게요.”

우리가 주변을 살피며 황궁까지 마차를 몰고 가는 동안, 승전 소식 을 들은 시민들이 온통 환호하는 소 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는 귀찮은 신세라며 한탄해 댔다.

“그래도 나가셔야죠, 폐하.”

“그래……?

그는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익숙하게 백마에 올랐다. 어디에도 숨지 않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어깨를 펴고 행렬의 중심이 되는 모 습. 마차에서 바라보아도 그가 얼마 나 빛나는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었 다.

문득, 황제 폐하에게 지금 나는 정말로 필요 없는 사람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과 관련하 여 반려니 뭐니 하는 말이 돌았던 이상, 내가 황제 폐하의 곁에서 태 연히 비서 직무를 수행하는 게 가능 할까?

나야 상관없다고 한들, 비 후보 가 되실 분께는 실례다- 그리고 이 제 저 폐하에겐 저주라는 족쇄도 없다.

돌아가면 곧장 동생의 얼굴을 보 러 가야지. 그리고 동생과 함께 떠 나야겠다.

이제 골디나는 부르크와 한 나라 가 되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국적이 바뀌진 않는 장점이 있 을 거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밖을 구경하고만 있는데, 저 멀리에 있는 황제와 시선이 맞닥뜨렸다.

뭔가를 들킨 것 같은 뜨끔한 기 분에 난 저도 모르게 창문 커튼을 내려 버렸다.

심장 위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고

있자, 황성에 도착할 때쯤에는 아무 렇지도 않게 되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