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화
등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보았겠 지. 늦은 시간인데도 리온이 면회를 신청해왔다. 언제고 리온이 오면 알 리라고 당부해 놓은 터였다.
리온은 다급한 걸음걸이로 걸어들 어왔다. 그러곤 황제의 침대 옆 의 자를 보고도 선 채로 말을 시작했 다.
“ 폐하.”
그의 초조해 보이는 얼굴에 반도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근육이 도드 라진 벗은 상체를 대충 로브로 가린 그가 리온에게 의자를 권했다. 밝은 빛이 있는 곳에 마주하고 앉자, 리
온은 반의 안색이 썩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리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단단한 의지를 가진 성품의 황제였다. 그런 그에게도 언 젠가 무너지는 순간이 오리라 생각 하긴 했다. 누구나 철인이 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반, 괜찮나?”
반이 고개를 들었다. 영혼이 사라 진 듯한 눈빛이 바뀐 것은 아니었지 만, 그 속에 분노가 일렁이고 있음
을 느낄 수 있었다.
“ 괜찮아.”
“……술이라도 마시는 게 어때.”
“좀 더 모든 것이 명확해지면.”
그제야 제가 달려온 이유가 생각 난 리온은 제가 멋대로 진행한 조사 에 대해 급히 늘어놓았다.
“테포다 제국에 있는 첩자들을 통 해 거듭 확인해 봤지만, 셀레스티아 양의 죽음은 거의 확정적인 모양이 야. 어쨌든 정확한 위치는 알아냈어. 루벤틀 계곡에 있는 거대 동굴의 입 구다.”
루벤틀 계곡의 언데드 굴.
반은 눈을 꽉 눌러 감았다. 개미 굴의 뚜껑으로도 불렸던 적이 있다 는 동굴이다. 언데드 굴이라고 해서 어디나 영원히 쏟아져 나올 것처럼 언데드가 득실거리고 있는 것이 아 니었다.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동굴 중 유독 그 수가 많은 곳이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곳이었다.
“죽음은 확정적이라……-”
리온은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거듭 확인해 봤지만, 셀레스티아 양이 동굴 안에 갇힌 것을 목격한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 의심할 여 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봐도 좋을 정 도야.”
“……그렇겠지.”
황제는 어느새 계속 눈에 띄는 곳에 두게 된 비서 배지를 쳐다보곤 몸을 뒤로 기대었다. 리온은 말을 계속했다.
“그것 때문에 6황자의 수급이라 도 내놓을 기세인 걸 보면…… 정 말 테포다 황제도 냉혈한이야. 제 자식 목을 따서 전쟁을 막을 수 있 다면 그렇게라도 할 생각인가 보더 라고.”
“그딴 목 필요하다면 내가 직접 따겠다고 전해. 그런 걸로 수습할 생각 말고 제가 건 저주나 원망하라 고도 전해.”
“그래서?”
반의 붉은 눈이 스르륵 리온을 쳐다봤다. 의욕이라곤 없는 눈동자 였다.
“그래서라니, 무슨 말이야?”
리온은 입에서 꺼내기 어려운 말 이라는 듯 우물쭈물거리다가, 한숨 처럼 말을 토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 셀레스티아 양의 동생에게 이 소식은 대체 언제
전할 거야? 이미 사방팔방에 소문이 다 났는데. 공식적으로 사람을 보내 서 애도를 전해야지.”
황제는 얼굴 위에 손을 덮곤 가 만히 있다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리고 손도 아래로 내렸다. 크고 마디가 굵은 손을 깍지낀 그는 쥐어 짜듯 말했다.
“언제까지 죽음을 입에 담지 않는 것도 무리겠지. 해야 할 일을 회피 하고 싶은 것도 참 오랜만이군. 해 가 밝는 대로 가서 알려라. 누이가 죽었으며, 그것은 전부 나의 탓이라 고. 그리고 초상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똑똑똑.
예상하지 못한 노크 소리에 반의 말이 뚝 끊겼다.
이런 시간에?
리온과 반이 시선을 마주하곤, 리 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향해 다가갔다.
밖에 선 시종은 곤란한 표정이었 지만 언제고 찾아온 이를 거절하지 말라는 황명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말을 전했다.
“기사 비뉴스께서 황제 폐하를 뵙 고자 청하옵니다.”
“비 뉴스……?”
셀레스티아의 호위 기사였던 남자 가 아닌가.
황제는 혀를 차곤 고개를 끄덕였 다. 당최 무슨 낯으로 기어왔는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 싶었다.
그 비서의 귀환
비뉴스가 전해온 소식에 반은 귀 를 의심했다. 셀레스티아가 살아있 을 가능성이 있다고?
황제와 리온은 비뉴스의 이야기를 빠트리지 않고 꼼꼼하게 들었다. 몇 번을 다시 말해 보게 하고 나서야 둘은 시선을 마주했다.
반은 이야기가 몇 번 더 반복되 는 사이에 몸을 똑바로 세우고 앉 더니, 창밖을 한 번,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곤 제 앞의 기사를 쏘아봤
다.
“그 말을 들은 게 언제지?”
“두 시간 전입니다.”
“느리군.”
“송구합니 다.”
비뉴스는 그 질책의 말이 정확히 어떤 연유로 하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해 눈을 깜박였다. 제록스는 놓쳤 을까 봐 하는 말일까? 그게 아니라 면, 늦은 면회 요청에 대한 질책일 까? 그는 문득 깔린 침묵이 무거워 느리게 말을 이었다.
“곧장 알현을 청하러 달려왔습니 다만…… 함정일 가능성이 더 많습
니다.”
어떻게 들어도 함정처럼 들리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고개 를 저었다.
“유인책으로 쓸 거라면 처음부터 죽었다는 소문을 내지도 않았겠지.”
“허나 국경 너머의 장소입니다. 황제 폐하를 직접 뵙길 청하는 것 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 다. 의심스러운 점이 많아 이렇게 전달하러 달려오긴 했습니다만
“아니다.”
(4
네?”
“국경 너머의 장소라는 것 말이 다.”
“ 네?”
비뉴스는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고개를 들었다. 무례하게도 고개를 들어 보아 버린 황제의 용안에는 비 틀린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언제까지 국경이 지금 그대로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섬뜩하기도 하고 심장이 쿵 쿵 뛰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다시 경례를 붙였다.
고개를 들고 본 반의 얼굴에는 아까까지의 기운 없던 표정은 없었
다. 황제 반은 언제나 언데드 굴을 토벌하러 가는 원정 첫머리에 서던 선봉장의 얼굴 그대로를 하고 있었 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맹수와도 같은 자신감 가득한 얼굴. 반짝이는 붉은 눈.
리온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황제를 쳐다봤다.
“왜 갑자기 그런 얼굴을 하는 거 야? 저 말 대로라고 해도, 별로 달 라지는 건 없는 것 같은데.”
반은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와 같 이 태양처럼 반짝이는 눈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는 것 같군.”
"어……?”
“제록스라는 자가 말했다고 하질 않았나. 셀레스티아가 그가 준 정보 를 알아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살 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렇긴 하지만……-”
“내 비서는 우수하다. 난 그만한 머리를 본 적이 없어. 저주를 풀어 버리고, 내 몸을 낫게 하고.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는 건 사 실 그 뛰어난 머리였다. 졸업 논문 이든 뭐든, 그 강사 자식이 알려준 게 있다면, 그리고 그걸 활용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사실이기만 하 다면, 셀레스티아는 백 퍼센트 살아 있다.”
“……희망을 갖는 건 좋지만, 반.”
“아니, 희망이 아니야. 정말로 그 녀는 우수해서, 그녀가 그런 중요한 것을 떠올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 는 것 자체가 무리다.”
리온은 셀레스티아가 똑똑한 것을 분명 여러 번 보긴 했지만, 황제가 지나치게 확신하는 것은 나중에 또 다른 실망을 낳게 될까 염려되어 표 정을 펴지 못했다.
비뉴스 또한 황제의 확신에 제가 함정으로 그를 밀어 넣은 것은 아닌 가 우려되는지 어쩔 줄 모르는 표정 이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의 붉은 눈 이 비뉴스를 훑었다.
“왜 내가 그래야 하지?”
“……이번에야말로 지켜 드리게 해 주십시오. 살아 계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거기에 제가 있고 싶습니다.”
그대로 스쳐 지나갈 것 같던 황 제가, 비뉴스의 목소리에 서린 짙은
후회를 느꼈는지 발을 멈췄다.
“네가 모시는 자를 쉽게 내놓은 것을 후회하고 있나?”
“……물론입니다.”
“더 후회해 두는 게 좋겠지. 출정 은 두 시간 뒤다. 준비해라.”
두 시간 뒤 출정이라니. 지금은 늦은 밤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빠른 출정이 가능한 것인지, 항상 훈련을 해온 그로서도 가늠할 수 없 을 정도의 파격적인 쾌속 진행이었 다.
하지만 비뉴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절도있는 경례를 붙였다.
“기쁘게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한밤중의 소집령 후 정확히 한 시간 반이 지난 뒤, 황실 앞 연병장 에는 기병대와 마법 부대만으로 조 직된 군대가 칼같이 정렬했다.
이번 출정 인원에는 황태후가 양 성한 마법 장교들은 포함되지 않았 다. 스쿼드론 12개 부대와 25명 단 위의 마법 부대 2개가 전부였다.
시시때때로 있는 언데드 굴 원정 에 익숙한 멤버들이기도 한 정예부 대였다. 천 명도 안 되는 조촐한 인
원이 모여 있을 뿐인데도 하늘을 찌 를 것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환한 달빛에도 빛나는 무기 하나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밤에도 빛나지 않 도록 숯 칠한 무구를 장비한 탓이었 다.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난 뒤, 비로소 성벽 위에서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심에 빠진 황제라는 소 문과는 다르게 눈빛이 형형한 모습 이었다.
“나는 현재의 국경을 변형할 생각 이다. 루벤틀 계곡도 과거에는 부르 크 제국의 땅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명을 받듭니다.”
“명을 받듭니다.”
처음에는 전체의 부대를 이끄는 대대장이, 그리고 소대장들이, 마지 막으로 전체가 입을 모아 하나의 목 소리로 대답했다.
“구출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소문을 들어 알고 있겠지만, 그 사 람은 나의-.”
황제는 그답지 않게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다시 입을 열어 똑똑하게 발음했 다.
“그 사람은 나의 소중한 사람이 다. 내 사람을, 부르크의 사람을 건 드렸을 때, 우리가 어떻게 보복하는 지 똑똑히 피로 보여주자.”
“명을 받듭니다.”
“가자.”
드 드 드
75— 75“ "〒’
작은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마법 사와 기사들이 일제히 말에 올랐다. 말들은 마치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소리 하나 없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부대는, 순식간 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셀레스티아, 셀레스티아! 빨리 일어나!”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 을 떴다. 어찌나 다급한 목소리인지 피곤이 눈꺼풀을 짓누르는데도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으음, 르베르티티?”
“일어났어? 괜찮아?”
뭐가?
나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선을 주위로 돌리자, 그르륵 거리 며 침을 흘리고 있는 입이 먼저 눈
에 들어왔다. 내 머리통 같은 것은 한 입에 씹어 삼킬 듯한 거대한 입 이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벌어져 있었다.
언데드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 나는 이 내 더 헤아리는 것을 포기했다. 시 야에 들어오는 것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언데드가 있을지 모르겠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