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옆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황제의 붉은 눈동자에 핏발이 서서, 온 눈 이 붉은 것처럼 보였다. 입술을 앙 다문 황제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 다. 분함에 치가 떨리는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식의 소리 없는 절망을 리 온은 처음 보았다. 누구보다도 강인 하다고 생각한 제 친우의 그런 식의 슬픔을 처음 보았다.
리온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 다.
황제는 분풀이하듯 벽을 또 한차 례 때렸다.
쾅. 굉음이 메아리치며 울었다.
지브 공작과 부르탱을 비롯한 외 척 세력이 한 곳에 모인 것은, 본격 적으로 전쟁을 벌일 기세인 황제 때 문이었다. 그러나 징집령에 어떻게 응해야 할지 몰라 불안한 얼굴을 하 고 있는 외척 세력 귀족들에 비해, 황태후 한 명만은 어쩐지 태연한 기 색이었다.
지브 공작이 앞으로 나섰다.
“황태후 마마.”
황태후가 쥘부채를 접으며 응수했 다.
“다들 이렇게 심약해서는 어찌 대 의를 도모하겠소.”
“허나, 정말 전쟁을 하게 된다면 테포다 황실과 저희의 우호 관계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모두의 흔들리는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지만, 황태후는 눈썹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오히려 슬며시 웃었다.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가 뭐가 있 겠소.”
“하지만
“황제에게 건 저주 이야기는 들었 질 않소? 모두들. 그 망할 너구리 같은 영감탱이가 어떻게든 내 아들 을 황제위에 앉히도록 밀어 주겠다 고 했을 때 뭔가 있을 거라곤 생각 했지요. 하지만 그런 짓을 하고도 내게 입도 벙긋하지 않을 줄은 몰랐 지 않았겠습니까. 정말이지…… 사 내자식 들이란 간교하다니까요.”
황태후는 잘 다듬어진 손톱을 매 만지며 길게 웃었다.
락. 테포다의 황제 양반도 정말 음흉한 구석이 있다. 본처 자식이 정원에서 나무 막대를 쥐고 싸움이 나 하던 어린 시절, 그와 몰래 접선
한 적이 있었다.
기다리면 자연히 죽을 거라고 그 가 호언장담했었다. 그런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종종 앓는 듯 보였으나 황태자는 아주 건강하 게 자라나 결국 황제위까지 계승하 고 말았다. 그 이후 테포다 황제의 시도가 무엇이었건 아주 실패한 거 라고만 생각했는데…… 저주 따위를 걸었을 줄이야.
그런 짓을 해놓고 저에겐 방법까 지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언젠가 제 아들에게도 써먹을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르지.
기분이야 더러웠지만,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다.
저주에 걸린 황제라니. 손쉽기 짝 이 없다.
“시종장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 다니. 이건 뭐, 황위를 바라지 않아 도 내 아들이 따놓은 자리 아니겠 소.”
황태후의 기분 좋은 말에 부르탱 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쯧쯔. 그렇다면 황제가 전쟁에 나서서 날뛸수록, 마법을 더 많이 쓸수록 허약해진다는 것이 아니겠는 가?”
황태후의 말은 그럴듯했다. 부르 탱과 지브 공작을 비롯한 일동은 고 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쩐지 지브 공작으로서는 어쩐지 불안했다.
물론 전쟁을 일으킬 만한 좋은 명분인 것은 맞다. 오히려 그런 일 을 당하고도 가만히 참는다는 게 이 상할 정도로 아주 큰 사건이었다. 아무리 어릴 적에 했던 일이라곤 해 도 결과적으론 ‘타 제국의 황제에게 저주를 건 것’이 공론화된 것이다. 국제적으로 비난을 당해도 싸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만,
황태후에게 보일 약점이 될 것을 알 면서 황제가 그 내역을 공개했다는 점이다.
“……너무 섣불리 기대하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저희가.”
황태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얼굴 에는 이제 승리의 미소가 번져 있었 다.
“무슨 소리오. 황제가 그간 제 비 서를 얼마나 어여삐 여겼는지 몰라 서 그런 말을 하는 모양입니다. 비 서가 죽고 나니 눈이 뒤집혀서 복수 할 마음에, 냉큼 저주고 뭐고 밝혀 버린 게지.”
하긴, 제 딸을 두고 그 비서 후보 였던 아이와 춤을 추던 때가 기억나 긴 했다. 그때도 갑작스러운 파트너 로 불러올렸었지.
반려니 뭐니 하는 건 정말 정치 적인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로 좋아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신분도 없는 그 계 집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옷도 사 주고 학교까지 보내서 결국 번듯한 꼴로 만든 이유가 뭐겠소? 하여간 남녀 관계란 옆에서 봐선 모르는 법
이라고 하더니만, 황제도 결국에는
이해득실도 따질 줄 모르고 눈에 드 는 여자에게 홀랑 넘어가는 단순한 사내에 불과했던 게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아무리 지금이야 다들 현 황제에 게 불만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대체 어느 귀족이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을 황제 자리에 앉혀두길 바라겠냔 말이오. 너무 걱정 마시오. 어차피 이번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황제는 이제 끝이니까.”
황태후가 쐐기를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은 정말 그럴싸했고, 술렁이던 분위기도 단박에 가라앉았 다.
그녀의 말대로 되기만 한다면, 그 리고 정말로 황제가 약점을 노출한 거라면 이야기는 쉬워진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 황제가 능력 을 많이 쓴 때를 노려 기습하면 된 다. 이쪽에는 이미 꽤 높은 수준을 갖춘 상급 마법 장교들이 여럿이었 다. 그들도 전쟁에 함께 출정할 터. 그들이 손을 쓴다면 황제의 수급을 따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황태후 파에 붙은 것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아주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황제는 요즘 뭘 하고 있소?”
부르탱이 얼른 나서서 대답했다.
“매일 서류작업만 한다는 모양입 니다.”
“전쟁 준비를 한다는 것치곤 퍽 얌전하군. 그 밖에는?”
“별다른 보고는 없습니다만…… 식욕도 급히 줄어 거의 아무것도 먹 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후후, 후후후후, 짐승도 제 죽을 때는 안다고 하더니. 황제도 그런 모양이군.”
장내에 작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얼굴의 수심을 덜어낸 외척파 귀
족들도 뒤늦게 따라 웃었다.
화기애애하게 오가는 대화 속에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황태후 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선전 포고 소식은 테포다 제국과 부르크 제국뿐 아니라 이웃 나라 각 지에 빠르게 퍼졌다. 사람들은 광장, 상가, 술집 어디든 모였다 하면 전 쟁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비뉴스가 동료들과 앉은 식당 테 이블 근처에도 온통 전쟁 이야기뿐 이었다. 일행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바람에 주변의 말소리가 아주 잘 들려왔다.
“그 얘기 들었어요, 리자 엄마?”
“무슨 얘기 말이에요, 쿼쉬 아 빠?”
“아니 글쎄, 이 제국 간 8차 전쟁 이 벌어진다는 소식이 전부 다 테포 다의 짓 때문이래요.”
“항상 그렇지, 뭐. 어쩐지 요즘 잠잠하다 했어요.”
“우리나라는 요즘 이렇게 태평성 대고…… 게다가 전쟁을 하지 않았 다뿐이지 우리 황제 폐하의 마법 능 력은 전 세계를 뒤져도 찾을 수 없
는 재능이라고 하질 않았어요? 갑자 기 시비를 걸다니 미친 게 틀림없어 요.”
“그러니까 미쳤다고 그렇게 욕을 먹고 있나 봐요.”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테포다 안에서는 시위도 한다나 봐요. 6 황 자의 수급을 내놓으라고.”
‘수급’이라는 단어에 좌중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아니, 무슨 짓을 했길래……/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글쎄, 저희 황제 폐하의 연인을 납치해서 죽였다지 뭐예요.”
“……뭐라고? 저런 썩을 놈들이!”
“6 황자가 반했다나? 아무튼 납 치한 이유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게 말이나 돼요?”
“제가 알아요. 제물로 바쳐졌다지 요?”
“세상에……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연인이 있 으셨다니, 그 이야기도 처음 들어요, 저는. 어느 나라의 황녀님이셨어요? 아니면 공작가의 따님?”
“출신이랄 것도 없는 아가씨였다
고 하더라고요.”
“말도 안 돼.”
“정말 무슨 동화 같은 이야기 같 지 않아요?”
손수건으로 코를 푼 사내가 얼른 이야기를 이었다.
“황제 폐하께선 정말 사랑을 하셨 던 거라고요. 신분도 보지 않고, 골 디나에서부터 가진 것 없이 정처 없 이 찾아온 여인에게 반하셔서, 계속 궁에서 함께 지내며 돌봐 주셨다고 해요.”
“어머머, 너무 로맨틱해요.”
“정말…… 신분도 초월한 사랑이 네요.”
“게다가 그 아가씨도 엄청나게 머 리가 좋아서 글쎄,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한 인재라고 하더라고요.”
“……아카데미를요?”
“세상에, 다른 나라 출신이 우리 나라 아카데미를요? 조기 졸업은 석 학들도 꿈도 못 꾼다는 그……-”
“그러니까 말이에요.”
“반려로 점찍어 두셨던 분이라고, 선전 포고문에도 쓰셨다고 하더라고 요.”
다들 신이 나서 떠들다가도 금세 풀이 죽었다.
“그런데 그런 총명한 분을 잃으셨 으니……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상 심이 크실까……
“신분도 안 볼 정도면 얼마나 사 랑하셨겠어요.”
분개한 사람들이 탁자를 두들겨 댔다.
“테포다의 황자인지 뭔지에게 본 때를 보여 줍시다!”
“그래요, 우리 제국을 오죽 우습 게 봤으면 어떻게 저희 황제 폐하의 반려가 되실 분을……오 아무리 상식 적으로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네 요.”
비뉴스는 그쯤에서 손도 제대로 대지 않은 그릇 옆에 포크를 내려놓 았다. 본래는 좋아하는 삶은 콩이 곁들여진 스테이크 찹 샐러드도 도 저히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그는 먼저 의자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 다. 동료들은 그가 먼저 자리를 뜨 는 것을 이해하는지 손을 흔들며 인 사해 주었다.
“술 먹지 말고, 곧장 황궁으로 돌 아가.”
“알았다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래.”
비뉴스는 거리로 나와 크게 한숨 을 쉬었다. 새로운 일이 배당되기 전까지 그는 그저 하릴없는 대기조 에 불과했다.
경호 기사로서 본래 본인이 경호 하던 분을 끝까지 지켜 내지 못했다 는 불명예는 씻을 수 없는 것이었 다.
셀레스티아 님은 정말 돌아가셨을 까?
실종된 이후 수색에도 가담했지 만,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 다. 황제는 비뉴스가 그 이상으로 움직이는 것에 반대했다고 했다. 모
든 것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다. 테포다 제국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 고 나서 얼마 되지도 않아 부고를 전해 들었다. 데려가서 죽일 셈으로 납치한 것은 아닐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는 데. 바람과 현실은 언제나 어긋나는 법일까?
비뉴스는 언제나 셀레스티아와 함 께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돌아가던 길을 지나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 을 쉬었다.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황제는 무슨 생각인지 그를 예비로 빼 두라고 지
시했기에 전쟁에 참가할 수도 없었 다.
셀레스티아가 종종 가던 카페 입 구에 이르자, 결국 절로 욕이 나왔 다.
“젠장……,”
스스로의 무력함과, 제대로 지켜 내지 못한 후회 때문에 가슴이 답답 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익 숙한 녹색 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며 멈춰 섰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