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이봐, 아가야. 아니, 전령. 이름 이 뭐라고?”
“빈첸조입니다.”
“거 뭐냐, 선전 포고라는 게, 이 런저런 게 불만이 있으니 개선해 달 라는 떼 같은 거거든. 그렇게 너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다니면 우 리가 오해해요. 반드시 전쟁을 일으 킬 생각인 것은 아닐 거 아냐.”
파란 머리칼을 단정히 정리한 빈 첸조는 마주 웃는 대신 딱딱하게 대 꾸했다.
“제가 여기에 도착한 시점에 이미 자국의 병력은 집결하고 있습니다.
귀국의 합당한 사과와 응당 돌려주 어야 할 인물의 복귀가 없다면 진정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사를 전하러 왔습니 다.”
락은 이마가 지끈거렸지만 지금 화를 낼 순 없었다.
답신을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긴 전령이 물러가자, 미소를 싹 거둔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러곤 알현실에 참관해 있던 열 명 남짓한 신하들과 1 황자, 6 황자를 쏘아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반려 후보? 셀레스티아가 대체 누구야?!”
“이번에 동굴 막음에 사용했던 여 자입니다.”
쿤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테포다 황제의 얼굴이 묘하게 일 그러 졌다.
“뭐야? 그냥 아무렇게나 데려와도 상관없는 여자 아니었어?”
“네. 신분이랄 것도 없고, 부모도 없었습니다. 분명 문제의 소지가 될 부분이 없었는데……;
“황제의 뭐라도 됐다잖아!”
“그냥 황제의 비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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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아래서 일하는 여자라
며! 누가 남의 제국에서 일하는 비 서를 납치해 와? 미쳤냐?!”
이번 건은 알아서 잘 마무리하겠 다고 몇 번이나 확언하기에 내버려 둔 것이 문제였을까. 욕심이 과한 자식인 줄은 알지만, 권력욕도 자질 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테포다 황제는 침음성을 흘리며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튼, 반려고 뭐고 그런 건 아 니었단 거군.”
“네.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이 젊은 자식이 장난을 치다 치다 못해 이딴 명분으로 쳐들
어오겠다고? 전쟁을 하고 싶어서 눈 이 시뻘게져 있나? 어?! 그리고 저 주를 건 건 언제 적 일인데 어떻게 알아낸 거야?”
6 황자에게 황제의 시선이 돌아 갔다.
“설마 네가 알려 준 건 아니겠 지?”
“그건……,”
6 황자는 셀레스티아가 황제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건 확신했지만, 어제의 태도로 보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주범이 이쪽이라는 건 확신
할 수 없을 텐데.
그의 우물쭈물한 표정을 보자 대 중 내용을 짐작한 황제가 크게 한숨 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반려 어쩌고는 또 뭐 야? 사실인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여자 는 노예 출신으로 그저 황제의 수발 을 드는 정도였습니다.”
“수발드는 여자를 반려 후보라고 까지 하다니, 이걸 다른 나라에서 들으면 우리가 명분이 없다. 확실히 아닌 걸 밝혀내!”
우
네.”
“아니지. 애초에 돌려주면 될 문 제 아닌가.”
6 황자는 입을 다물었다가 아주 난색이 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미 죽었는데요.”
황제가 목덜미를 꽉 잡았다. 손에 집히는 대로 장식품을 마구 집어 던 진 그가 씩씩거리며 고함을 쳤다.
“미친놈‘아! 내가 언제 남의 나라 주요 인사 데려다 죽이랬냐? 그런 중요한 일이면 미리 말을 했어야 지!”
“하, 하지만 비서급이면 정말 하 찮은……-”
“나라마다 비서 직급 다른 것도 몰라? 부르크의 비서면 우리나라 서 기관급이야! 미친 새끼, 내가 저런 걸 내 자식이라고 내 마누라 배 아 파 낳았다고?”
“아바마마!”
“그럼 시체라도 가져와!”
쿤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 을 수가 없어 알현실 밖으로 물러났 다.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도 영 납득 이 되지 않았다. 분명 언데드 굴의 봉인을 복구한 데까진 좋았다. 아바 마마께서도 흡족해하셨고, 얼씬도
못 하게 하던 알현실에도 동석시킬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그런데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고작 비서이지 않은가? 부르크의 비서면 꽤 높은 직급이라는 것을 모 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의 지금껏 태도를 생각했을 때 없어진 부하를 되찾자고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만드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 는 일이었다. 대체 왜?
게다가 말장난으로 만들어 내는 게 명분이라지만, 난데없이 반려니 뭐니 하다니 정말이지 그 나라 황제 도 오버가 너무 심하다. 정말 돌려 준다고 해서 결혼할 것도 아니면서.
애초에 남자를 좋아한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로 여자에겐 관 심도 없는 황제라는 것쯤은 온 나라 국민이 다 알고 있었다.
전쟁이 뭐, 쉬운 일도 아니고 이 런 식으로 일으킨단 말인가?
정말 기가 막혔다.
그리고 아바마마도 너무하시질 않 은가? 남의 나라 비서의 목숨 하나 날려서 테포다 수도의 전 국민을 구 한 셈인데, 이쯤 되면 상을 받아야 할 문제 아닌가? 찬양을 들어도 시 원찮을 판에, 대체 왜 제가 꾸짖음 을 들어야 하는지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젠장……,”
욕을 뇌까리며 걷어찬 벽은 너무 단단했다. 쿤은 눈물을 찔끔 흘렸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셀레스티 아는 죽었다. 애초에 죽으라고 보낸 것이니, 뼈도 남지 않은 게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시체라도 내놓으라고 하는 성화에 못 이겨 현장으로 기어 나간 6 황자가 찾아낸 것은 떨어져 있는 배지뿐이었다.
동굴을 다녀온 뒤로도 그는 한참 을 서성이며 황궁으로 돌아가지 못 했다.
“이거, 위험한데……
이 전쟁, 언데드며 연이은 가뭄과 기근 때문에 최근의 국력 소모가 굉 장히 심했던 자국으로서는 치를 만 한 힘이 없었다. 다른 나라라면 상 관없었지만 부르크 제국이라니, 상 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일이 이딴 식으로 진행되다간 자 칫 아바마마께서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지도 몰랐다. 혹, 부르크 황제의 화를 달래기 위해 자식을 내놓겠다
거나 하는 생각을 하시는 것은 아니 겠지. 그래도 자식인데.
그는 목을 쓰다듬곤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반은 정원의 꽃나무들 사이에 선 채로 한참을 허공을 쏘아보고 있었 다. 통신은 일방적으로 뚝 끊어졌다. 붉은 머리의 비서가 누구보다도 불 안한 얼굴로 서서, 꼴에 누굴 안심 시키겠다고 저에게 자꾸만 말을 걸 어오던 모습도 사라지고 없었다.
“도대체 언제 적 쓰던 마법을 가
지고…… 하, 제 할 말만 하고 끊으 시겠다?”
통신을 걸어온 장소는 뻔했다. 안 봐도 그 테포다 황실에 있는 고대 마법을 쓴 것일 테니까. 그 망할 샘 은 워낙 낡은 시스템이라 이쪽에서 는 교신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게 더 지랄맞은 점이었다.
통신이 일방적으로 끊어진 것부터 가 불쾌했고, 무엇보다 저주가 풀렸 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알려 주는 것이 불길했다.
그는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손을 꽉 움켜쥐었다가 다시 쫙 펼쳤다. 방금 피워 올린 불꽃 마법의 영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러다 누적되는 부효과가 있다고 해도 알 약을 먹으면 그만이다. 남들과 같은 삶, 그것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긴 시간을 버텨 왔다니 헛웃음이 절로 났다.
황제는 허공에서 간신히 시선을 떼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관료 회 의가 즉각 소집되었다.
황제와 리온이 모인 곳은 셀레스 티아가 종종 거실로 쓰곤 했던, 황 제의 방과 연결된 작은 접견실이었
다.
문을 닫자마자, 리온은 인상을 찌 푸렸다.
“이봐, 황제 폐하. 이렇게 급히 소집하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 니까? 먹던 밥도 팽개치고 허겁지겁 왔습니 다요.”
“통신 마법이 걸려 왔다. 테포다 황실에서.”
“와…… 간도 큰데.”
“그래서 이전에 논의한 대로 선전 포고를 할 생각이다.”
“지금 바로? 뭐, 선전 포고를 하 자는 건 상관없지만…… 표정 좀
펴.”
황제는 벽에 가득 꽂힌 책들을 노려보았다.
“예감이 안 좋아.”
“무슨 소리야?”
“처음에는 시비라도 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 면…… 내가 저주에서 풀린 걸 확인 하는 것 같았어.”
“엥…… 갑자기 개과천선한 것도 아닐 테고, 그런 짓을 왜?”
“확인시켜 주려고 했던 거겠지.”
“셀레스티아 양한테? ……그걸 대
가로 뭔가를 시킬 생각이었을까?”
“그래. 그것밖에는 생각할 게 달 리 없다. 그렇다면 평범한 일은 아 니겠지.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무언 가.”
“그럼 왜 굳이 납치한 거야? 처 음부터 네 저주를 풀어 주겠다고 하 고 예의 바르게 우리에게 잠깐 빌려 가겠다고 말했으면……”
말을 하다 말고 리온이 입을 다 물었다. 그와 황제의 시선이 맞닥뜨 렸다.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던 거
군.”
반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전쟁이라면, 조금 서 두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좋아. 마침 믿음직한 전령이 지 원해 주실 것 같아.”
“하나뿐인 동생이질 않나.”
의외의 말을 하는 황제에게 리온 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씩 웃었 다.
“괜찮아, 이 정도는. 걔도 남자니 까. 잘해 주고 싶은 사람 한둘은 있 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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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마음대로 해.”
티아헤브 공작은 황제를 보며 씩 웃곤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그러고 보니 선전 포고를 하 는 김에 셀레스티아 양을 반려라고 하는 건 어때?”
“……무슨 소리야?”
“그렇게 똥 마려운 개처럼 구는 너…… 크흐으음, 커험.”
흥분해서 떠들다가 황제와 눈이 마주친 리온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아무리 친우라곤 해도 군신 간의 예를 크게 범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셀레스티아 양을 반려라고 공표 하고 돌려 달라고 하는 거지. 그 조 항을 선전 포고에 넣지 않으면, 세 간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른 거에 얼마나 신경 쓰겠어. 그냥 저주 같은 것보다 선정적인 화두를 만들어 보자는 거지, 뭐.”
흐흐 ’5
황제도, 리온도 굳이 그가 지금껏 보내 온 고통스러운 세월에 대해 거 론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소문이 야 날개 달린 말이라고 하니 언젠가 는 퍼져 나갈 것이다. 하지만 전쟁 을 앞둔 지금은 완전무결한 강자로 서의 황제로 남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황태후의 세가 건재하여 비키를 내칠 수도 없는 지금이다. 지금 당장 거론되는 인물은 많았지 만 막상 정해진 비 후보도 없다. 반 려니 뭐니 하는 선전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지금뿐이다.
“정말 그뿐인가?”
“뭐, 그런 것도 있고……,”
리온은 눈을 찡긋했다.
“이렇게까지 날 선 황제 폐하를 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비서님 을 무사히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난 네 신하이기도 하지만 친구잖아. 네가 이렇게까지 누군가
를 신경 쓰는 걸 본 건 처음이야.”
황제는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시선을 돌려 버렸다. 리온은 그의 눈에 또렷하게 비치는 염려와 걱정 을 읽을 수 있었다.
반드시 그녀를 돌려받아야 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