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저 남자, 분명…… 셀레스티아가 의심하던 그 남자다. 제록스 강사라 고 했던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국내에 다시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 다. 국경에서 잡히지도 않은 걸 보 면 따로 수배령이 떨어지지 않은 건 가?
비뉴스의 노란색 눈에 적의가 감 돌았다. 제록스는 시장통의 좁은 골 목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하나로 질끈 묶은 곱슬거리는 녹 색 머리를 쫓아 골목을 몇 번이나 꺾었는지 모른다. 빙글빙글 돌아 점 점 더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던 제록
스는 어느 집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리고 비뉴스도 얼른 건물 그늘로 몸을 숨겼다. 다시 목을 빼고 내다 보니 제록스는 망설이지 않고 키의 두 배만 한 커다란 대문 안으로 사 라져 버렸다.
비뉴스는 낡은 문을 흘끗 바라봤 다.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작은 간판이 달린 것으로 보아 가정집 같 지는 않았다. 이 안까지 들어간다면 뒤쫓아 왔다는 것을 실토하는 셈이 다.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건 대답이 정해진 질문 이었다. 검 손잡이를 단단히 감아쥐
고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사 나리.”
제록스가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비뉴스는 이를 악물 고 안내하는 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수상한 냄새가 물씬 풍기 는 펍이었다. 평범한 펍에 있었다간 신고당하기 딱 좋아 보이는 흉악한 인상의 남녀가 즐비하게 앉아 있었 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비뉴스는 대충의 승산을 가늠해 보 았다. 당장 문을 부수고 뒤돌아 나 간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정도
일까. 일단 수가 너무 많았다.
“언제부터 눈치챘지?”
“제가 어떻게 기사님의 추적을 눈 치챌 재량이 있겠습니까.”
“헛소리.”
“전 그저, 따라와 주시길 바라며 얼쩡거렸을 뿐입니다.”
비뉴스는 검 손잡이 쪽으로 절로 올라가는 손을 참으며 말했다.
“셀레스티아 님의 일에 관여한 게…… 네놈인가?”
“그런 이야기는 차차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단 앉으시지요.”
부인하지 않는다. 비뉴스는 인상 을 찌푸리며 제록스가 권하는 대로 높은 테이블 앞에 걸터앉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거라면 들어나 보자 싶었다.
제록스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그 의 곁에 앉았다.
“기사님.”
“뭐지?”
“아시다시피, 전 평범한 강사는 아닙니다. 강사가 본업이 맞습니다 만, 간혹 길드에 진 신세도 갚고 있 지요.”
“그래서?”
“제 동생과 기사님이 찾는 사람이 같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설마……,”
‘찾는 사람’이라는 말에 순간 사 고가 멎는 것 같았다. 제가 찾는 사 람이라면 셀레스티아밖에 없을 테 다.
같이 있다고?
아니다. 뭔가 잘못된 정보인 것이 틀림없다. 셀레스티아 님은 분명 죽 었다고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 폐하의 입으로. 지금 장난을 칠 일이 따로 있지.
비뉴스는 인상을 확 썼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수만 번도 넘 게 똑같은 궤적으로 휘둘러 왔던 검 은 순식간에 제록스의 목에 닿아 있 었다. 제록스의 곱슬거리는 해초색 머리칼 몇 을이 잘려서 바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알아듣게 말해라. 네 목 정도는 단박에 날릴 수 있으니까.”
“이거…… 성질이 급한 기사를 상 대하는 것도 참 피곤한 일입니다.”
제록스는 유들거리며 말하더니 연 초를 하나 집어 들어 입에 물었다. 목으로 한층 더 바짝 와 닿는 검을 흘끗 내려다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 하지 않는 게 사람의 짜증을 돋웠
다.
“솔직히 말해서, 기사님께 도움을 청하는 이 상황도 우습긴 합니다 만…… 달리 생각나는 사람이 없더 군요.”
“내가 널 곧장 죽여 버려도 이상 할 게 없을 거다. 넌 적으로 둬선 안 될 적을 뒀다.”
태연히 연초에 불을 붙인 뒤, 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제록스는 피식 웃었다.
“뭐, 셀레스티아 양을 사지로 몰 아넣은 게 저인 건 실토하겠습니다. 테포다 제국에 팔아넘긴 길드에 몸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오 셀레 스티아 양이 굴의 봉인에 사용될 것 도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겠지요.”
셀레스티아가 언데드 굴의 봉인에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온 제국 민이 다 알 정도였다.
다시 상기해도 어이없기 짝이 없 다. 비뉴스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 다.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가는, 그만 저도 모르게 실수로 이 눈앞에 있는 눈이 가는 자식의 멱을 따 버릴 것 같았다.
“솔직히 그쪽도, 여자 하나 바쳐
서 한 도시 사람 전체를 구할 수 있다면 꽤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로서도 그걸 말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오 분명 아끼는 제 자였습니다만……
비뉴스가 주먹에 힘을 꽉 주는 바람에 검이 밀렸고, 단검이 닿은 목에서 한 줄기 피가 흘렀다. 차갑 게 제록스를 쏘아보는 비뉴스의 눈 은 노란 호박빛으로 빛났다. 고양이 의 눈을 연상시키는, 동공이 길고 홍채가 옅은 눈동자에서 살의를 읽 었을까? 제록스는 다급히 말을 이었 다.
“염치없는 줄 알고 드리는 말씀입
니다만, 문제는 거기에 꾸역꾸역 같 이 들어간 제 길드 사람이 하나 있 는데 그게 바로 제 동생이라서 말입 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괜찮으시다면, 부르크 황제 폐하 께 셀레스티아 양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십사 합니다. 그래서 어렵게 몰래 국경을 넘어왔 습니다.”
제록스는 금방이라도 제록스의 명 줄을 끊어 놓을 듯 단호하게 밀어붙 이던 단검을 멈추고 몸을 물렸다.
“뭐……? 지금 뭐라고 했지?”
“물론 확실한 건 절대 아닙니다-둘 다 죽었을 수도 있고, 아주아주 희박한 확률이긴 하지만……/
“죽었다는 건, 다 헛소문이라는 건가? 그딴 말을 믿으라고? 네놈이 한 짓 때문에 테포다의 황자가 유품 을 보내오기까지 했다는데 말이 냐?!”
“그건 아닙니다. 아마, 정말 죽었 을 공산이 크겠지요. 그 방어막을 빠져나오지 못하면 끝이니까요. 하 지만 제가 힌트를 준 적이 있습니 다. 아주 잠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지요. 그리고 셀레스티아 양 이라면 영리하니까, 기억해 냈을지
도 모릅니다. 그리고 운이 따라 줬 다면…… 아직 숨은 붙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 동생과 셀레스티아 양 둘 다.”
함정인가? 원래 듣기에 달콤한 말은 헛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그딴 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제록스는 지금껏 짓던 미소를 그 만두고, 비뉴스를 진지하게 마주했 다. 손에 들고만 있던 연초도 비벼 꺼 버리곤 진중하게 말했다.
“믿으시든 말든 모두 기사님의 재 량입니다. 다만 르베르티티, 제 동생 을 그 황자가 굴 안으로 던져 넣으
리라곤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
리 개는 쓸모를 다하면 버리는 법이
라지만, 저를 도와 일한 길드원을
언데드 굴로 밀어 넣는 법이 어딨습
니까? 제 결백을 믿어 주신다면, 그 리고 저희 길드를 필요로 하신다면, 힘이 닿는 만큼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입니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군.”
비뉴스는 제록스의 눈을 바라보다 가 바짝 들이대고 있던 칼을 거두어 테이블 위에 꽂아 버렸다. 끝이 박 혀 들어간 단검이 조금 진동하다가 천천히 멈췄다.
“살아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
지? 네 동생이라는 여자와 셀레스티 아 님 양쪽 다.”
“글쎄요. 그리 높진 않습니다. 그 리고 아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주 빠르게 더 희박해지고 있겠지요.”
“……그걸 내게 말하는 이유는?”
“다시 복구된 방어벽을 통과할 수 있을 만한 현존하는 마법사는 아마 부르크의 황제 정도일 겁니다.”
비뉴스는 머리를 짚었다.
“증거는?”
“그런 편리한 게 있으면 이런 고 생도 안 하겠지요.“
(4
퍽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군.”
“그리고 이건……,”
제록스가 신호하자 바 안쪽에 서 있던 사내가 주머니를 하나 건넸다. 얼핏 열린 주머니 안으로 투명하고 큰 보석이 박힌 단검이 보였다. 사 치품에 대해서라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비뉴스의 눈으로도 그 값어치 를 짐작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뇌물이라면 필요 없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희 길드 의 충성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물 론, 이 또한 필요 없으시리라 생각
합니다만, 그래도 저희가 의뢰를 부 탁드리는 형식이 이것뿐입니다. 용 병의 방식이라 잘 모르실지도 모르 겠습니다만, 저희의 목숨을 걸겠다 는 뜻이니 받아 주십시오.”
비뉴스는 단호하게 다시 거절했 다.
“필요 없다.”
“압니다. 하지만 받아 주십시오.”
비뉴스는 얼핏 제록스의 굳은 얼 굴을 보았다. 진심을 내비치는 얼굴 인지, 혹은 진심을 연기하는 얼굴인 지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다만 그가 간절하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마음에 하나도 안 드는 자식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제록 스의 말이 진실일 경우, 혹 셀레스 티아의 생존을 점쳐 볼 수 있지 않 을까? 저자의 길드는 어디까지나 현 재 테포다 황실의 개 노릇을 하고 있는 입장인지라 대놓고 접선하기 어려웠으리라. 스스로 구해 내기에 도 너무 눈에 띄는 장소일 테고. 더 군다나 아예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 다면 이렇게 도움을 청해 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함정일 경우에는?
이런 보고를 올린다고 해도 폐하께서 진짜 움직일 거라곤 하기 어렵다. 하지만 물질적인 도 하나 없는 이런 말을 덜컥 다가 어떤 피해라도 입으실 느
황제 생각 증거 전했 시에
숨기고 때부터 이들이 테이블
비뉴스는 복잡한 속내를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올 그를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자리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에 박아 넣은 검으로 다시 손을 가 져가기도 전에, 우락부락한 그 길드 원들은 일제히 어수선한 경례를 붙 여 왔다. 자로 잰 듯 수십 수백 명 이 딱 떨어지는 각도로 손을 가슴에
붙이는 기사식의 경례가 아니었다-각기 다른 지역 출신의 어중이떠중 이들이 자기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붙이는 경례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 다. 하지만 그 동작과 함께 보내오 는 눈빛에서는 어떤 절절함이 느껴 졌다.
르베르티티인지 하는 그 여자가, 저들에겐 중요한 존재인 모양이지.
비뉴스는 경례를 받는 것도, 하는 것도 익숙한 기사였다. 하지만 답인 사를 하는 대신 그들을 한차례 쏘아 보고 그대로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 다.
아무리 적의 적은 아군이라곤 하
지만 마뜩잖았다. 남이 모시는 사람 을 납치해다가 저들 좋을 대로 이용 해 먹고, 그다음 자기네 길드원이 납치되자 뻔뻔하게 도움을 청하는 자들이다.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건물에 들어설 때 예상했던 것과 는 달리 아무런 전투도 없이 무사히 나올 수 있는 것은 어쨌든 다행이었 지만, 한편으로는 찝찝한 일이었다.
비뉴스는 덩굴이 얼기설기 자라고 있는 뒷골목으로 다시 나와 절 감시 하는 자가 있는지 면밀히 확인하며 주위를 잠깐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곧장 황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를 두고 오
래 고민하는 편이 아니었다. 고민은 제 상사가 할 일이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