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국가 대 국가, 제국 대 제국의 전 쟁이 어떻게 될지가 이 회담에 달려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회담이었고, 각 국가의 황제가 직접 나와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다들 말을 조심하 느라 섣불리 나설 생각도 하지 못했 다.
아니, 좀 더 똑바로 말하자면 나 서지 못하는 건 테포다 측이었고, 우리 쪽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었 다.
회담을 괜히 지지부진하게 진행하 는 동안 황제 폐하는 괜히 관심도 없는 땅을 과하게 탐내는 듯 굴었 다. 덥석 들어주기에 무리한 조건에
테포다 황제 락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교섭을 마쳐 보고자 덤 벼들기에 바빴다. 그들의 시선을 가 려 놓은 사이, 반 황제 휘하의 직속 마법사 디펜더들은 본국으로 돌아갔 다. 제록스의 도움을 받아 황태후 관할의 마법 장교들이 수련하는 장 소를 덮쳐 금기 마법을 실제로 사용 했다는 자료를 확보하러 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난 별로 전 쟁을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시간을 끄는 것도 끄는 건데, 실제 로 전쟁이 길어져도 별로 상관이 없 었다.
내가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살
면서 깨달은 것은, 얕보이면 끝이라 는 거다. 고아원에서도 동생의 빵을 훔치는 녀석은 끝까지 쫓아가 똑같 이 해 주었고, 쥐어박히면 눈을 똑 바로 뜨고 대들기라도 해야 같은 일 을 당하지 않았다. 세렉의 일은 말 해 봐야 입만 아프다.
솔직히 다른 나라의 황제에게 저 주를 거는 테포다 제국과는 까짓것, 전쟁을 했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볼 신민들에 대해서야 마음 아프지만, 지금 전황으로 승리가 점 쳐진다면 굳이 피할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내가 제일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주체겠지.
난 함부로 지껄이기로 했다.
“모두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황제 폐하와 곧 혼인할 사이였 습니다. 공표하지 않았을 뿐, 다들 아는 공공연한 연인이었죠. 그런 저 를 데려다가, 언데드 굴을 막자고 밀어 넣다니요? 저는 협상할 안건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뭘 받는 다 한들 속이 풀리겠습니까?”
아무리 미리 다 짜고 치는 판이 라지만, 양국의 정상이 모인 자리다-긴장하여 혀를 씹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마당에 간 크게 말하는 날 보 고 다들 정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한 눈치였다. 조금 당황한 얼굴로 3 황자와 속닥이는 테포다 제국의 재 상을 보고 난 피식 웃었다.
반 황제가 더해 보라는 듯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나는 보란 듯이 생채기가 가득 생긴 팔을 걷어붙여 보였다. 멍이 온통 들어 있는 팔뚝을 보여 준 다 음에는 얼굴에 생긴 생채기도 잘 보 이도록 붉은 머리를 걷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긁혔는지 약을 발 라도 뺨에서 목까지 길게 이어진 흉 터는 아직 남아 있었다.
마법도 안 듣는 마당에 이딴 짓 을 해 놓다니. 이게 다 망할 테포다
놈들 때문에 생긴 상처다. 어떻게든 살아남기야 했지만.
지금껏 잘도 뭔가를 중얼거려 대 던 테포다 측은 당황했는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찔리겠지. 여자애 하나를 팔아 나라의 위해를 막으려 했으니. 막연하게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 일 인데, 막상 그 당사자가 눈앞에 앉 아 나무라기까지 하면 아무래도 대 꾸할 말이 없겠지.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황 제 락이 날 쏘아보고 있었다. 6 황 자의 수급으로 일을 무마하려던 그 할아버지다. 난 눈싸움으로 별로 져
본 적이 없었다. 그를 마주 쏘아봐 주자, 락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말로 반과 혼인할 사이었 던 것도 아니질 않소. 거, 이름이 뭐더라? 셀레스티아 비서. 사정은 잘 알았으니까.”
이 결혼 문제가 자작극이라는 것 은 우리도 다 알고, 테포다 측도 다 안다. 납치당하고 보니 반려 후보였 다니, 말도 안 되겠지. 내가 소중해 서가 아니라, 일을 더 심각한 것으 로 만들기 위해 그리 발표했다는 것 은 잘 알 터. 다만 문제는 이렇게까 지 자작극을 할 정도로 열받아 있다
는 거다.
난 뻔뻔하게 팔짱을 꼈다.
“어처구니가 없네요. 황제 폐하와 제 사이에 대해서 뭘 알죠? 전 그 냥, 이 의미 없는 회담 그만하고 각 자 병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네요. 하던 전쟁이나 마저 하게.”
내가 말하고도 너무 심했나 싶어 슬쩍 주위를 살피는데, 반 황제의 적안이 살짝 휘는 게 보였다. 물론 남이 보면 그냥 무표정에 심드렁해 보일 뿐이겠지만, 안면 근육이 원체 굳어서 그렇지 잘 살피면 그 안에 표정이 다 있다. 웃겨 죽겠단 얼굴 인 거다, 지금.
문득 때도 장소도 모르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황당하게. 지금 이 상 황에서.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생각 했던 미소를 봤다는 것만으로.
“하, 부르크의 여러분께선 농이 심하시군.”
3 황자의 중얼거림을 듣자 가만 히 있던 리온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발언권을 청했다. 그러곤 공손한 태 도로 입을 열었다.
“외람되오나 테포다의 폐하께서는 저희 폐하와 셀레스티아 님의 관계 를 의심하시는 것 같습니다. 공표하 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오나, 곧 정
식으로 혼례를 올리실 사이인 것은 맞사옵니다. 그러니 자격을 의심하 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리온이 진지하게 그렇게 나오자 락 황제는 이제 반신반의하는 얼굴 이 되어 내 볼의 생채기를 쏘아보았 다.
이제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아 니,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할 필요 가 있나? 그냥 어물쩍 넘어가면 되 는 거잖아. 출신도 신분도 이렇다 내세울 게 없는 나야 허세를 부린다 지만, 남까지 말을 보태면 이제 슬 슬 자국의 신뢰성 문제인데.
하지만 그만하라고 무릎을 톡톡
건드려 봐도 평소엔 눈치도 좋던 리 온 공작은 까만 눈알을 빛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해 댔다.
“따뜻한 계절에 혼례를 올릴 예정 이오니, 그때가 되면 참석을 부탁드 리겠습니다.”
저렇게까지? 아니…… 누가 들으 면 진짜인 줄 안다. 물론 진짜인 줄 알면 좋겠지만…… 그래도 외교인데 이렇게까지 거짓말을 해도 되나?
좀 당황해서 눈만 깜박거리고 있 는데, 황제가 문득 문 쪽을 돌아보 더니 테포다 측에 양해를 구했다.
“잠깐 쉬고 오겠소.”
우
그러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나와 리 온에게도 따라 나오라고 눈짓을 했 다. 밖에 나가 보니 디펜더 둘과 제 록스가 있었다. 우리가 나온 것을 보자 제록스는 크게 절을 해 보였 다.
난 감정이 복잡해져서 아무런 말 도 하지 않고 제록스를 쏘아보고 있 었다.
그가 르베르티티의 오빠라는 것과 그녀를 구해 내려고 애썼다는 것에 는 놀랐고, 그가 어떻게든 내게 도 움을 주려고 졸업 과제에 힌트를 남
겨 준 것에는 고마웠다. 그래도 나 와 황제 폐하를 등진 무리에 속해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분노했다. 한 사람에 대해서 하나의 태도만 정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나 대신 리온이 말을 걸었다.
“증거는?”
“확보했습니다.”
황제가 르베르티티를 구해 낼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들었다. 그 뒤로 제록스는 이렇게 황제를 지원하게 된 모양이었다.
“마법 장교들을 다 잡았나?”
“아니요. 하지만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것은 확실합니다. 마법진은 확 보하여 일반에 공개해 버렸으니 이 제 와서 발뺌할 수도 없을 겁니다. 마법 장교들은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만 도망간 이들도 몇은 있습니다.”
“……세렉은요?”
“도망갔습니다.”
하여튼 언제나 꽁지 빠지게 내빼 는 것 하나는 잘하던 녀석이었으니 까 난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소문나지 않게 잘 단속했겠지?”
“네. 하지만 지금쯤이면 황태후 본인과 직속 부하들은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건 상관없다.”
“그리고 부탁하셨던 것은 여깄습 니다.”
가리킨 쪽을 보니 인간의 키만 한 검은 상자가 제록스의 옆에 놓여 있었다. 관처럼 생긴 것을 보자 오 싹한 기분이 먼저 들어서 멀거니 보 고만 있는데, 황제가 열라는 듯 턱 짓을 했다. 병사 두 명이 뚜껑을 열 었다.
“그가 그 ”
아직 살아 있는 채로 꽁꽁 묶인 사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옷
차림은 보란 듯이 골디나의 전통 의 복이 었다.
“말씀하신 대로 연회장 습격을 준 비하고 있던 범인들입니다.”
하나가 아니었단 뜻이다. 황태후 도 참 부지런하지. 합병한 나라들과 의 반목을 조성하랴, 제 아들의 세 력을 불리랴, 황제에겐 독약을 먹이 랴.
“나머지는요?”
“가둬 뒀습니다.”
“……설마 또 골디나인이 한 짓인 척하고 일을 벌일 셈이었던 건가 요?”
“그렇습니다.”
금기 마법을 써서 힘이 강해지는 그런 좋은 효과만 있다면 얼마나 좋 겠냐마는, 실제론 몸 안에 천천히 악마를 불러들이는 기술이다. 저렇 게 눈이 희게 뒤집혀 있는 것을 보 면 이미 부작용에 잠식당한 후다. 황제 폐하도 못 알아보고 그르륵거 리는 그 사내를 훑어본 황제는 나지 막이 말했다.
“이제 황태후 측 인사들이 어떻게 나올지에 달렸군.”
“……어떻게 나올까요?”
“뭐, 뻔하겠지.”
부르크 내 황태후의 세력은 아마 우리가 본국으로 돌아오려면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회담 이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녀의 가장 주효한 마법 병력이 그런 식으로 힘을 잃었다.
이제 어떻게 나올지는 손바닥 들 여다보듯 뻔한 일이다. 남은 병력을 모으려 하겠지.
“우리가 먼저 돌아간다.”
“ 네?”
“황태후는 우리가 오랫동안 여기 에 머물 거라고 짐작하고 있을 거 다. 며칠째 계속 회담을 하고 있을
뿐더러 전쟁도 초입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복귀한다. 준비 하라.”
그 자리에서 제록스의 말을 듣고 있던 디펜더와 기사들이 일제히 경 례를 붙였다. 난 그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제, 그 기나긴 황태후와의 실랑이가 어 떤 식으로든 막을 내리게 되는 걸 까?
“몸은 괜찮나?”
위에서 툭 떨어지는 목소리에 얼 른 고개를 들자, 내 목에 난 상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얼 굴이 있었다.
“……아, 네. 괜찮다고 3일째 말 씀드리고 있는걸요. 아까 회담장에 선 엄살을 부린 것뿐인걸요. 다들 거기선 본심이 아닌 말을 하잖아요. 폐하께서도 그러셨듯이……
“난 그런 적 없다.”
“네? 하지만……,”
황제는 대답하는 대신 뚜껑을 다 시 덮은 관을 쳐다봤다.
“황태후 건에 대해선 몇 번을 감 사해도 모자라군.”
대답을 피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면 착각일까?
“아니에요. 그걸 기억했던 건 르 베르티티고…… 살아서 말을 전할 수 있는 것도 르베르티티의 덕인걸 요.”
“네 덕이기도 하질 않나.”
“뭐…… 그렇긴 하죠. 늦지 않게 와 주실 줄은 몰랐지만.”
“모든 걸 빨리 정리하고 싶다.”
“뭐,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황태 후 측이 금기 마법을 썼다는 것이 공개되면 일단 명분은 저희 쪽입니 다. 멍청이가 아닌 이상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려 들겠지요. 모두들 빠르게 황태후와의 관계를 잘라 버
리고 각자 살길을 도모한다면 좋겠 는데요.”
“그렇게 될 거다, 틀림없이『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