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그들 사이에는 르베르티티도 있었 고, 제록스 강사도 있었다. 항상 실 실 웃는 르베르티티가 다른 마법 장 교들의 가장 앞에 서서 착 가라앉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여기 도착했을 땐 보 이더니만 어딜 갔나 했더니…… 저 런 곳에 가 있었다니.
“……저주를 푸는 의식입니까?”
“그래. 눈으로 봐야 믿을 것 아닌 가.”
내가 마법으로 이동할 수 없는 특수한 몸이라는 것을 고려해서, 이 렇게 샘을 통해 보여 주는 거겠지.
난 고개를 끄덕이곤 샘을 주시했 다.
마법 장교들은 꽤 오래전부터 이 의식을 준비해 온 모양이었다. 그들 은 쿤 황자의 신호를 받곤 각자의 위치를 찾아가 정렬하더니, 망설임 없이 일정한 박자로 바닥을 막대기 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일제히 외우 는 주문 소리에 섞여 막대에 달린 금속 고리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 란했다.
쿵. 쿵. 챙 — . 챙 — .
쿵. 쿵. 챙 — . 챙—.
점점 더 빨라지는 소리들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요란해졌다. 촛불들 은 초의 심지 위를 넘어 일렁이며 바닥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 치 촛농이 녹는 듯 움직이는 촛불들 은 무척 신비로웠다. 그러더니 촛불 은 바닥을 두드리는 박자에 맞춘 듯 흔들리며 움직여 어떠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기분 나쁜 마법진은 그리 오래지 않 아 모두 타오르기 시작했다.
각자 다른 주문을 외우는 기백 명의 마법 장교들의 표정은 하나같 이 좋지 않았다. 척 봐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자들도 여럿
이었다. 하지만 이런 공동 마법의 특성상 한 명이 중간에 나가떨어지 는 것은 다른 자들에게 굉장히 커다 란 부담이다. 모두들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게 보였다.
쿵. 쿵. 쿵. 쿵.
챙, 챙, 챙, 챙.
바닥을 찧는 소리가 굉장한 기세 로 울렸고, 불꽃도 그 소리를 먹고 자라듯 거대하게 자랐다. 얼마나 그 광경이 오래되었을까? 불꽃은 모든 것을 다 태울 듯한 기세로 새까만 연기까지 뿜어내며 허공을 향해 일 렁여 댔다.
쾅.
모든 지팡이들이 합을 맞추어 마 지막으로 바닥을 세게 내리찍는 순 간, 그 불꽃은 끼익거리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증발했다. 샘 의 저편에 서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 히 실 끊긴 인형처럼 쓰러지는 모습 이 보였다. 간신히 서 있는 자들도 모두 지팡이에 기대서서는 새파래진 입술과 풀린 동공을 하고 있었다.
“저주는 제대로 풀었나?”
간신히 의식을 잃지 않은 자들 중 하나인, 나풀거리는 녹색 머리가 샘을 올려다보았다. 그쪽에서는 아
마 이쪽이 보이지 않으리라. 르베르 티티는 헤매는 듯한 시선으로 이쪽 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는 대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군. 알았다.”
6 황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그것을 신호로 통신은 종료되었다. 마지막 순간에 르베르티티의 가녀린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이 얼핏 보인 듯도 했다.
부르크의 황제였다면 틀림없이 ‘수고했다’는 공치사 한마디 정도는 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비교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건 알지만, 저렇 게까지 힘들어할 정도로 사람을 부 려 먹고 마치 도구를 쓰는 것처럼 취급하는 게 기분 나빴다. 르베르티 티가 한 짓을 생각하면 그녀에게 화 가 나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저 런 식으로 대해?
난 쿤 황자의 빤질빤질한 얼굴을 쏘아보았다.
“저주 정말 풀렸는지, 어떻게 확 인하죠?”
“이걸로 확인했잖아.”
마음이 안 놓인다.
물론 진이 생긴 대강의 생김새만
봐도 쓰임새를 알 정도는 되었지만, 그래도 저주는 워낙 생경한 분야이 기 때문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저 렇게 많은 인원수로 연기했을 거라 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겐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고개를 젓자, 6 황자의 비열 한 눈매는 더 비틀어졌다. 그의 남 빛 눈이 날 쏘아봤다. 하지만 난 아 랑곳하지 않았다. 반 황제의 눈매가 훨씬 더 매섭고, 그의 붉은 눈길이 훨씬 더 오그라든다. 이 정도 노려 봄으로 쫄기엔 난 반 황제의 곁에 너무 오래 있었다.
“좀 더 정확한, 믿을 만한 확신을
주세요. 전 무지렁이라 저런 것만 보곤 잘 모르겠거든요.”
“……대범한 건지 뭔지 모르겠군. 그래, 까짓거 통신 정도는 허락해 주지.”
반 황제와 이야기라도 나누게 해 주겠다는 건가? 그거라면 정말로 확 실한 증거가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까지 해 준다고?
하지만 나는 놀란 기색을 드러내 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수상쩍은 말을 조금이라도 지껄였다간, 반병신으로 만들어 주 는 정도는 할 테니까.”
지금까지도 고문하지 않고 얌전히 조건을 들어주는 것만도 대단히 감 사한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알겠어요.”
“귀찮군, 정말.”
6 황자가 다시 신호했고 이번에 도 옆에 선 사내가 샘을 두드렸다. 고작 하루 만에 보는 황제였지만, 어쩐지 그를 볼 생각을 하는 것만으 로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기까지 날 찾으러 왔던 그의 절박한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으니까. 그에 게 그런 얼굴을 하게 하고도, 함께 가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내 마음과 달리, 눈앞의 샘은 이전 의 시도와는 달리 부옇게 변한 상태 에서 멈춘 채로 아무런 장소도 보여 주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샘을 두드 려 대던 그 남자는 난처한 얼굴로 내 쪽을 쳐다봤다.
“……역시 연결이 어렵습니다. 워 낙 부르크 제국 수도 전체에 둘린 마법 방벽의 힘이 강력할뿐더러 황 제 개인의 능력도 워낙 탁월한지 라……/
하긴, 다른 나라를 염탐하는 게 그렇게 쉬울 리 없긴 하다.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다면 시도조차 않
았을 것 아닌가?
“그래서요?”
“상대 쪽에서도 같이 샘을 열어 준다면 얼굴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지금도 목소리 정도는 전달될 테니 불러 보십시오7
“황제 폐하?”
그리 목소리를 돋운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말을 걸기가 무섭게 샘 안의 시야가 확 걷혔다. 언제 흙탕 물처럼 부옜냐는 듯이 순식간에 맑 아져서는 반대편이 훤히 보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풍경, 눈에 설지 않은 황궁 정원의 모습.
하늘거리는 얇은 이파리의 분홍 꽃 들이 만개한 사이로 붉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칼의 황제가 이쪽을 바라 보고 있는 풍경은 무척 비현실적이 었다.
이전의 연결과는 달리, 상호 간의 합의하에 열린 이번 샘을 통해서는 저쪽도 이쪽을 볼 수 있는 모양이었 다. 황제는 정확히 나와 시선을 마 주쳤다. 그의 시선은 내게서 한참을 떨어지지 못하고 있다가, 곧 쿤에게 가 닿았다. 평소에도 늘 미간을 좁 히고 있는 습관이 있던 그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이런 구식 통신은 오랜만인데.
마도 시절에나 쓰던 거군.”
“오래된 마법이라 심기가 상하셨 습니까?”
“비서를 데리고 있다고 보여 줘서 어쩔 셈이지?”
“하긴 이미 달아난 패에 관심은 없으신 모양입니다. 거봐, 괜히 충성 해 봐야 소용없다니까. 어지간한 냉 혈한의 신경으론 제국의 황제 따위 못 해 먹을지도 모르겠지만.”
뒷말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쿤이 중얼거린 소리는 아주 작았지 만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틀렸다.
황제의 저 날카로워 보이는 눈과 입매는 뭘 어쩌라는 얼굴이 아니라 나를 걱정하는 표정이다. 저 붉은 눈이 나의 뺨과 눈을 찬찬히 살피질 않는가. 드러난 팔다리를 보고 얼핏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는 걸 보라지. 내가 뭘 꺼리는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다.
저 황제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줄 아는 자야. 너와는 다르게.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는 중에, 반 황제가 쿤에게 말했다.
“드디어 협박이라도 해 볼 셈인 가? 인질을 잡았으니.”
쿤 황자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내게 턱짓을 했다. 난 앞으로 한 발 짝 나섰다. 황제의 시선은 천천히 내게로 옮겨 왔다. 붉은 시선에 가 득한 감정이 무엇인지 못 알아볼 리 없다. 염려. 똑바로 눈을 마주하는 바람에 심장이 또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께가 울컥 치미는 느 낌, 이런 것이 그리움일까.
“황제 폐하.”
“그래.”
“식사는 하셨습니까? 얼굴이 수척 해 보이십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으로만
나를 쏘아보는 것으로도 마음을 읽 을 수 있었다. 시선에서 함께 돌아 가지 않은 나에 대한 불만이 적나라 하게 보였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저 주를 푸는 게 훨씬 더 시급한 일일 텐데.
이렇게 나 같은 것한테까지 항상 신경을 써 주니까, 사람이 착각을 하잖아. 내가 황제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인 것처럼.
난 이상할 정도로 자꾸만 크게 들려오는 내 심장 소리를 남들도 들 을까 저어하며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냈다.
“폐하, 간단한 마법을
아
묵묵부답.
“마법을 써 보시겠습니까?”
또 대답이 없다.
난 참을성 있는 조련사처럼 다시 물었다.
“간단한 마법을 써 보시겠습니 까?”
“……그래.”
반 황제는 그 대답 하나가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내가 같은 질문을 세 번 하고서야, 으르렁거리는 육식 동물처럼 대답을 씹어뱉었다. 심기 가 왜 저렇게까지 불편한지 모를 일
이었다.
하지만 반문 없이 마법을 준비하 는 것을 보면, 저주를 풀겠다고 했 던 내 말을 기억하고 있음이 틀림없 었다.
가볍게 앞으로 내민 그의 손안에 서 불꽃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그가 손을 털듯 가볍게 허공으로 들자, 그 불꽃은 생명을 가진 새처럼 날아 올라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다 음 그는 제 손을 한참 내려다보았 다. 그리고 이번에는 방금의 다섯 배는 되는 거대한 불꽃을 만들었다 가 다시 허공으로 쏘아 보냈고, 마 지막에는 제 몸보다 더 큰 덩어리의
불꽃을 만들어선 그 자리에서 없애 버렸다.
그가 이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굳 이 말하지 않아도, 황제의 눈에 서 린 이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를 그토록 오래 괴롭혔던 저주가 사라 졌다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군.”
그렇다면 좀 더 기쁜 얼굴을 하 면 좋을 텐데. 그는 뭐가 그렇게 불 만인지 불퉁한 얼굴이었다.
“이제 마음껏 마법을 쓰실 수 있 겠네요!”
우
그래. 언제 올 생각이지?”
“잠깐 의뢰를 하나만 해결하고 갈 게요, 폐하.”
“내 비서가 왜 외주를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난 허락한 적이 없 는데.”
이제는 저번처럼 여기까지 쫓아온 다거나 그런 일은 할 수 없을 거다. 남의 눈을 두 번 피할 수야 없겠지. 이젠 황자가 내 옆에 있기도 하고, 부르크 제국 내 사정도 있을 테니 까.
그러니까 돌아가는 건 내 힘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난 최대한 웃는 얼굴을 보이려고
애를 쓰곤 예를 다해 정성껏 인사를 올렸다.
“정말로, 정말로 곧 돌아가겠습니 다. 그리고 이제 폐하께선 제가 없 어도 괜찮으시니까…… 전 안심입니 다.”
황제의 얼굴이 확 구겨지는 게 보였다.
“괜찮다고? 안심이라고? 뭘 단단 히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가 뭔가를 이어 말하려는 순간, 화면이 불현듯 흐려지더니 아예 목 소리까지 끊겼다. 뒷말을 듣지 못한 것이 짜증 나서 6 황자 쿤을 쏘아
보았다.
“말을 하고 있는데, 왜 멋대로 끊 고 난리예요?”
쿤 황자는 귀를 후비는 듯 손짓 을 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신파를 즐길 필요는 없잖 아. 그쪽 말대로 곧 만날 텐데.”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