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마수 굴로 향하는 출정 길은 쓸 데없이 성대한 의식부터 시작됐다. 약식 행사로 갈음해 버리곤 하는 부 르크의 출정 의식에 비하면 어마어 마한 규모였다. 열 명 남짓한 테포 다 황실의 황족들이 모두 참석할 정 도였다.
무희들과 악단이 의식의 도입부를 장식했고, 주요 인사들의 기도문이 이어지면서 나는 슬슬 이들이 얼마 나 이 위기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지를 깨달았다.
행사의 마지막 즈음에 가서야 6 황자는 나를 앞에 세우고 모두에게 소개했다.
“이자가 바로 우리에게 곧 닥쳐올 죽음의 물결을 막아 줄 자입니다.”
“ 오오……
미리 의논한 대로 몇 가지 간단 한 원소 마법을 내 손으로 꺼 보이 자, 심드렁하던 황족들의 시선이 반 짝이기 시작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자가 현시대 에 있었단 말인가?”
“구전으로나 내려오는 금기가 아 닌가?”
“말은 들었지만…… 정말이었다 니.”
그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듣자, 비 로소 6 황자의 얼굴에 웃음이 폈다. 그는 보란 듯 가슴을 펴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어려운 일을 바 로 제가 해냈습니다.”
테포다의 황제는 너구리처럼 비죽 비죽 난 수염을 손으로 쓸며 나를 한참 바라봤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동그란 눈이 내 팔을 쳐다보는 것은 영 기분 나쁜 일이었다. 손가락이라 도 하나 정도 세워 줄까 하는 마음 을 간신히 참아 내는 사이에, 다행 히 그는 시선을 제 자식에게로 돌렸 다.
“허어…… 이것이 정말로 성공한 다면 아주 큰 공이야. 정말이지…… 요즘 언데드 굴 때문에 밤에도 제대 로 잠들지 못했다. 고생했다, 쿤.”
“아바마마.”
“요즘 뭔가 너무 소란하게 파헤치 고 다니는 것 같아 걱정이 많았다 만, 이렇게 잘 마무리되는구나.”
“맡겨만 주십시오.”
“그래.”
마수 굴까지 가는 건 생각보다도
짧은 여정이었다. 마차를 타고 고작 반나절 이동하면 끝이었다.
과연, 이렇게까지 수도의 근거리 에 있는 마수 굴의 봉인이 완전히 풀린다면 정말 지옥도나 다름없을 거다. 부르크 제국에도 봉인이 일부 풀린 것이 그 모양새인데.
척 봐도 불길해 보이는 동굴 앞 에 서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언데드 들이 내는 괴상한 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왔다.
각자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거니 까 나는 이 일을 해 주면 되는 거 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 라고 한 거겠지.
난 어느새 일행에 합류한 르베르 티티를 바라봤다. 얼른 해치우고 가 야지. 내 동생과 폐하의 곁으로.
그렇게 거창한 의식을 하고 출발 한 것치고는 일은 순순하다 못해 너 무 쉽게 풀렸다.
동굴 입구에는 마법 장교들이 ‘통 과할 수 없다’고 선언했던 둥그런 비눗방울 같은 장벽이 있었다. 그것 은 아무것도 막지 않는 듯한 느낌으 로 수월하게 걸어서 통과할 수 있었 다. 내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지
나자, 황자의 곁에 있던 일행들이 갑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바닥 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해 대기 시작 했다.
일단 겉의 장벽을 통과하자, 내가 해야 할 일을 곧장 알 수 있었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높은 받침대 위에 이 동굴의 봉인을 담당하고 있 는 주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중의 한 획이 너무 흐릿해져 곧 끊어질 것처럼 보였다.
“안I”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어 일행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지
만, 어디서 들린 소리인지 알 수 없 었다.
난 빠르게 작업을 시작했다.
미리 받아 온 마법 가루를 그 위 에 솔솔 뿌리고, 손을 대지 않도록 유의했다. 혹시라도 내 능력과 반발 하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 다. 그러곤 장갑을 낀 왼손으로 작 은 마법 지팡이를 들고 없어진 획을 그려 넣었다.
“안 돼!”
이번에는 또렷한 목소리였다.
작업을 마치고 허리를 편 순간, 가까이에 달려든 르베르티티의 모습
이 보였다. 그녀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본 적 없는, 괴로 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야?”
“나, 나도 들어가게 해 줘.”
“ 어?”
“나도!”
얼떨떨하게 르베르티티가 기대 있 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어라?
비눗방울과 같은 반구는 내가 손 을 뻗은 부분이 흐려지긴 했지만, 내 손을 통과시켜 주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막는 마법이 아니라, 안 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마법 이었다. 르베르티티는 내가 손을 대 어 흐려진 것을 이용하여 안으로 꾸 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머리카락 몇 올이 방어벽에 껴 버리긴 했지만, 그것을 잘라 버린 그녀는 창백한 얼 굴로 나를 껴안았다.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완성한 마법진 때문에 부옇게 흐 려지는 느낌이던 비눗방울은 다시 단단하게 복구되는 건지 달걀 껍데 기 같은 소리를 내며 위에서부터 점 점 더 자랐다.
저 멀리 있는 6 황자의 개운한 듯한 얼굴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 다. 어이없는 한편, 찝찝할 정도로 이해되지 않았던 마지막 한 조각까 지 모두 이해되는 것에는 상쾌하기 까지 했다.
기가 막혀서, 정말.
어쩐지 순순하게 그런 조건들을 들어줘 가며 날 달랜다 했다. 저렇 게까지 사람을 도구 취급하는 황자 의 꿍꿍이속이니, 처음부터 의심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 이건 예상 못 한 내 잘못이다.
난 마법진 자체를 무효화해 볼 생각으로 거기에 다시 손을 올렸다. 하지만 이미 또렷하게 완성된 마법 진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다 시 지워 보려고 해도 되질 않았다.
비눗방울 같은 방어벽을 손으로 쾅쾅 두들겨 봤지만 손만 아팠다. 내가 익힌 금기 마법보다 더 이전 세대의 마법인 게 틀림없다.
그렇구나. 원래 안에 있는 것을 내보내지 않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게 이 마법 방벽의 주요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마법 무효화 진으로도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갈 수는 없는 거 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욕이 절로 나왔다.
“젠장…… 살아 나갈 수 없단 말 부터 했어야지.”
황자는 손을 탁탁 털고 옷매무새 를 고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보다 빨리 눈치챘군.”
“개새끼야.”
“아쉽게 됐네.”
“뭐‘?”
“그래도 꽤 좋은 여잔데 말이야. 머리도 좋고. 내가 거둬 줄 의향도 조금은 있었는데 뭐,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미친 새끼.”
나는 더 이상 욕을 지껄일 수도 없었다.
황자는 이제 볼일을 다 봤다는 명백한 의사 표시를 하더니 제 마법 사들과 그 자리에서 훌쩍 사라져 버 린 것이다.
르베르티티를 껴안은 등 뒤에서 언데드들 특유의 가래 끓는 듯한 숨 소리가 들려왔다.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그들의 섬뜩한 눈을 떠올렸 다. 마차에 앉아 반 황제가 그들을 상대하는 것을 마냥 보고 있을 때 도, 틀림없는 승리를 보장받았던 그 때도 그것들은 지독히도 두려웠었 다.
동생에게도, 세레나에게도, 루아나 에게도, 그 외의 모두에게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왔는데. 그리고 황제에게 꼭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 는데.
최악이었다.
선전 포고
시한폭탄처럼 언제나 수도 사람들 을 조마조마하게 했던 언데드 동굴 의 봉인이 해결되었다는 소식은 빠 르게 황궁으로 전해졌다. 큰 경사로 온 테포다 제국이 기쁨으로 들썩였 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난데없 는 전령 한 명이 그 모든 분위기를 망쳐 놓았다.
알현실의 옥좌에 앉은 테포다 현 황제의 똘망똘망한 두 눈에 당황스
러움이 스쳤다. 그는 수염을 급히 만지며 제 앞에 앉은 부르크의 전령 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했느냐, 지금?”
“현 부르크 제국의 황제께서 보내 신 선전 포고를 전하러 왔습니다.”
외교 관계에도 전후 사정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최근까지 부르크 제국과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 다. 전대 황제와는 서로 주변의 소 국들을 먹으며 세를 확장하기에 바 빴기에 굳이 싸울 일이 없었다. 그 리고 전쟁이라곤 관심 없는 현재 황 제인 반 치세에 들어서는 아예 다툼 이 없었다.
최근에 국경 일부가 맞닿게 되었 다곤 하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평화롭게만 지내려고 했던 주제에, 그 젊은 자식이 왜 갑자기?
“그 뭐냐, 심한 농담 같은 건가?”
“아닙니다. 정식으로 보내신 포고 문을 전하러 왔습니다.”
전령 주제에 말투가 또렷하기 짝 이 없었다.
젊고 기개 있는 전령.
보통은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는 데, 능력 있는 인재는 안 보내기 마 련이다. 그런데 저렇게 눈빛을 형형 하게 빛내는 젊은 전령이라니? 전령
이 자원할 만한 무슨 일이 있었나? 제국 간 다툼이라고 부를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부르크 제국민들 에게 밉보일 짓이라도 했던가?
안 좋다. 위험하다.
오랜 통치 기간을 통해 단련된 그의 육감이 위험 신호를 보냈다. 정신이 번쩍 든 황제가 손짓하자, 수하 중 하나가 전령의 손에 있는 포고문을 받아 낭독했다.
〒테포다 제국에.
다음과 같은 국제 사회의 죄를 묻기 위해, 귀 제국과 귀 황가에 선
전 포고한다.
첫째, 비열한 방법으로 황제를 음 해하려 한 죄.
둘째, 황제의 반려 후보를 납치한 죄.
셋째, 항구적인 평화를 물색하는 국제 사회를 음해한 죄.
- 부르크 황제 반」
“비여얼? 우리가 그런 짓을 했다 고?”
당최 생각나는 게 없는 황제가
눈가를 문지르며 되묻자, 맹랑한 전 령이 말을 받았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기도 부끄 러울 만한 참담하고 비열한 주술로 저희 황제 폐하를 음해하셨지 않습 니까?”
테포다 황제 락의 얼굴이 시뻘게 졌다. 새까맣게 까먹고 있던 옛날 일이 떠올랐다. 그거? 그건 그쪽 황 태후와 함께 부르크의 황위 쟁탈전 이 있던 당시 했던 일이다. 너무 오 래전의 일이었고, 워낙 부르크 황제 가 여기저기 잘 쏘다니니까 이제 와 선 별 영향이 없겠거니 했다. 그래 서 여섯째 아들이 저주를 풀어 주겠
다는 말을 했을 땐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와서 어떻게 새어 나갔단 말인가.
락 황제는 이마를 짚은 반대 손 으로 전령에게 삿대질하며 얼른 그 다음 이야기를 해보라고 재촉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뭐라 고? 반려? 우리가 그런 걸, 아니 그 런 사람을 왜 데리고 있겠어? 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최 근에 본국 황실에 기거하는 셀레스 티아 님을 일방적으로 납치해 가질 않으셨습니까? 타 제국의 황실까지
침입하는 기행에 저로서는 말을 보 탤 것도 없습니다.”
황제는 머리를 짚고 전령을 쏘아 봤다. 대답하는 꼬락서니가 당돌하 기 짝이 없는 것이, 수급을 내놓을 각오로 왔다는 것을 뻔히 알 수 있 었다.
셀레스티아,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들어 본 적도 없다곤 할 수 없으니 일단 달 래서 어디 방에 처박아 놔야 하리 라. 그리고 세 번째 조건에 ‘국제 사회’ 어쩌고 하는 것도, 자기 나라 내정에 간섭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 는 소리겠지. 황태후와 손을 잡은
지는 아주 오래되었으니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살살 웃으며 전령을 바라봤 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