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아바마마! 이거 놔라! 무엄 하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하지만 병사들은 흔들림 없이 굳 게 황자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6황자의 시선이 제 아비를 향했 다. 그는 팔이 붙들리지 않았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아바마마,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한 일은, 아바 마마께서도 아시겠지만, 모두 테포 다 제국민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아바마마도 아시질 않습니까! 제가 한 일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은
제국이 언데드로 난리가 났을 겁니 다.”
그 열정적인 호소에도 테포다 황 제의 낯은 변할 기색이 없었다. 그 저 심드렁한 얼굴로 제 아들을 바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일을 그리 진행하겠다 말씀 드렸을 땐, 아바마마께서도 분명 좋 다고 하시질 않으셨습니까!”
“ 아들아.”
“……네?”
“시끄럽구나.”
“……아바마마!”
“차라리 언데드가 좀 튀어나오는 게 나았다. 어쨌든 익숙한 사태고, 막을 수 있었을 테지. 그 미치광이 황제의 코털을 건드리는 것보다는 나았어.”
“……허나!”
테포다의 황제는 목에 핏대가 서 도록 열변을 토하는 아들을 힐끗 보 곤 주먹에 턱을 괴었다. 그의 머릿 속에는 어떻게 아들의 수급을 빨리 전해주고 협상 테이블을 제안해볼까 하는 것밖에 없었다.
더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손만 젓는 황제를 바라본 병사들은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몸을 비틀 어대는 6황자를 끌고 나갔다. 제아 무리 마법을 잘 쓰기로는 테포다에 서 1인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쿤 이라고 하여도, 마법 감옥 구조로 만들어진 알현실에선 힘을 쓸 길이 없었다.
그리 머지 않아, 붉은 상자를 든 장병 하나가 알현실로 돌아왔다. 상 자에서는 피가 배어 나와 땅에 떨어 지기까지 했다. 내용물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테포다 황제 락은 그것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 다.
“이걸로 시위도 좀 잠잠해지겠 지.”
3황자는 제 동생이 들어 있는 상 자를 바라보며 침울한 얼굴을 했지 만, 그 또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겠지요, 아바마마.”
“욕심이 너무 과하면 화가 되는 법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이걸 가지고 가서 교섭하고 오너라.”
“ 네.”
“별 가치도 없고 골칫덩어리기만 한 루벤틀을 먼저 쳤다는 것은, 거 기에 갇힌 그 비서라는 여자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는 것임에 틀림없 다. 이 수급을 가져가서 교섭을 시 도하러 왔다고 전하라.”
“알겠사옵니다, 아바마마.”
3황자는 가볍게 인사를 올리고 곧장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벌 써 루벤틀 계곡까지 도착했다고 하 는 기동력이다. 시간을 더 지체했다 간 얼마나 거대한 규모의 전면전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자국의 땅에서 치르는 전쟁만큼 달갑지 않은 것은 없었다. 언데드에 오래 시달린 지금의 테포다 제국은 전면전을 치를 만한 여력이 없었고, 그는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 다.
가능하다면 더 빨리, 부르크 황제 의 화를 누그러뜨려야 했다.
살아 있을까? 함정일까? 아니면, 살아 있었다가 너무 늦은 도착에 죽 었을까?
루벤틀 계곡에 도착하기까지 황제
의 의문은 그것 하나였다. 같은 질 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 고, 묽은 머리칼 사이로 환하게 웃 는 얼굴이 아른거렸다.
어쩐 일인지 황태후 측에서는 이 번 전쟁에 대해 어떤 의견도 내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최초 공격지와 루트에 대한 설명에도 시 큰둥했다. 그저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은 느낌 이었다.
제약이 없는 황제의 힘은 막강했 다. 국내에서는 텔레포트를 이용했 고, 국경 근처에서부턴 기병이 사용 하는 말의 다리에 마법을 건 뒤, 모
든 덫과 알람마법을 격파하며 달렸 다.
마법사들은 차례대로 보조마법을 사용해가며 말의 체력을 돋웠고, 결 과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마법부대만으로는 보병과 창병이 있는 군대를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이 부대는 적은 수의 기병과 합을 맞추어 순식간에 국경 을 지나 3개째의 성을 집어삼키고 루벤틀까지 삼켰다.
루벤틀에 당도하여 더 이상 진격 하지 않고 당분간 진을 치기로 결심 한 뒤에야, 그들은 기를 내걸었다. 주변의 다른 성에서 이변을 눈치챈
것도 그즈음이었다.
“테포다 측의 반응은 아직인가?”
“오늘 중으로 전령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일단 주요 인사들만 잡아두 었고, 대부분의 군사를 죽이지 않고 쫓아 보냈으니…… 그쪽에서도 본격 적인 전쟁을 할 마음이 없다는 건 알아듣겠지.”
“본격적으로 할 마음이 없다 라…… 글쎄.”
“험한 소리는 그만해. 아무튼 일 단은 무슨 일이 있을 기색은 없어.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 정도야.”
리온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
해한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폐하. 아니, 반.”
“이제 와서 말릴 생각인가?”
“……함정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이렇게까지 무방비한 상태의 성이었 고. 끌어들일 거였다면 이미 뭐라도 했겠지. 다만, 내가 걱정되는 건 그 고대마법인데……?
황제는 리온의 어깨를 툭툭 두드 렸다.
“무리하지 않겠다.”
이으 하
“곧 돌아오지.”
“알았어.”
황제의 확신에 찬 얼굴이 더욱 걱정이었다. 리온의 불안한 얼굴을 일별한 황제는 그대로 성벽 위로 올 랐다.
그 위에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해 가 정확히 가운데에 떠 있었다. 정 말로 반나절 만에 여기까지 올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수족들 덕분이었다.
이제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다른 자들의 눈에 띄는 화려한 보랏빛 망토를 벗어 던지자, 눈에
띄지 않는 검은 의복이 드러났다. 그는 그대로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직속 마법부대이자 경호부대인 디펜 더들이 황제의 뒤를 쫓았다.
황제 일행은 루벤틀 계곡 동굴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뉴스와 합류했다.
“상황은?”
비뉴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로서는 바깥에서 알아낼 수 있 는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 방 어막 자체가 물리적인 공격은 전혀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곤 가까이
다가갔다-
방호벽 위에 손을 올리자, 반발 하는 힘이 손을 밀어내려고 하는 감각이 기분 나쁘게 전해져왔다. 깊이 살펴보지 않아도 웬만한 힘으 로는 뚫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 겠다.
이걸 뻥 뚫어놓으면 그 뒤는 어 떻게 되는지의 문제는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고대 마법이 아니면 막을 수 없다고? 그러면 이깟 동굴 입구, 지하에 굴을 뚫어 제록스 제국의 수 도 바닥으로 연결해줘 버릴 생각까 지 들었다.
“……후.”
제록스인지 뭔지 하는 놈이 저를 지목하며 이것을 뚫을 수 있다고 했 다고? 그의 입이 비틀어졌다.
웃기고 자빠진 놈이다. 고대 마법 진을 두고 뭘 어떻게 뚫으라는 건 가? 그냥 제가 보기에 역량과 재능 이 된다 싶으니까 남에게 떠맡기는 것에 불과하질 않는가.
그는 두 손에 순수한 마법력을 응축시켰다. 어떠한 원소의 형태로 변형시킨 얄팍한 마법이 먹힐 방어 벽이 아니었다.
키리리릭!
반의 손에 모여든 힘이 방어벽과
치밀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기괴하게 들렸다. 톱날로 쇠를 긁는 듯한 괴 상한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 자 리에 있는 모두의 귀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다.
방호벽이 뚫리자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언데드들이 동시에 튀어나왔 다.
피부가 녹아내린 인간형의 언데 드부터, 바닥을 기는 슬라임 모양 의 언데드, 점액질을 뿜어내는 타 조 같은 이족보행의 언데드 등 가 지각색의 것들이 제각기 인간을 포 식하기 위한 목적에 충실하여 튀어 나왔다.
각 개체의 힘도 인간의 몇 배에, 촉수가 흔히 붙어 있어 행동반경을 짐작하기 어렵다는 게 그들을 상대 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 들의 입에 한 번 물리는 것만으로 감염되는 것도 치명적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것들이 한꺼번 에 동굴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저 벅저벅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고용량의 마법을 쓰고 난 여파와도 같은 잔류가 반의 몸 주변을 흐르 고 있었다.
그가 달리 행동하지 않아도, 그 잔류만으로도 충분했다. 반에게 달
려들려던 개체들은 모두 이가 동강 나거나 들어 올린 촉수가 불탄 채로 물러났다.
힘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 이 상, 언데드들은 다른 먹이를 찾아 덤벼들었다. 동굴 입구 바깥에서 기 다리던 디펜더들과 비뉴스는 차례로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착실하게 쓰러 뜨렸다.
그들도 황실의 일부가 될 정도로 수없이 많은 수련을 쌓아온 이들이 었다. 언데드가 비록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곤 하더라도, 쉽게 당할 정도로 나약하진 않았다.
황제는 동굴 안으로 한참 나아가
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섰다. 다른 개체들과 공격성에서 차이를 보이 는 두 마리의 다른 언데드가 있었 다.
벤시인가.”
황제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 을까? 바닥에 엎드려 있던 두 개체 가 몸을 일으켰다.
어떤 식으로 살아남는다는 건지, 대략 전해 듣긴 했다. 제록스 강사 가 내주었다는 과제가 무엇인지. 그 가 짐작한 셀레스티아의 생존법이 무엇인지. 하지만, 짐작과 실물을 직 접 보는 감상은 달랐다.
눈에 비치는 무엇이라도 공격할 기세로 주변을 노려보고 있는 두 마 리의 벤시에게 서슴없이 가까이 다 가가자, 반의 기세에 주춤한 벤시 둘이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든 셀레스티아의 얼굴에선 평소의 웃음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반쯤 투명해진 피부 속으로 는 혈관까지 다 비쳐 기괴해 보였 고, 주홍색으로 반짝이던 눈동자는 흰자와 범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 로 희게 보였다.
크르륵.
황제는 절 탐색하는 듯 구는 벤
시 둘 중 녹색 머리 쪽의 목을 잡 아 벽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그 정 도로는 쉽게 기절하지 않을 줄 알았 는데, 아직 완전히 언데드화가 진행 되지 않은 탓인지 눈을 뒤집더니 그 대로 기절해버리고야 말았다.
싸늘한 눈으로 기절한 르베르티티 를 쏘아본 황제는 이번에는 셀레스 티아에게 다가갔다.
“셀 레스티아.”
투명하리만큼 흰 눈동자에, 우유 에 꽃물을 떨어트린 듯 잠시 주홍빛 이 비쳤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내가, 너무 늦었군.”
“크르륵.”
“돌아가자.”
(4 -—| 구3 V
황제는 작게 웃었다. 이런 다 망 가진 상태의 부하를 보는 것으로도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누가 알아 줄까.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크르르.”
황제가 절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감지한 벤시가 그를 물어뜯기 위해 덤빌 자세를 취했다.
“언제까지 잠꼬대를 할 건가? 이
제 깨어나.”
“크2 2 2”
- -11'—드 ―-1 — #
황제는 양손으로 인을 맺었다. 저 주마법을 푸는 마법진 같은 것을 애 당초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제록 스가 전해온 것이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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