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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72화 (72/103)

- 72화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만한 곳에 르베르티티의 방호진이 있었 다. 난 실수로라도 그걸 만지지 않 으려 애쓰며 몸을 웅크렸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많은 개수의 눈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데도, 우 리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그것 탓이겠지. 그리 오래갈 것 같진 않 았지만…… 이 정도 해낸 것만 해도 대단한 거였다.

주위를 에워싼 언데드들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얌 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더 무 서웠다. 이 방호진이 곧 사라진다 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죽음의 예감에 이성이 마비될 것 같았다. 떨리는 르베르티티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곤 난 머리를 움켜쥐 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오래 의식을 잃고 있었어?”

르베르티티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자고 같이 갇힌 거야?”

“그럼 너 혼자 죽는 걸 보라고?”

속이 상해서 소리를 빽 지르자, 르베르티티도 억울하다는 듯 고함으 로 응수해왔다. 바로 눈앞에 언데드 들이 즐비한 상황에 처하자, 마음은 급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

고, 미안하고, 원망스럽고 정신이 하 나도 없었다.

“나도 이런 마법진의 보수는 처음 해본 거니까. 그래서 기절했나 봐. 이제 어떻게 하지? 앞으로 얼마나 버텨?”

르베르티티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어제 저주 푸느라 힘을 썼 더니, 지금 기력이라곤 없어서. 아마 이 방호진 앞으로 십 분도 못 버틸 것 같아.”

젠장.

내게 마법을 쓸 수 있는 힘이 있 었더라면. 내게도 재능이 있었더라

면. 그렇다면 르베르티티가 쉴 수 있도록 방호벽을 써서 교대로 버티 기라도 할 텐데. 왜 나는 이딴 무효 화 마법을 익혀서 마법도 쓰질 못하 고.

분한 마음에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반드시 돌아가서,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황제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보 고 싶었다. 타인을 챙길 줄밖에 모 르는 그에게 가서 조금이라도 버팀 목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를 위 하는 것보다는 나를 위하는 마음이 었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은 항상 즐

거웠고, 행복했으니까.

그냥 그의 손을 잡을 것을 그랬 나?

이제 와서 불쑥 말도 안 되는 마 음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지금이 최선이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일이 꼬이긴 했으나, 그래 도 지금이 최선이다. 황제는 내가 없어도, 저주를 푼 것이 훨씬 더 행 복할 거다. 그리고 나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아마도.

떨리기 시작하는 르베르티티의 팔 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급하니까 생 각은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난 머리를 움켜쥐었다. 나도 죽기 싫어. 죽기 싫은데, 지금의 이 상황 은 너무 절망적이었다.

난 어차피 마법은 못 쓴다. 육체 적인 능력 쪽은 더더구나 전혀 재능 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머리를 쓰는 것뿐일 테지만, 그걸로 뭘 할 수 있겠는가.

문득 황제가 종종 이딴 식으로 억지를 부리곤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잘생긴 얼굴로 씩 웃으면서, ‘그

잘난 머리에 돈을 냈으니, 생각해 봐.’라고 말하곤 했지. 누가 돈 많은 거 모를까 봐.

아카데미의 교수들도 그랬다. 졸 업과제를 생각하면 진짜 어이가 없 어서. 그런 걸 대체 누가 어떻게 하 라고 그렇게 방대한 범위의 과제를

순간 떠오른 것은 제록스 강사가 냈던 졸업 과제였다. 조기 졸업 과 제는 두 개를 고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고른 것은 분명 ‘금지된 마 법의 역사와 사례 및 금지 원인에 대하여’, 그리고 ‘이종족 계약 마법

사의 사례에 대하여’였다.

아주 기묘한 방법이 떠올랐다.

“……세상에.”

내 중얼거림이 들렸던지 방호벽 한쪽에 손을 댄 채로 르베르티티가 날 돌아봤다. 벌써 입술 색이 검게 변해 있었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슬슬 한계인 게 눈에 보였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해볼 수밖에 없으니까.

“조금만 더 버텨줄 수 있어?”

“크윽…… 아주 조금은. 뭘 하 게?”

“언데드가 되기?”

“……뭐?”

“짧은 시간이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

르베르티티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지금 괴물이 되자는 거야?”

“언데드는 이성이라곤 없는 종이 야. 다만 상위 서열의 짐승이나 괴 물에겐 덤비지 않아.”

“……그래서.”

“윗 서열의 언데드인 밴시가 되는 술법을 알아.”

“어쩌면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몰라. 삼 일, 그게 최대한이야. 완전히 괴물이 되어버리기 전에 누 군가 우리의 의식을 되돌려줄 주술 을 써주지 않는다면.”

둘의 눈이 잠시 맞닥뜨렸다. 결 국,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란 언 데드가 되는 것밖에 없는 모양이었 다.

르베르티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가 된다니. 금지된 마법임에 틀림없었다. 차라리 인간으로 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허무맹랑하다고 한 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엔 르베

르티티의 책임도 컸다. 그녀는 셀레 스티아가 시도하는 것이라면 모두 따라주고 싶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에 힘 을 주었다. 무리한 마법의 사용으로 장기가 상했는지, 입에서 피 맛이 났다.

“좋아, 크윽, 빨리……-”

르베르티티의 눈에서 단호한 의 지를 읽은 셀레스티아는 제 손가락 을 꽉 깨물어 피를 냈다. 자세히 설 명한 겨를이 없어 하지 않았지만, 이 마법이 금기 마법으로 분류된 까닭은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몸에 불러들인 괴물에게 지배당해

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 이었다.

손가락에 송골송골 맺힌 피를 바 라보다가, 일순 망설임이 들이닥쳤 다. 이게 의미가 있을까? 성공할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죽음의 순간에 괜한 고통만 더 늘이는 일은 아닐 까?

이 마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3 일 안에 타인이 개입하여 주술을 역 으로 풀어내 주어야 한다.

여긴 테포다의 땅. 그들을 내다 버리기 위해 납치한 테포다 황자가 구하러 온다는 경우는 상정해볼 수 도 없었고, 위치를 아는 또 다른 무

리인 르베르티티의 길드원들이 오리 라는 것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들의 길드에 마법을 잘 쓰는 이들이 수두룩하게 많을지라도, 테 포다 제국이 오래 해결하지 못했던 이 언데드 굴 입구의 방호벽을 갑자 기 뚫을 수 있게 될 리는 없었으니 까.

아주 잠깐,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 다가 눈앞에서 스러졌다. 이목구비 가 뚜렷하고, 얼핏 사나운 육식 짐 승처럼 보일 정도의 매서운 눈매를 가진 그 얼굴. 그가 구하러 와 줄 것을 바라서가 아니었다. 그가 어떻 게 제 위치를 알겠는가.

다만, 그의 손을 잡지 못했던 것 때문에, 제가 죽고 나면 황제 폐하 는 슬퍼하리라. 그는 수없이 많은 신하들의 죽음을 일일이 슬퍼해 줄 줄 아는 황제였으니까. 그것 때문에 모두들 그를 진정한 제왕으로 인정 하고 목숨을 바치려 했으니까.

그를 생각하면, 늘 지독한 그리움 이 몰려들었다. 정체를 알고 있는 두근거림도 간혹 찾아왔으나, 이제 는 별로 필요 없는 감정이었다.

셀레스티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 다가 피가 고인 손가락으로 땅에 진 을 그렸다.

그래. 여기서 그냥 죽느니, 뭐라 도 해보리라.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보자.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정신을 집 중했다. 금기 마법에 대해 졸업 논 문을 작성했던 것이 그리 오래된 것 은 아니었으나, 많은 사례 중 하나 로 지나갔던 것에 불과한 마법진을 그릴 정도로 상세히 떠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틀 린다면, 생존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 이다.

연습할 시간은 없다. 셀레스티아 는 단숨에 머릿속에 떠오른 정교하 고 복잡한 마법진을 일필휘지로 그

려 냈다.

얼굴이 흙빛이 되어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르베르티티는 마법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같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주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몇 번 이나.

“저게 소환진이라고?”

“으 아

흐.

“……세렉이랑 마법 장교들이. 그 러니까 황태후가 데려간 마법 장교 들이 저걸로 수련하던 걸 본 적 있 어. 속성으로 마법을 익히는 거라고 하면서…… 매일 그 위에서 수련하

고 명상한다고 하던걸.”

마법을 익힌 그녀 입장에서는 기 분이 나쁠 정도로 굉장히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눈 여겨보았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 다.

르베르티티가 마법진의 테두리에 그려 넣은 뒤집어 새긴 원소 기호 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셀레스티아 는 눈을 찌푸렸다. 이것과 흡사하 게 생긴 일반 마법이 있을 리가 없 다. 몬스터 소환술의 기본 술식이 었다.

“어떻게 이런 걸 기억하고 있어?”

“내게도 권했으니까.”

“미쳤군.”

그들은 강해지고 있는 게 아니다.

상위의 존재에게 점점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다.

셀레스티아는 다급히 마법진을 완성하면서도 혀를 찼다. 자국의 마 법사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없으니 골디나에 있던 마법 장교들 을 흡수하려고 했던 속내가 너무 뻔했다.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어떤 미끼가 필요했겠지. 그게 강해지는 수단이었고, 그것이 금기 마법이었

다니

금기 마법은 처음 본 사람이 그 종류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녹록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버섯이 독 버섯이 아닌지 눈으로는 판독하기 어려운 것과 같았다.

이 마법진을 사용했다는 증거만 잡아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확실한 실각의 자료가 되리라. 금기 마법으 로 군대를 양성했다니, 도대체 얼마 나 큰 중죄일까.

꼭 살아서 실각의 증거라도 전해 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까 지 증거를 손에 넣지 못해 황제가 그토록 고생을 한 것이니까.

그녀의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아 주 불길한 전조의 검은 연기가 작게 피어올랐다. 셀레스티아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마법진 을 완성했다. 완성된 오망성의 마법 진에서 어둠이 튀어나오기 시작했 다.

마법진이 완성됨과 동시에, 방호 벽을 짚고 있던 르베르티티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방호벽이 걷히 면서, 언데드들이 한꺼번에 둘에게 달려들었다.

마법 시동을 할 수 없는 셀레스 티아가 마법진에서 손을 뗌과 동시

에 르베르티티가 구동어를 읊었다.

“디 페어봔들롱!”

크르륵.

셀레스티아는, 아니, 셀레스티아였 던 것은 언데드들에게 뒤덮여 쓰러 진 채로 낮게 울었다. 언데드들은 분명 제 먹이였던 것에 촉수를 뻗다 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이제 바닥 에 누워 있는 저것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먹이가 아니었다.

중력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누군 가 위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모습처 럼 기형적인 자세로 머리부터 일어 난 셀레스티아는, 제 색깔을 잃은

새하얀 눈을 번뜩거리며 주변을 둘 러봤다. 분명 인간의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그 생물은 상위 포식자 언데드, 벤시였다.

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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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주홍빛이 눈을 뒤덮었다 싶 었지만, 눈꺼풀이 다시 덮였다가 떠 진 눈동자는 다시 흰색으로 돌아갔 다. 몸에서 피어오르는 악령의 기운 또한,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 다.

언데드들은 한 발짝씩 뒤로 멀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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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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