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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67화 (67/103)

- 67화

회의장에 들어서자마자 황제는 폭 탄 선언을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저주를 받아 왔다.”

저주?

아주 옛날에나 있었던 사술이라 모두는 그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 로도 어안이 벙벙했다. 게다가 누가 황제 폐하에게 그딴 일을 한단 말인 가?

당황한 좌중을 둘러본 황제는 고 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것을 알아낸 것도 최근이다. 그리고 그것이 테포다의 만행이었음

을 알아냈다. 이것은 짐과 국가를 기만하는 처사이니, 이것에 대해 좌

시할 수 없다.”

술렁임이 퍼져 나갔다.

선전 포고를 하겠다는 황제의 선 언에는 의외로 누구의 반대도 없었 다. 의아할 정도로 황태후 세력도 얌전히 그의 의견을 지지했다. ‘저 주’라는 말이 나왔을 때, 황태후가 눈을 반짝이는 것을 황제는 놓치지 않았다.

셀레스티아가 황제의 반려인 것처 럼 선전하자는 생각을 해 낸 것은 리온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도 달리 반대는 없었고, 회의는 빠르게 끝났

다. 세부 사항을 결정하기 위해 여 러 개의 소회의가 열렸다.

선전 포고문을 품에 안은 전령이 출발한 뒤, 동서북의 국경을 방어할 병력을 제한 모든 잉여 병력 중 다 수가 테포다와 맞닿은 국경으로 이 동했다.

마지막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양국의 국민들은 평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에 군 대가 국경으로 결집한다는 소식이 돌았을 때만 해도, 양국에서는 무력

시위를 하겠거니 하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5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스 쿼드론이라 불리는 부대까지 본격적 으로 국경에 소집되기 시작하고, 부 르크 내에 징집령이 내려지기까지 하자 분위기는 일변했다. 새로운 전 쟁의 서막일지도 모르는 병력 이동 에 양국의 국경에는 팽팽한 긴장감 이 흘렀다.

황제는 반쯤 기대앉아 서류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얼굴이 수척 해 보이십니다.’

반은 그 말이 자꾸만 귀에서 맴 돌아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 제 등의 고통이라곤 조금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들 수 없다니.

정말 수척해 보이는 게 누군지, 셀레스티아 본인은 알지 못하는 모 양이 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뭐 가 그렇게 미안하고 뭐가 그렇게 그 리운지, 눈에 돌아가고 싶은 감정이

뚝뚝 묻어나면서도 의연하게 구는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뒤로 고작 며칠이 지났 는데, 아직도 돌아오기는커녕 기별 도 없었다.

통신 이후로 즉각 전령을 보냈는 데, 설마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지 는 않을 테다. 반려라는 단어까지 썼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여자를 돌려받겠다는 뜻이었다.

원래라면 지브 가문이든, 황태후 측이든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반려 는 무슨 반려냐고 그를 뜯어말렸어 야 정상이었지만, 아무런 반대도 없 었다.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뒤라, 모두들 반의 최후를 꿈꾸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혹은 그가 간절히 제 사람을 돌려받고 싶은 마음을 십분 헤아렸던 걸까.

똑똑.

복잡한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리온이었다. 그는 말 많던 평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조용 히 방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뭐지?”

리온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폐하…… 저, 그것이……/

“뭐지?”

“그것이……『

“전령이 돌아왔나?”

“응. 일단 그쪽은 싸울 의사가 없 으니 원하는 것을 말하란 식의 답장 을 가지고 왔어. 그리고……,”

리온이 뒷말을 질질 끌자 반이 그를 쳐다봤다.

“말이 느리군.”

“……셀레스티아 양을 반려로 생

각한다고 선전 포고문에 적은 건 그 냥 선전이었던 거잖아. 그렇지?”

“왜 그런 걸 묻지? 그 의견을 낸

사람은 너였잖아.”

되묻고 나서야 반은 얼굴을 굳혔 다. 리온의 얼굴은 억울함과 슬픔, 당혹감, 그리고 차마 전하지 못할 말을 전하러 온 사람처럼 엉망의 감 정이 섞여 있었다. 심장이 빨리 뛰 었다. 어쩐지 리온의 다음 말을 듣 고 싶지 않았다.

리온은 천천히 주먹을 내밀었다. 반은 리온의 주먹 안에 뭔가가 있다 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손을 내밀 자, 리온이 입술을 꽉 깨물며 손에

든 물건을 건네주었다.

반짝거리는 금속의 물건. 양면으 로 다른 것이 새겨져 있었다. 한쪽 에는 은빛 사자 모양이, 다른 한쪽 에는 받드는 모양을 한 손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임하며 폐하를 모시겠습니 다.’

지금이라도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반은 천장을 노려보았다. 되묻지 않아도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굳

이 하고 싶었다.

“우리가 너무 무리한 수를 둬서, 내 반려니 뭐니 하는 소리가 우스워 서 죽였다고 하던가?”

리온은 어렵게 더듬더듬 대답했 다.

“그 전에 이미……오 6 황자가 자 국의 언데드 굴을 막을 요량으로 데 려 갔대.”

“그렇군……

반은 양손을 얼굴 위에 덮었다. 자칫 정신을 놓으면, 무슨 짓을 하 게 될지 모르는 기분이었다.

“혼자 있고 싶은데.”

“폐하, 섣부른 행동은……”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단독 행동 은 하지 않는다. 걱정할 필요는 없 겠지.”

걱정 말라는 식으로 이렇게 부드 럽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리온 은 새삼 셀레스티아가 참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오나……

황제의 붉은 눈이 리온을 한참 응시했다. 별다른 분노도 슬픔도 밖 으로 내비치지 않는 그 눈은, 다만 빛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시간을 잊은 것처럼 거의 삼십

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대로 리온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 말조차 하지 않 던 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음대로 해라.”

탁.

리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반은 자 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1층으로 내려 갔다. 그가 지나는 곳마다 수행원이 따라붙었지만, 그는 호위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물렸다.

밤의 정원을 천천히 걸어 둘이 도착한 곳은 마법 연마용 건물이었 다. 늦은 시간인 데다, 마법 장교의 이용 시간에는 제한이 있기 때문에

돔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은 발 소리가 울리는 바닥을 밟으며 건물 가운데로 가서 섰다.

둥그런 돔 형식의 건물 천장에는 벽을 따라 촘촘하게 궤적용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낮은 곳에는 각종 기괴한 형태의 언데드들이 속성별로 그려져 있었고, 그보다 조금 더 높 은 곳에는 키가 큰 것들이, 그리고 공성 병기나 건물, 비행선, 와이번 따위들이 차례로 그려져 있었다. 그 리고 가장 높은 곳, 천장의 돔 가운 데에 그려진 것이 바로 메테오.

상상할 수 있는, 닥쳐올 수 있는 공격들을 나열한 것이다. 해당 목표

물에 유효한 속성의 마법을 사용하 면 벽에 새겨진 문양이 금색으로 빛 나도록 되어 있었다.

“ 리온.”

“ 어?”

“저번에 말했지, 내가. 내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셀레스티아가 남은 거라고.”

“그랬지.”

“그래서, 그건 해결했더군.”

“뭐라고?”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고.”

리온은 몇 번 눈을 껌벅이다가

간신히 황제의 말을 이해했다.

“어떻게 그런걸……,”

반은 제 머리 위의 메테오를 쏘 아보다가 시선을 내려 리온을 바라 봤다. 그의 붉은 눈은 여전히 촛점 이 흐렸다.

황제가 허공에 오른손을 뻗자, 그 의 네 손가락에서 각기 다른 속성을 띤 작은 구슬이 생겨났다. 땅, 불, 바람, 물.

“지금까지의 어느 때보다 훨씬 머 리가 잘 돌아. 이제 어떤 마법도, 지금까지 썼던 것보다 훨씬 더 상위 의 마법도 쓸 수 있을 거다. 마음만

먹는다면, 민간인들을 포함해서 소 도시 하나 정도는 날려 버릴 수 있 겠지.”

조용한 중얼거림은 섬뜩한 기색이 있었다. 리온은 그의 이성을 믿었지 만, 이에는 비명 같은 소리가 저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 폐하!”

반이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의 손가락 위에서 일렁이는 구슬들이 빛을 반짝였다.

“그러겠다는 게 아니야. 다만, 나 는 인생의 어떤 순간보다 더 방대한 힘을 손에 쥐고 있는데……

“ 폐하……,”

“그런데 어째서 어느 때보다도 무 력 하군.”

“모두들 나에게 무엇인가 좋은 것 을 남기고, 이 나라를 더 좋은 상태 로 만들고, 그리고 날 떠나가는군.”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멍하니 선 반은 배지를 다시 꺼 내 쥐고는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한참을 그것을 바라보다가 품에 갈 무리한 그는, 벽에 있는 목표물들을 향해 하나씩 마법을 쏘아 올렸다.

쾅! 쾅-!

손가락 끝에서 튕겨 나간 고작 구슬만 한 모양이 벽에 가서 부딪칠 때마다 귀가 따가울 정도의 굉음이 울리며 돔이 조금씩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리온은 반에게서 한 발자 국 물러섰다.

본디 마법 연마를 목적으로 만들 어진 돔이다. 몇 겹의 마법 방벽이 둘러져 있어, 웬만한 마법으로는 벽 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만들어 져 있다. 그런 돔이 이렇게 진동하 는 것은 처음 보았다.

각 목표물에 가서 정확하게 부딪

친 원소 마법들에 대해 유효한 공격 판정이 표시되었다. 돔의 천장과 벽 을 장식한 모든 문양이 동시에 반짝 여 댔다.

“ 반.”

황제는 절 부르는 친우를 한 번 바라보곤, 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평소와 같이 고고하고 냉랭한 얼굴 이었지만 눈빛이 달랐다. 누구 하나 라도 당장 죽여버릴 듯한 살의가 철 철 흘렀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는 게 당연한 자리라는 건 안 다. 그러니 날 위해 누군가가 사지 로 걸어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

어. 아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납득은 해. 그런데도 왜 이렇게 속 이 메스껍지?”

쾅! 쾅!

원래 이 정도였나? 아니,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그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 껏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겠 지.

그리고……,

리온은 몇 번 더 황제의 이름을 연호하다가 더 이상 부르는 것을 그 만두었다. 이대로라면 쓰러질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쓰러지더라

도 어쩔 도리가 없으리라. 이것이 누군가에게 약한 소리를 하는 법을 모르는 황제 나름대로 슬픔을 푸는 방법일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셀레스티아가 황 제에게 훨씬 큰 존재였다는 것을 연 일 깨닫는 요즘이었다.

그렇게 마음속 깊이 자리했던 것 을 모르지 않았는데. 제가 좀 더 나 서야 했을지도 모른다. 셀레스티아 만큼 황제를 잘 알아주고, 그를 잘 보필해 주고, 그리고…… 황제를 웃 게 해주는 존재는 없었는데. 그런데 의회에서 그녀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을 막아 주지 못했다.

다른 배필을 찾는 것이 더 좋다 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황제가 이미 마음을 준 상대였다면, 그 사람에게 제가 있어 야 할 자리를 찾아 주지 못한 대가 를 크다. 누구에게나 쉬이 마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황제는. 제 아비가 남긴 외척의 역사를 누구 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멍하니 황제의 등을 보고 있던 리온이 굉음에 깜짝 놀라 천장을 쳐 다보았다.

메테오가 그려져 있던 부분에 구

멍이 휑하게 뚫려 하늘이 보였다. 황제도 그 틈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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