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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76화 (76/103)

- 76화

“……미안하게 됐다. 그건.”

“미안하다는 말로 모든 게 다 괜 찮아진다면, 아무도 고생하지 않지.”

“하지만 이제 와서 뭘 바라는 건 가.”

“딱히 바라는 건 없다. 가지고 온 그 수급도 필요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저주 풀린 망아지가 얼마나 날뛸 수 있는지 체험시켜주는 것뿐 이니까.”

“……하.”

잘못 건드려도 단단히 잘못 건드 렸다. 락은 짜증스레 제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다시 잘 생각해 보시게, 이보시 오.”

불만 있으면 말해 보라는 듯 턱 짓하는 반을 보는데, 락은 속이 부 글부글 끓었다. 반의 아버지도 마음 에 들었던 적이 없었지만 그 핏줄이 어디 가질 않았는지 그 집안 자식도 저 꼴이다. 싸가지가 없는 것도 유 전자에 새겨져 있는 걸까?

그때, 회견장 앞에서 우물쭈물하 고 선 옅은 노란 눈의 사내가 눈에 띄었다.

“저자는 뭐지?”

반은 흘끗 뒤를 돌아보곤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리지.”

기다리라고? 무슨 중요한 일이라 도 있나? 하지만 자국의 화산이라도 터지지 않은 이상, 양국 정상 회담 중에 대체 무슨 소식을 전한단 말인 가?

흥미 어린 락의 시선을 받으며 반은 천막을 빠져나갔다. 비뉴스는 그 둘을 주목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을 확인하자마자 급히 입을 열었다.

“어떤 때라도 급히 말씀 올리라 하셔서 말씀드립니다.”

“뭐지?”

“셀레스티아 님께서 정신이 드셨 습니다.”

반의 눈빛이 일변했다.

“내가 가지.”

“……아닙니다. 여기로 오고 계십 니다.”

“오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 지?”

“무슨 일이 있어도 즉시 폐하께 꼭 드려야 하는 말씀이 있으시다 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제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비 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깨어난 것에 대해서 놀라 시고, 그리고…… 황제 폐하께 폐를 끼치게 되었다고 하시곤, 어디에 계 시냐고 하셔서……

“그래서?”

“아직도 제 지위와 신분이 그대로 냐고 물으셔서 그렇다고 말씀드렸더 니 의복을 차려입고 여기로 오고 계 십니다. 곧장 말씀을 드릴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하시면서…… 제가 전해 드리겠다고 해도, 꼭 본인이 해야 할 말씀이 있으시다고……

기가 막혔다. 그 여자는 대체가. 아무리 어디가 아파서 드러누워 있 는 게 아니었다고 해도, 깨어나서 바로 돌아다닐 생각을 하다니.

의식만 되찾으면 되는 게 아니질 않은가.

“그걸 그냥 두었나?”

“……하지만 너무 절박하게 말씀 하셔서.”

“정말 기가 막히는군.”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반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고 말았다. 셀 레스티아가 곧장 회담장으로 와야겠 다고 생각했다는 건 그 정도로 상태

가 좋다는 거다.

영영 잃었다고 생각했던, 바닷가 의 모래성처럼 스산하게 스러져버렸 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어쩜 그렇게 든든할 수가 있 을까.

“오면, 말해.”

“네, 알겠습니다.”

반이 회의장에 다시 들어섰을 때, 모두가 다른 사람이 돌아온 거라고 착각할 정도로 그는 전혀 다른 분위 기를 띠고 있었다.

“계속 진행하시죠, 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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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나갔다 오더니 왜 그렇

게 표정이 다르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 교섭하 고 싶은 게 뭐라고 하셨던가.”

락은 의아한 눈으로 반을 쳐다봤 지만, 반은 더 이상 속내를 드러내 지 않고 사무적으로 회담을 진행해 나갔다. 약 한 시간 정도 의미가 없 는 지지부진한 대화가 오갔다. 아무 도 한구석에 놓인 붉은 상자를 거들 떠보지도 않았다. 6황자의 수급 같 은 것을 애초에 달라고 한 적도 없 었다. 급한 불을 끄겠다고 제 아들 의 목을 잘라온 테포다 황제의 속만 더 시커메 보일 뿐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대화가 진 행되는 중에 테포다 측에서는 배상 금을 일부 지불할 의사를 밝혔다. 부르크 측에서는 답변을 미루고 잠 시 대화를 소강했다.

반이 임시 천막을 걷고 나왔을 때는, 마차가 당도해 있었다.

“……기어코 왔군.”

그는 쓰게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리온은 동행하지 않고, 10분 내로 돌아오라는 말만 덧붙였을 뿐이었 다.

마차 안에는 그리 안색이 좋지 않은 셀레스티아가 눈을 느리게 깜 박이며 앉아 있었다. 할 말이 많은 지 마음이 급한 얼굴로 입부터 달싹 였지만,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황제는 셀레스티아를 품으로 당겨 안았다.

“……폐하?”

살아 있다.

붉은 깃털의 새를 안은 것 같았 다. 퍼드득거리며 곧 날아가 버릴 것 같다는 기묘한 환상이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시렸고, 품 안에 있는데도 묘하게 그립고 안타

까뭤다. 정말 이상하게도 품에 안으 니 비로소 더 가슴이 허전했다.

“ 폐하……

곤란한 듯한 목소리가 한 번 더 나고서야 황제는 팔을 풀어 주었다. 셀레스티아는 눈이 동그래져서 황제 의 붉은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이 눈이다. 그리웠던 것은, 이 시선이다. 저 주홍색의 눈망울이 다. 그 눈은 황제의 얼굴과 팔, 손 을 한 번 훑어 살피더니 곤란한 듯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이제 괜찮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아직…… 마법을 쓰시면 부효과가

나타나십니까?”

“아니, 이제 괜찮다.”

“그렇다면 방금…… 아닙니다.”

“그런 것보다, 너는 괜찮은가?”

“……네. 저는, 폐하께서 와주신 덕분으로그보다 어찌하여 이렇 게 갑자기 전쟁을…… 아니, 그보다 도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와주셨습니 까.”

“우연이다. 설마 너 하나 보자고 왔겠는가.”

셀레스티아의 볼이 조금 달아올랐 다.

“그런 착각을 한 것은 아닙니다. 폐하께선 항상 그리 짓궂게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저 하나 때문에 이 리 달려오신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그래도 너무 빠르게 오신 것이 아닌 가 하여……/

반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뺨을 쥐었다. 뭔가 말을 주워섬기던 셀레 스티아는 시선을 정면으로 맞닥뜨려 오는 황제의 눈길에 그만 저도 모르 게 말을 멈췄다.

“폐……하.”

위험하다. 뭔가가.

셀레스티아는 심장 속에서 자라나

는 익숙하고도 악랄한 감정에서 재 빨리 눈을 돌렸다. 그리곤 본래의 할 일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뭐지?”

“황태후 마마의 실각사유를 찾아 냈습니다.”

“ 실각사유?”

“지금이라면 증거를 곧장 손에 넣 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황제는 천천히 셀레스티아의 얼굴 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등받이에 기 대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이 상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일밖 에 모르는 반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

다.

“말해 봐.”

“……그것이.”

그녀는 제가 이번에 쓴 금기 마 법이 무엇이며 황태후가 제 마법 장 교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마법이 무 엇인지 일일이 설명했다. 그리고 르 베르티티가 한 증언까지도.

“황태후가 세를 불리기 위해 금기 마법에 손을 댔다. 이건 확실히 실 각사유가 되고도 넘치겠군. 애매하 게 증거를 잡기 힘든 독약이나, 저 주를 사주했다는 증언을 확보하는 것보다도 괜찮겠어.”

“저주 사주의 증언이라면……,”

“좀만 더 몰면 테포다의 황제가 알아서 불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좀 더 정확한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군.”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잘했다.”

셀레스티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가 방긋 웃는 것을 본 황제는, 마차에서 이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셀레스티아의 입에 키스했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은 그녀의 입을 깊게 탐한 반은

천천히 물러났다. 셀레스티아의 아 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잇새로 놓 아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뒤로 물러 난 반은, 엄지를 들어 그녀의 입술 을 닦아주었다.

자제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셀레스티아의 시선이 제 눈을 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즐겁지 않다. 황제는 주먹을 꾹 눌 러 쥐었다. 이렇게까지 나약한 자제 심을 가지고 잘도 살아왔다.

그녀는 얼떨떨한지 눈을 데룩데룩 굴리다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저주가 풀려도 여전히 그러

실 수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렸던 거니까…… 하 지만, 이제 저주가 없으니까 예상하 지 못해서…… 마법을 최근에 많이 쓰셨으니까 물론 그럴 수 만……

있겠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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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서 그런 게 아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데, 내 미 안하다.

앞으론 했었는 말도 제대로 못 지키는군.

“그, 그런 게 아니라

“앞으론 정말 다시는 이런 일 없

도록 하겠다. 원한다면 뺨이라도 맞 아주지.”

“……괜찮습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그보 다 더 쉬어라.”

“전 괜찮습니다.”

“그래.”

반은 주먹을 꽉 눌러 쥐곤 마차 를 빠져나갔다. 셀레스티아는 눈으 로만 황제를 쫓다가, 탁 소리가 나 고 문이 닫히고서야 양손으로 천천 히 볼을 감싸 쥐었다.

대체 뭐였지? 방금 그 키스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듯 한 키스였다. 지금까지의 키스도 물 론 격정적인 것이었지만, 그건 타당 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것은…… 부효과 때문이 아니라고?

황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부효과에 대해서는, 그리고 저주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 은 부분이 많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왜 그렇게 말씀하셨지?

아깐 너무 당황해서, 낯을 붉힐 겨를도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뒤늦 게 얼굴이 터질 만큼 달아올랐다. 셀레스티아는 양손으로 볼을 꽉 움

켜쥐고 몸을 숙였다.

여전히 강녕하게 잘 지내는 모습 이어서 다행이었다. 제가 곁에 없어 도 잘 지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제 가 쥐여준 정보가 아니라도 충분히 황태후를 해치웠을 황제여서 다행이 었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진 협상 테이블 의 3일째. 부르크 제국 측에서는 새 로운 참모를 참가시켰다. 바로 황제 의 비서, 셀레스티아였다.

서로 증언을 확보하고 말고, 돈을

얼마 줄 수 있느니 특산물을 내놓을 수 있느니, 전쟁을 소강할 생각이 있니 없니 하는 실랑이로 지루한 회 의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이제 와서 한 명의 신하가 더 참가한들 뭐가 달라질 일도 없을 거라는 게 테포다 측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지위와 이름 을 듣고 난 뒤, 그들은 기가 질렸 다.

분명 언데드 굴에 6황자가 제물 로 바쳤다고 한 그 여자가 아닌가? 그 여자를 도대체 어떤 수로 살려냈 기에 그 여자가 회의에 참석한단 말 인가? 게다가 설령 살려냈다고 한

들, 그렇다면 언데드 굴은 지금 어 떤 상태인 건가? 설마, 입구가 뻥 뚫려 있는 상태란 말인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창백 한 낯을 한 작은 여자 한 명이 전 체 판도를 바꿔놓았다. 테포다 측 참가자 모두가 셀레스티아만 빤히 바라보며 회의를 시작했다.

게다가 붉은 머리를 한쪽으로 넘 긴 그녀는 비서복인 듯한 간편한 복 색 차림이었을 뿐이었지만, 일단 황 제의 반려라 공표된 자였다. 신분으 로나, 지위로나, 어느 면으로 보아도 주목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전날과 같은 지지부진한 협상 안

건이 오가지도 않았다. 모두 진지하 게 그녀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하도 절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시선에 질린 셀레스티아가 가만히 손을 들었다.

“제가 발언을 해도 괜찮습니까?”

반이 흘끗 그녀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셀레스티아는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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