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우웩.
그녀의 입에서 흰 액체가 한 줌 튀어나와 바닥을 적셨다. 괴로워하 는 얼굴에도 굴하지 않고 황제는 주문을 마무리했다. 새하얗던 눈알 에 서서히 빛이 되돌아오기 시작했 다.
더 이상 서 있는 것 자체가 무리 인지 셀레스티아는 주위를 살피지도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명백히 인간의 혈색으로 돌아온 그녀를 황 제는 두 팔로 안아 들었다.
안아 든 채로 그녀의 코에 얼굴 을 가져다 대자 아주 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품 안에 안은 몸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 도로 차가웠지만, 그에게서 체온이 옮아가서 천천히 따뜻해지는 것 같 았다.
“완전히 죽은 줄로만 알았다.”
대답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았다.
황제는 비눗방울을 안듯이 셀레스 티아를 아주 부드럽게 고쳐 안고, 바깥으로 향했다. 발치에 쓰러져있 는 르베르티티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테포다 측의 회견 제안 소식은 빠르게 부르크 진영으로 전달되었 다. 하지만 3황자의 참석 소식을 들은 반 황제는 전령으로부터 받아 든 두루마리를 바닥으로 내동댕이 쳤다.
“자식 간수를 똑바로 못한 황제 본인이 직접 기어 나오라고 해.”
전령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고개 를 조아렸다.
“하지만, 저희 3황자님께서 직 접……-”
“3황자가 나올 거라면, 이쪽에선 시종을 보내겠다. 그걸로 괜찮나?”
부르크 쪽에서는 무조건 황제가 출석할 테니 급을 맞추라는 뜻이었 다.
설마 황제가 직접 회견에 응하리 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전령은 새로운 소식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 갔고, 테포다 제국의 황제 락은 치 를 떨었다.
“어린 자식이!”
“어떻게 전하면 좋겠습니까?”
“……젠장.”
황제끼리 만나는 거라곤 하지만, 전황이 기울기도 전에 본국 황궁에 서부터 달려나가서야 그렇게 모양
새가 빠질 수가 없다. 제발 더 이 상 밀고 들어오지 말아 달라고 사 정하러 가는 꼴이나 다름없지 않은 가.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테포 다의 황제는 이해득실을 잘 따질 줄 아는 자였다. 자존심보다 지켜야 할 것이 더 많았다.
“알겠다. 내일 출석하겠다고 전해 라.”
“ 네.”
전령은 새로운 전갈을 쥐고 허겁 지겁 텔레포트 지점을 향해 달려갔 다.
종전(1& 빼)
회견 일정이 모두 조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자, 남은 짬을 틈타 반은 루벤틀 계곡 위로 홀로 산책 을 나갔다. 루벤틀 계곡 위에 서면 언데드 굴의 입구가 잘 내려다보인 다.
아래에는 오십 가량의 마법사와 백 명가량의 기사들이 애를 쓰며 동 굴 입구를 봉하려고 하는 것이 보였 다. 사람을 오십은 나란히 이어붇여 야 할 듯한 거대한 직경의 마법진이
동굴 입구를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 었다.
본디 있던 고대 마법진을 부활시 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거다. 한 달 정도 가는 임시 봉인 정도라면 백 명이 함께 외는 대형진으로 어떻게든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동굴 입구부 터 굴을 파서 테포다 제국의 수도 한가운데로 이어주고 싶었지만
그때 기사들의 틈 사이로 녹색 머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 게 보 였다. 제록스인가 뭔가 하는 아카데
미 강사 녀석이 저놈이군.
따지고 보면 첩자 노릇을 한 거 나 다름없다. 다른 나라의 아카데미 에서 일을 할 정도라니. 꽤 위장을 잘했지.
저놈을 죽일까, 살릴까 싶어 쏘아 보고 있는 사이에 제록스는 동굴 입구 한 켠 시쳇더미로 다가갔다. 시쳇더미 틈바구니에서 저와 꼭 같 은 색의 녹색 머리 여자를 어떻게 든 찾아내더니, 그대로 어깨에 들쳐 메곤 어느 쪽으론가 걸어가기 시작 했다.
저 자식은 죽여도 그만, 안 죽여 도 그만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저 녹색 머 리 여자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 것도 맞겠지만, 역시 동일인물 때문 에 셀레스티아가 살아남아 있는 것 도 맞았다.
이래서 은원이 엮이는 것은 귀찮 다.
쉽게 상벌을 판별할 수 있는 게 제일 편하다.
반은 속으로 한껏 짜증을 부리며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어차피 저 제록스 강사라는 자가 있는 길드 에는 앞으로 연락할 일이 또 있을 테다.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지금은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반은 동굴 입구에서 계속되고 있 는 사냥과 마법진 형성 작업에서 시 선을 떼곤 성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이 전쟁을 오래 끌 생각 은 없었다. 애초에 소수 정예로 쳐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보급 의 부담이 없었지만, 곧 문제가 생 길 것이다. 게다가 이 인원으로 공 성해 나가는 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 하고 물러날 것인 가.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는 것 은 맞으나, 쉽게 물러나 줄 생각은 없었다.
제국 간 전쟁은 선전 포고 하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 주변 외교의 판 도가 정해지게 마련이었는데, 이렇 게까지 한쪽의 잘못이 명명백백한 이상 주변국도 끼어들지 않을 확률 이 높았다.
물론 명분보다는 실리겠지만, 부 르크를 거스를 배짱 좋은 나라도 찾 아보기 어려울 테고.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그는 루벤틀 영주 성의 가장 큰 방에 도
착했다. 임시로 그가 기거하는 방이 었다.
“오셨습니까, 폐하.”
리온과 수석 마법사 둘, 비뉴스가 셀레스티아를 지키고 있었다. 침대 에 누운 셀레스티아는 죽은 사람처 럼 꼼짝없이 누워 숨만 겨우 내쉬고 있었다.
“어떻지?”
수석 마법사는 고개를 가로저었 다.
“바이탈 사인은 모두 정상으로 돌 아왔습니다.”
“ 의식은?”
“그게 좀처럼……,”
금기 마법이라는 것은 본디 자료 가 매우 적게 마련이었다. 할 수 있 는 조처를 다 했다곤 해서 어떤 식 으로 용태가 진행될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셀레스티아는 마법이 통하 지 않는 몸이다. 마법으로 회복 보 조를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니, 물 리적인 약을 사용하는 게 유일한 방 법이었다. 의식이 깨어나야 회복이 빠를 텐데.
반이 한숨을 쉬며 셀레스티아의 손을 꽉 쥐었다. 아직 체온이 제대
로 돌아오지 않은 손은 차갑기만 했 다.
리온이 그의 표정을 보더니 갑자 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두에게 손짓을 했다.
“우린 옆 방에 있을 테니까, 필요 하면 불러.”
모두가 물러간 뒤, 황제는 셀레스 티아 옆에 앉아 한참을 그녀를 내려 다봤다.
자는 얼굴을 보는 것은 잦은 일 이었다. 셀레스티아는 늘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똑 부러지게 굴었는데도, 그런 그녀답지 않게 어
디서건 잘 쓰러져 잠들어 있곤 했 다.
그런 빈틈이 재밌기도 하고 귀엽 기도 해서 매번 침대로 손수 날라주 곤 했었다.
세상모르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시선을 뗄 수 없다는 생 각을 하곤 했다. 그녀의 자는 얼굴 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생각이 정리 되었다.
제가 하는 정치와 이 나라를 꾸 려나가는 과정들이 마냥 재미없게만 느껴지기보다는 조금쯤 의미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으니까.
그냥, 오래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 랬을까.
한참을 자는 얼굴을 바라봤다.
반은 셀레스티아의 머리를 몇 번 이고 쓸어 넘겨주다가 그 볼을 손으 로 짚었다.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작은 얼굴이 창백한 것이 얼마나 마 음 쓰이는지 몰랐다.
“돌아오겠다고 했질 않았나.”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황제는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쓸 며 혼자 읊조렸다.
“이 내가 남의 나라 황실까지 몰
래 찾아가는 치졸한 짓거리를 해가 면서 데리러 갔는데도 거절하고, 알 아서 잘 돌아오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그랬으면, 돌아와라. 내 가…… 쓸데없는 욕심은 내지 않는 다. 정신만 차려라. 그거면 됐으니 까. 나를 할 수 있는 게 없는 자로, 무력한 자로 만들지 마라.”
이미 닿았던 적이 있는, 감촉을 알고 있는 입술이 눈앞에 있었다. 반은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손으로 쓸었다가, 볼과 이마를 다시 쓸었다 가, 손을 거두었다.
만질 때마다 심장 부근에 따끔따 끔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던 탓이
었다.
썩 유쾌하진 않았다. 감정에 이름 을 굳이 대자면, 그리움과 닮아 있 었다.
눈앞에 있는데도 아주 많이 그리 웠다. 말을 나누고, 웃음을 마주하 고,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 은 초조함이 심장 근처의 샘에서 풍 덩거리며 뛰놀았다.
쓸데없다. 감정이라는 것은 본디.
황제는 이 감정도 파도처럼 곧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그녀의 손을 가만히 쥔 채로 앉아 있었다.
양국 모두 시간을 질질 끌지 않 고 곧장 회견장을 꾸렸고, 하루가 지난 뒤, 각국의 대표는 회견장으로 향했다.
황제 두 명이 직접 회담하는 장 소이니만큼 임시 천막 주위에는 양 국의 병사들이 각기 20기씩 정렬해 있었다.
이외의 병력이 접근하는 것을 쉽 게 확인할 수 있는 탁 트인 평원의 한가운데 였다.
양측의 측근이 5명씩 대동된 자
리였다. 열두 명은 천막 안의 간이 테이블에 나란히 정렬해 앉았다. 각 자 자국 측에서 우려서 내놓은 차를 앞에 한 잔씩 놓고 앉은 게 퍽 인 상적인 모습이었다.
“늦으셨습니다.”
“제가 늦었습니까.”
겸양 있는 인사로 시작했지만, 보 기 좋게 떡 벌어진 어깨를 자랑하는 잘생긴 반의 모습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락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많이 컸군, 망아지.”
반도 얌전히 들어넘기지는 않았 다.
“그러는 분께선 많이 늙으셨군. 머리털이 몇 을 없는데, 괜찮나?”
“……무례하게!”
“내가 먼저 무례하게 군 기억은 없는데.”
황제 둘이 격식도 생략하고 서로 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을 본 가신들 의 낯은 흙빛 그 자체였다. 황제들 의 기분에 따라 전쟁이 격화되기도 하는 것이라, 괜히 감정에 불이 붙 을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두 황제는 서로를 쏘아 보며 할 말을 죄 쏟아내기에 바빴
다.
“너무 삐딱하게 나오지 말게. 내 아들이 실수를 하긴 했지만, 갑자 기 전쟁이라니. 정도가 심하질 않 나.”
픽
정말 웃는 소리에 락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리라 생각 했지? 대뜸, 네 자식 목을 잘라오면 기뻐서 다 내려놓고 물러갈 줄 알았 나?”
“하지만……
“저주를 건 건 네놈일 텐데. 그
때문에 내가 한 고생과 겪었던 고통 을 생각하면…… 당장 그쪽의 남은 머리털 올올마다 불을 질러도 속이 편치 않아. 왜, 변명이라도 해보시 지.”
여기에서는 락이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이 좋아 전략적 행동이지, 사실 국제 사회에서 얼 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비 열한 행동이었던 건 사실이었으니 까.
반의 입가에 매달려 있던 웃음은, 눈을 깜박하고 다시 쳐다보자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듯 쏘아보
는 그 붉은 눈은 어찌나 지독하게 사람을 위압하는지 모를 것이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