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테포다와 부르크 제국의 국경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맞닿는 지점은 본디 그리 넓지 않았 으나, 이번 골디나 합병 건으로 꽤 긴 국경이 맞닿게 된 셈이었다. 직 접 맞닿는 국경은 반나절은 말을 달 릴 수 있을 장거리였다.
그런 마당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되었으니 양측의 국경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매일 철책을 따라 수시로 순찰조를 지어 경보용 마법진과 덫, 목책을 점검하며 순회를 하곤 했다.
하지만 최전선에서 조금 떨어진 루벤틀 계곡까지만 와도 군대의 기 강은 훨씬 해이해져 있게 마련이었 다.
루벤틀 계곡의 보초병들은 언데드 굴의 방어벽이 언제 없어질지 모르 는 기간 동안 내내 밤낮으로 감시 보초를 서야 했다. 그러다 보니 새 하얀 옷을 입은 희생물을 바치는 의 식을 한 뒤로 겨우 숨을 돌리고 휴 식을 좀 취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루벤틀 계곡의 순찰조들은 이제 여유롭게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순찰 을 돌았다. 순찰을 한창 돌던 중, 순찰 3조의 조장이 말했다.
“어차피 전쟁이니 뭐니 해봤자, 다 위협에 불과한데, 이렇게 순찰할 필요가 뭐가 있어?”
긴장감으로부터 해방된 다른 조원 도 피식피식 웃으며 그 말을 받았 다.
“역시 그렇지요, 헤헤헤. 조금만 쉬었다 갈까요. 도시락도 있습니다 요.”
“뭐, 도시락이라고? 한 번 펼쳐 보거라.”
공무 수행 중이라곤 보기 어려울 정도로 해이해진 그들은 신나게 나 무 그루터기 위에 도시락을 풀어놓
았다.
“샌드위치와 삶은 깍지콩입니다 요. 많이 드십시오.”
“이거이거, 너무 맛있겠는걸. 부인 이 싸준 건가?”
“하하, 농담하십니까. 부인이 해줬 다면 황공해서 혼자 먹었겠지요. 제 가 직접 싼 오색빛깔 도시락입니다.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이 골고루 담겨 있는 영양 도시락이지요.”
“어쩐지 솜씨가 좋더라니, 언제나 처럼 자네가 스스로 싼 도시락이로 군.”
“와아 이제 과일로 꽃 모양도 만
드십니다.”
“하하, 이제 겨우 장미 모양을 만 드는 수준이라네.”
순찰조원들은 원래의 순찰 위치에 서 이탈하여 한가로운 숲 한구석에 서 도시락을 펼쳤다. 오색빛깔 도시 락은 참으로 맛있었다.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숲을 울렸다.
바스락.
그때 어딘가에서 작은 소리가 들 렸다. 샌드위치를 입에 막 넣던 조 장이 고개를 돌렸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 데?”
정찰조원으로 평소 열심히 훈련을 받았던 조원들이었다. 아무리 농땡 이를 피우고 있다고 해도, 모두 번 개같이 일어나 소리가 들린 방향을 경계했다.
짹짹. 하지만 수풀에서 튀어나온 것은 자그마한 토끼였다.
“뭐야, 토끼잖아.”
조원이 피식 웃었다. 그는 처음부 터 검도 쥐지 않고 포크를 들고 엉 덩이만 들썩인 채였다. 어차피 여긴 안전하리라는 확신이 있는 거다.
“조장님, 설마 토끼에 쪼신 것입
니까.”
조장은 주위를 조금 더 둘러보았 다. 어쩐지 심장이 뛰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체 왜? 여기에 무 슨 일이 생길 가능성이라곤 없을 텐 데.
그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 지만, 더 이상 살피지 않고 돌아섰 다. 요즘 내내 언데드 굴 때문에 경 계체제를 갖추고 있었더니 정신이 날카로워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요즘 순찰 경계를 하느라 신경이 너무 곤두서 있었던 모양이 네.”
“하하.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여
기에 누가 있다면 이미 큰일인 거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조원들의 말이 맞았다.
사실상, 여기까지 적군이 도착해 있다면 그들이 몰라선 안 된다. 계 곡 너머에서 봉화라도 올라왔어야 하는 것이다. 밤낮없이 경계하고는 있었지만, 사실상 예고 없이 적군을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 름없었다.
조장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돌 렸다.
하지만 조장이 작게 웃곤 다시
고개를 돌려 조원들이 있는 방향으 로 고개를 돌렸을 땐, 피가 낭자한 꼴의 조원들이 제각기 입이 틀어막 힌 채로 절 바라보고 있었다. 팔과 다리 중 하나에 검이 박힌 모습이었 다.
고작 그 짧은 시간에?
“크아악.”
바로 뒤에서, 마지막 남은 한 명 의 조원이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이게 당최 무슨 일이지?”
그리고 조장의 말은 그것이 마지 막이었다.
한칼에 조장의 목을 베어낸 비뉴 스는 가볍게 칼을 털어 냈다. 칼에 낭자한 핏물이 땅으로 흩어졌다.
“폐하, 가시죠.”
황제의 붉은 눈이 바닥에 드러누 운 자들을 바라봤다. 수면제로 재웠 다곤 하지만 아마 한두 시간밖에 지 속되지 않을 것이다. 성을 점령하기 전에만 깨어나지 않으면 저자들은 별 위협 거리도 아니었다.
“그래. 이 정도의 정찰 병력을 배 치해 둔 게 다라니, 정말 테포다 제 국도 썩어빠졌군.”
“황제 폐하, 언제 습격합니까?”
“정찰조를 모두 제거한 뒤, 일시 에 습격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반은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쏘 아보았다. 이 계곡 근방을 수비하는 영주의 자택이었다. 몇 분 만에 주 요 가솔들을 모두 몰아낼 수 있을 까.
거점이 있어야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이것만 처리하고 나면, 곧장 동굴 인지 뭔지를 조사하러 가야 할 것이 다. 거기에 그녀가 있다.
그는 자꾸만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몸을 날렸다.
본디 전쟁이라는 게 그렇다. 나라 와 나라 간의 일이라곤 해도, 주변 소국과의 외교도 있었고, 보급줄을 대기 위한 준비도 해야 했다. 그렇 게 결심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남 의 나라를 짓밟을 수 있는 게 아니 다. 아무리 타국에서 물자를 보급한 다고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번 전쟁은 막무가내였 다. 평원에서의 전투로 서로의 기세 를 겨루고 말고 할 겨를도 없었다.
사전에 조금이라도 눈치를 챘더라 면 방비를 했을 터. 하지만 수많은 덫과 알림 마법에도 불구하고 소식 하나 없이 황제는 국경을 넘어 루벤 틀 성의 사령관실에 들어와 있었다.
“ 항복하라.”
편안하게 오수를 즐기고 있던 영 주는 제가 들을 리 없는 소리에 잠 에서 깨야 했다. 백발이 성성한 나 이가 되도록 영주로 살아왔지만 이 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방 안에 가득한 병사들을 보고 눈을 부볐다. 이럴 때까지 제 가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을 수가
있나?
“누, 누구냣.”
허겁지겁 이불을 끌어안는 루벤틀 영주를 보고 황제 반은 시선을 돌렸 다. 리온이 나서 전할 말을 대리했 다.
“선택하라. 항복할 것이냐, 죽을 것이냐. 어차피 네가 죽어도, 다른 자를 영주로 앉히면 되니 네 마음대 로 선택할 권리를 주지.”
“성을 내어줄 수는 없다.”
단호하게 말은 했지만, 영주의 목 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미안하지만, 이미 성은 우리의
수중에 떨어졌다.”
“왜 국경의 다른 부분이 아니라 하필 돌고 돌아 멀리 있는 우리 성 을 공격했지?”
리온이 한숨을 쉬었다. 일반 백성 들도 6황자의 목을 내놓으라고 성원 이 자자한 마당이다. 당장 루벤틀 계곡이 있는 곳을 관할하는 영주가 이다지도 아무것도 몰라서야.
“언데드 굴이 주변에 있다지.”
“……그렇다. 그건 왜 묻지?”
“거기로 안내해라.”
영주는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물 론 부르크의 황제가 난데없이 쳐들
어온 것은 의외였다. 허를 찔린 것 은 사실이다. 하지만 워낙 없을 법 한 일이기 때문에 허를 찔린 것이 다. 언데드 굴이 있는 지역을 굳이 먼저 점령하는 그런 멍청한 짓을 대 체 왜 하려는 걸까?
망설였지만 영주가 고를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어찌 된 일 인지 잠깐 자고 일어난 사이 성은 옆 나라 황제의 손에 들어가 있었 고, 자국의 지원은커녕, 다른 성에서 는 아직 이 일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것 같았으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목이 떨어지는 꼴을 볼 수는 없었
다. 그리고 염려는 되었지만, 언데드 굴의 봉인을 해제하는 그런 짓을 하 진 않겠지. 그 바로 옆이 자기네 나 라가 아닌가.
영주는 지팡이를 짚고 언데드 굴 입구까지 황제를 안내해주었다.
“여기란 말이지……,”
황제가 그 앞으로 한 발짝 다가 갈 때까지만 해도 영주는 앞으로 무 슨 일이 벌어질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가 그 안으로 손을 밀어 넣기 시작하자 입이 찢어 질 듯 벌어졌다.
우
지, 지금 뭐하는 겁니까?”
“안으로 들어가려고.”
“……미쳤…… 아니, 큰일 날 말 씀을 하십니다. 그 안에 뭐가 있는 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테포다 제국의 언데드들 중에서도 가장 공 격력이 강한 종인……-”
“ 안다.”
“ 네‘?”
황제가 영주를 일견하곤 다시 방 어벽 안으로 손을 밀어 넣으려고 애 를 썼다.
영주는 점점 더 붉어지는 방어막 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걸 어 떻게 해서 복구했는데 저걸 다시 깨
부수겠다고? 대체 왜? 미친 자가 아닐까?
게다가 부서지기나 하겠는가? 저 건 고대의 마법이다. 현대의 마법사 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그 것을 복구하거나 일부 응용하는 것 에 불과하다. 심지어 저 마법의 마 법진은 방어벽 안쪽에 있어서 이젠 그마저도 못한다.
별 헛수고를 다 하는 부르크의 황제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황제의 손이 비눗방울 주무르듯 둥 근 방어막을 자꾸 일그러뜨려 놓았 다. 점점 더 반죽 만지듯 물컹거리 며 황제의 손에 달라붙는 투명한 막
은 마치 곧 뚫리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던 중, 맑은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챙-!
영주는 턱을 떨어뜨렸다. 저 미친 옆 나라 황제가 기어코 고대 주문의 봉인을 깬 것이다.
국제 사회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르크의 소수 전력은 믿을 수 없는 기동력으로 루벤틀 계곡을 집어삼켰다. 으레 각 제국에서는 서
로의 나라에 첩자를 심어놓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전황을 파악할 수 없이 일이 진행되는 것 자체가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뒤늦게서야 출정을 결심한 당일 밤 국경을 점령하여 해가 뜰 때엔 이미 루벤틀 영주의 성을 점령했다 는 것이 알려지자, 모두는 혀를 내 둘렀다. 부르크 제국의 황제는 지금 껏 정복제왕의 아들로만 알려져 있 었는데, 지금껏 발톱을 숨기고 있었 던 것은 남을 벨 의지가 없어서였던 것뿐이라는 것을 모두는 충분히 깨 달았다.
이제 국제 여론은 반 황제 치세
이후 평화롭기만 하던 정세를 바꿔 놓은 테포다 제국의 6황자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다. 본디도 테포다 제국 내에서 6황자의 수급을 내놓으 라는 시위가 파도처럼 일었지만, 이 젠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
“국경이 뚫렸습니다!”
라는 소식을 가지고 나타난 전령 이 물러가기도 전에, ‘루벤틀이 넘 어갔습니다!’는 소식을 다음 전령이 허겁지겁 토해냈다. 테포다 제국의 황제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가만히만 있으면 반은 간다고, 이 제 와서 괜히 부르크 황제의 저주를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남 좋은 일 을 해주는 바람에 전적이 들켜 괜히 욕을 처먹게 되었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다. 도대체 그 황제가 아끼는 여자는 왜 건드려서.
정말로 반려 후보였는지, 아니면 그럴 구실을 만들겠다고 반려니 뭐 니 하는 소리를 붙였는지는 이제 중 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저 전차처럼 달려오는 황제의 화를 달 랠 필요가 있었다. 제국이 통째로 삼켜지지야 않겠으나, 얼마나 많은 피를 더 쏟게 될지를 생각하면 소름
이 끼쳤다.
“닥치는 대로 병사를 긁어모아 루 벤틀 방향으로 보내라!”
“네, 폐하.”
“선봉장으로는 3황자를 보내도록 해라.”
“ 네.”
“그리고, 선물로……,”
“ 네‘?”
알현실에 함께 참관할 권리를 간 신히 손에 넣은 6황자가 문득 고개 를 들었다. 황제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러십니까, 아바마마.”
“저것을 살려두려고 했지만, 그런 식으론 일이 풀리지 않겠구나.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말뜻은 분명했다. 6황자는 파랗게 질린 낯으로 황제 쪽을 향해 한 걸 음을 디뎠다. 순식간에 병사 다섯이 나타나 그를 에워쌌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