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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70화 (70/103)

- 70화

반은 제 방에서 바로 연결된 서 재에서 이틀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일을 내팽개친 것은 아니었 다. 오히려 평소보다 과하게 일했다. 다만 시간이 날 때마다 비서실에 가 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다시 일어서 곤 했다.

그의 비서실로 배정한 넓은 서재 는 똑 부러지게 잘 분류되어 있었 다. 그래서 키가 작은 여자가 쓰기 편하도록 높은 책장을 모두 비운 채 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 방의 책상 위에는 각종 언어 통.번역 자료들과 사전, 의전에 필 요한 자료들, 그리고 황제의 스케줄 표 따위가 정갈하게 쌓아 올려져 있 었다.

그것들을 조금만 들추어 봐도 새 로운 언어들을 배우느라 씨름한 흔 적이나, 모든 일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행하고자 노력한 것을 쉽게 찾 아볼 수 있었다.

부효과를 해결하는 능력 때문에 필요한 사람이었다, 셀레스티아는.

그렇다면 이제 그녀가 없어도 상 관없어야 할 터인데.

반은 셀레스티아가 종종 엎드려 잠들곤 했던 책상을 쏘아보고, 그녀 가 머물렀던 방을 둘러보았다.

셀레스티아의 죽음이 알려진 뒤에 도, 그녀의 방은 따로 정리하지 않 고 그대로 둔 채였다.

그가 하사한 드레스와 옷가지들을 빼면 별달리 짐이랄 것도 없는 단출 한 방이었다.

이것들은 이후에 동생에게 보내 주어야 할까.

아카데미 시절 썼던 책들이 쌓여 있는 책상을 슬쩍 훑어보던 반은 작 은 종이를 문득 발견했다.

싼값에 만들 수 있는 ‘움직이지 않는 초상화’였다.

마법이 발달한 골디나에서라면 마 법사가 아닌 일반인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싼 물건이었다.

그 종이 속에는 아주 어린 세 명 의 꼬마가 나란히 서 있었다. 붉은 머리가 둘, 엷은 갈색 머리가 하나.

반은 무심코 종이를 다시 내려놓 으려다 손을 딱 멈췄다.

“이 꼬마……,”

분명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하지만 그런 꼬질꼬질한 옷차림 과, 골디나 특유의 도시 풍경들은 금세 기억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저 꼬마는 분명, 제가 떠돌아다닐 때 만난 그 소녀였다.

저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더 뛰 어난 마법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 래서 그를 노력하게 만들었던. 매일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던 그 소녀.

“그대였군……,”

반의 붉은 눈이 한참을 그 초상 화에 머물러 있었다.

셀레스티아의 방에서 그리 길게

머물지는 않았다. 황제는 영영 거 기에 있을 사람처럼 넋을 놓고 초 상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창밖의 그림자가 어둑해지자 퍼뜩 갑자기 고개를 들곤 제 집무실로 돌아왔 다.

하지만 마음이 차분하지 못해 업 무를 내팽개치고 셀레스티아의 방 으로 갔던 그가, 이제 와서 일이 손에 잘 잡힐 리도 없는 노릇이었 다.

반은 서류를 읽다가 눈가를 누르 고, 또다시 서류의 같은 줄을 읽기 를 몇 번 반복하다가 한숨을 쉬며 긴 의자에 몸을 늘어뜨렸다.

길게 둘둘 말린 두루마리들과 쌓 아 올려진 종이들은 각자 중요한 안 건을 담고 있었다. 대충 보고 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또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 았다. 지치면 종종 손에 열이 오르 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었 다. 지금까지의 그라면 앓아누울 정 도로 마법을 썼다, 분명히. 하지만 저주가 풀린 뒤에는 미리 알약을 몇 개 먹어두는 것만으로도 아무런 증 상이 없었다.

그리고 열이 오르면 종종 안타까 운 얼굴을 하고 제 손을 잡아오던 조그맣고 하얀 손도 없었다. 이제

열도 오르지 않으니까, 필요 없는 일이긴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도 나지 않 아야 할 문제다.

끊어낼 수 없는 생각의 연쇄 때 문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들고 있 는 서류를 집어던지고 두 손으로 얼 굴을 덮었다.

“……이젠 안 아파도 지랄이군.”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비워보려고 했지만, 여태껏 냉정하 고자 할 때는 어떻게든 냉정해질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지금은 마음 대로 되질 않았다. 도무지.

그는 던진 서류를 다시 집어 들 기 위해 몸을 숙였다가, 황비 후보 로 언급되었던 수많은 초상이 곱게 들어 있는 화첩을 문득 바라보았 다.

리온이 품에 가득 안고 들어올 때도 참 거대한 화첩이다 생각은 했 지만, 다시 봐도 정말 어마어마한 두께에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장정의 화첩 이 다.

반은 두꺼운 벨벳표지를 넘겨 안 에 있는 초상을 바라봤다.

다들, 성정에 대해 세간에 호평이 도는 여인들이었고, 아름다웠다. 초

상을 그린 화가가 또 어지간히 공을 들였겠냐마는, 실물을 본 적도 여러 번 있을 정도의 지위를 가진 여인들 이었다.

그도 남자였으니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이 갔고, 기억에 남을 정도 로 아름다운 이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고르기만 한다면, 이 화첩에 있는 여인 중 누구라도 기꺼이 그의 품에 안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려가 되는 것을 꺼릴 이도 없겠 지.

하지만 그녀들을 보면, 그녀들이 보이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선 가문

이 보였다. 그리고 찍어낸 듯한 이 력과 우수한 학력과 아름다움. 어디 서부터 그녀와 가문들을 구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굳이 가문 탓이 아니더라도……소

반은 문득 제가 무엇을 찾고 있 는지 깨달았다.

그래,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 니었다. 이렇게 그녀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황제는 셀레스티아의 방에서 가지 고 온 작은 초상을 꺼내었다. 화려 한 금테 장식이 되어 있고, 고급 물 감으로 그린 실제로 움직이는 동작 초상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초상이

었다.

심지어 배경에 그려져 있는 것은 곧 허물어질 듯한 고아원이었고, 그 초상의 주인공들은 죄다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삐쩍 말라 있었는데 도.

하지만 그것이 훨씬 더 마음을 움직였다.

살아남는 것이 버거운 시절은 그 에게도 있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 기 위해, 황자의 신분을 숨기며 방 황했던 시절이었다.

몇 마디 나눈 것도 아니었고, 대 화의 내용이 또렷이 기억나는 것도

아니 었다.

그냥, 기억에 남아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 리며 기억을 되살려보던 황제는 문 득 깨달았다.

저 고급스러운 화첩에 있는 여자 들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를 알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붉지 않아서. 눈이 주 홍색으로 빛나지 않아서. 제 가슴팍 에 종종 이마를 갖다 박지 않아서. 시선을 곧게 마주치고 피하지 않는 법을 몰라서.

정말로 새삼스러운 자각이었다.

새로운 감정의 자각에 머리가 깨 질 듯이 아팠다. 품에 안았던 셀레 스티아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던 감 각이, 입술을 맞대었던 그 기억이 사람을 돌게 했다. 기억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었다.

쾅.

책상의 어디를 어떻게 주먹으로 내리쳤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지 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책상은 두 동강이 나 있었고, 화첩은 끈이 풀 린 채 낱장들이 흩어져 있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우르르 몰려온 신하들을 상대하는

것도 피곤했다. 반은 손을 저어 모 두를 물려버리곤 머리를 움켜쥐었 다.

“……이게 무슨.”

청소년기도 다 지나질 않았나. 나 이도 먹을 만큼 먹질 않았나.

여태 부러 정을 깊이 줄 여자를 만들지 않으려 신경 끄고 살았던 게 문제였을까. 이렇게 뒤늦게서야 깨 닫는 감정에 정신을 가누지 못하게 될 줄은 몰랐다.

죽기 전에 깨달았더라면 뭔가 달 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와 서?

어이없음에 나는 것은 웃음도 한 숨도 아닌 애매한 분노였다.

이딴 식의 후회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제 가 할 수 있는 양껏 해내며 살아왔 다. 한 번의 결정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이 제가 앉은 자리였다.

아주 작은 의사 결정 하나마다 한 개인에서부터 한 집단까지 영향 을 받는다.

당연히 후회할 일이라면 수두룩하 게 있어 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결정을 내리 더라도 반드시 그 결정에 따른 피해 자는 생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돌이킬 수 있는 후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배워왔다. 후회에 멈춰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의 앞에는 항상 새로운 의제가 기 다리고 있었으니까.

그저 하루하루, 어제보다는 오늘 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는 것만으 로도 벅찼다.

그러니까, 이제는 후회 때문에 머 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일은 없었으

면 했다.

이런 식의 무거운 후회로 눈앞이 캄캄한 일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제 감정을 뒤늦게 알았던 탓일지도 모른다. 제 가 모든 것에 무뎠던 벌일지도 모른 다.

하지만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도, 그렇게 말한 적도 수십 번이 나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안고 싶다는 감정보다 존중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제 마음을 몰랐다.

모든 것이 다 망가져 바닥의 바 닥에서 시작한 그녀가 자신의 힘으 로 싹을 틔우고 발돋움하여 아주 적

은 햇볕에 의지하여 자라나는 모습 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뿌듯하게 했 으니까.

그냥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너무 나 아름답고 밝게 웃어서, 그 옆에 있으면 숨통이 트였으니까. 어떤 이 해관계에 언젠가는 얽히겠지만, 당 장은 외척이고 뭐고 아무 이해관계 에도 종속되지 않은 순수한 그녀의 곁이라면 숨 쉬는 것이 정말로 편했 으니까.

제가 가진 능력을 황제가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뭐 하 나 제대로 요구해 본 적 없는 그녀 가, 제 노력으로 제 자리를 차지하

겠다고 애쓰는 그녀가 멋있어 보였 다.

정말로 제힘으로 모든 것을 일궈 냈기 때문에, 황제 앞에서도 비굴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녀가. 당당함 과 자신감은 노력과 실력에서 나오 는 법이라, 정말로 당당했던 그녀 가 어떻게 멋있지 않을 수 있었겠 는가.

그러나. 그녀가 훌륭하면 훌륭할 수록, 그녀의 머리가 도움이 되면 될수록, 황비의 자리에는 더욱더 어 울리지 않았다.

그 자리는 고독하고도 힘든 자리 다. 평생을 권력에 짓눌려 살아가야

하는 자리다. 제 행복 같은 것은 모 르고, 세력다툼에 눌려 정신없이 일 생을 살다 가야 하는 자리다. 제 아 들조차도 정쟁의 도구로 여겨야 하 는 그런 자리다.

그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 니었다, 그녀는. 그래서 아마, 본능 적으로 그녀를 탐하지 않으려 했을 지도 모른다.

아마 눈앞에 있다 해도 차마, 욕 심낼 생각은 않았겠지.

허나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하려 애쓰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그립지 않은 척하는 것도, 이 전쟁에 이제 는 없는 이에 대해 사심을 연루시키

지 않으려는 것도 지쳤다.

공식적인 항의는 그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리온이 이미 했을 테 다.

하지만 제 감정은 그런 공식적인, 땅이나 재물을 더 얻어내거나 국제 적인 여론몰이를 위한 그런 게 아니 라…… 그냥, 분노였다. 단순히 수습 되지 않는 분노였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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