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그럼 뭐가 문제야?”
“셀레스티아의 소용이 마수 굴을 막는 게 목표인 모양이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의 마수 굴들의 봉인이 일제히 약화되고 있는 것을 보면 봉 인의 시효가 다 되어 가는 모양이 야.”
“그런 걸 할 수 있어?”
“……그 부분은 나도 모르겠지만. 안전한 일이라면 그렇게 납치해 갔 을 리가 없질 않겠나?”
“……개새끼들0], 진짜. 가만히 있 으니까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 지.”
리온이 탁자를 내리쳤다. 이건 셀 레스티아 개인에 대한 걱정의 문제 를 넘어서서 국격의 문제였다.
‘제국’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나라가 그렇게까지 치졸하게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6황자 개인의 단독 행동이라고는 해도, 후 계자로 지목 받고 싶어서 미쳐서 하 는 일이든 뭐든 간에 정도가 지나쳤 다.
게다가 저주라고? 애초에 황태후 와 다른 제국이 손잡았다는 것 자체 가 굉장히 불유쾌한 일이었다. 언제 부터 시작된 유착 관계인지는 알 길 이 없지만, 황제가 꼬맹이일 때부터
시작된 관계라니, 황태후로서는 아 직도 제 아들이 황제 자리를 꿰차지 못해 얼마나 안달이 나있을지 불 보 듯 뻔했다.
기가 막힌 리온의 얼굴을 보며 황제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셀레스티아…… 내가 기껏 찾아 서 고용해 놓은 비서가, 직접 모시 러 갔는데도 그깟 저주를 풀어 주겠 다는 조건에 매여서, 자긴 됐으니까 가라고 하더군.”
“……반.”
“그 조막만 한 여자를 데려다가 그딴 소리를 하게 만들고. 그러고도
황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지.”
리온은 열 받아서 머리가 뜨거운 와중에도 반의 가늘어진 눈 새로 보 이는 붉은빛이 섬뜩하리만큼 몹시 위험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본능적 으로 공포가 느껴질 정도였다.
셀레스티아가 떠난 이후로 줄곧 그의 곁에 있었던 그녀의 서류들을 흘끗 바라본 반은 놓친 무언가를 상 기하듯 다시 주먹을 꽉 쥐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 어.”
“제국 간 전쟁의 승률을 점쳐 볼
까 하고.”
가볍게 말하는 것치곤 말의 무게 는 천근만근이었다.
“……진심이야?”
반이 작게 웃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 나? 리온 티아헤브. 나의 유능한 오 른팔이자 나의 책사. 정황에 대한 설명은 모두 마쳤으니, 그대의 의견 을 듣지.”
“……폐하.”
“그래.”
무력 위협으로 그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 는다면 전면전이다. 반 치세 이후 가까스로 찾은 평화를 깨뜨리고 싶 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마음은 반도 다르지 않을 터.
리온은 이것이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한 선택지라는 것을 알고는 있 었지만, 반이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 은 이유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깊이 납득할 수 있었다.
반의 팔을 다시 한번 바라본 그 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의 의견을 따르겠습니
다.”
고
문밖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 들의 발소리에 눈을 떴다.
어디에서 엎어져 자도 항상 침대 에서 눈을 뜨던 부르크 제국에서와 는 달리, 눈을 뜬 곳은 줄곧 쪼그리 고 앉아 있다가 모포를 말고 잠깐 기댔던 창가였다. 익숙한 곳이 아니 라서 침대도 못 찾아간 걸까?
제대로 자지 못했더니 몸이 쑤셨 다. 길게 기지개를 켜며 내다본 창 밖에는 아직도 베가 주적추적 내리 고 있었다. 5층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풍경을 보자, 자연스레 황 제가 창문을 두드리던 것이 떠올랐 다.
무사히 잘 돌아갔을까, 황제 는……?
잠들기 전까지 줄곧 반복되던 생 각을 다시 떠올려 보았지만, 나로서 는 그 질문에 답을 찾을 길이 없었 다.
빗속을 어떻게 날아왔던 걸까?
순간 이동이라는 고급 기술은 국가 간에는 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 데…… 국경을 어떻게 지나 온 걸 까? 설마 혈혈단신으로 여기까지 왔 던 것은 아니겠지?
그런 걱정이 드는 한편으로는 잠 깐이지만 봐서 좋았다는 것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모든 것이 잘될 것 같다는 안심이 드니까. 괜히 황제겠 는가. 그에겐 사람을 압도하는 만큼 의지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혼자 있어서 불안했던 마음이 위로되고, 순식간에 마음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어제 품에 안겼던 순간에도 황제의 손과 숨이 뜨거웠는데, 지금 또 상처가 덧나 있진 않을까 하는 것. 여기까지 오 면서도, 그리고 가면서도 마력을 꽤 많이 썼을 테니까.
그놈의 저주 때문에 황제가 그렇 게 고생해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분 했다. 르베르티티를 탓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다만 부르크의 황태후와 테포다의 합작이라는 것이 짜증 나 고, 둘 모두의 졸렬함에 치가 떨렸 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을까?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시녀 두 명이었다. 그녀들은 내 몸단장을 도 와줄 모양인지, 깔끔하게 다림질된 옷가지와 머리핀, 수건 등을 들고 있었다.
“목욕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하겠다고 대답한 일은 분명 마법진의 해체라는 굉장히 이론적인 일이었다. 갑자기 목욕을 하라고 시 녀를 보내니 당황스럽긴 했다.
하나 그녀들은 내 심기는 아랑곳 않고 부지런히 머리를 감겨 주고 머 리를 빗겨 주고 좋은 냄새가 나는
기름을 발라 주었다. 사람을 납치해 놓고 꼴에 씻기고 입혀 준다고 고마 워하기라도 할 줄 아는 걸까?
단장을 끝낸 내게 그녀들이 입혀 준 옷은 온통 새하얀 로브였다. 천 을 아끼지 않고 풍성하게 많이 사용 하는 부르크 제국과는 다르게, 부르 크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테포다 제 국의 옷은 얇고 짧았다. 거울 속의 나는 장신구라곤 딱히 걸치지 않았 지만, 썩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 다.
다만 팔다리를 죄 덮는 스타일의 옷만 입는 버릇하다가 팔이 짧고 다 리가 드러나는 옷을 입으니 마음이
불편하긴 했다.
드러난 팔과 다리의 문양들이 꼴 보기 싫게 장식되어 있는 것에 절로 시선이 갔다. 멍청한 세렉은 이것들 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하곤 했다. 그 자식이 했던 말 따위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보기 좋은 모양새는 절대 아니리라.
황제가 가져다준 옷을 보고는 단 한 번도 불유쾌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얼마나 배려받으며 지내 왔던가.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원래 입 고 있던 옷을 가져가려는 시녀를 발
견하곤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요.”
“ 네?”
“거기 중요한 게 있어서……?
난 다급히 다가가 황제께 직접 하사받은 배지를 빼냈다. 그걸 손에 쥐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다시 이 방으로 돌아올 일이 있 을지 어쩔지 몰라, 나는 그것을 안 주머니에 숨겨 넣었다. 손끝에 배지 가 닿아 오는 단단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내게는 지금 그것 하나가 유일했다. 옷 위로 배지를 꽉 움켜 쥐고 나는 기도하듯 생각했다.
‘저주가 풀린 뒤에 황제 폐하를 뵙고 싶다’고. 수십 필의 말과 병사 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앞을 바라볼 줄 아는 주군에게, 응당 가져야 할 것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것을 얻어 낼 수 있다면, 어제 황제의 손을 물 리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 다.
난 작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기 대앉았다. 이 모든 일이 빨리 끝났 으면 좋겠다.
그 꼴로 얌전히 기다리길 얼마나 했을까? 6 황자가 그간 본 모습과 는 다른 아주 화려한 의복을 입고 나타났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 예를 차리지 않고 그를 맞았다. 황 제에게 예를 차리는 것도 매번 만류 당하던 내게 남은 묘한 습관 때문이 었다. 하지만 납치범 6 황자께서는 그런 내 태도가 반항하는 것처럼 보 였는지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그가 입은 옷은 술이 잔뜩 달린 어깨 장식과 금장 단추 등이 인상적 인 검붉은 것이었다. 주변국의 신분 에 따른 옷차림 정도는 당연히 알아 둬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게 상당
한 격식을 차린 옷이라는 것쯤은 알 고 있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이 길게 양옆으로 펼쳐지는 꼴이 익숙 하지 않을뿐더러, 누구한테 잘 보이 겠다고 치장할 기분이 아니라 영 심 기가 불편했다.
내게도 하얀 의복을 새로 주고, 저도 꽤 격의 있는 차림을 한다라. 공식적인 자리에라도 가는 걸까?
문득 몸이 굳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주를 먼저 풀어 주셔야 제가 움직이리라는 것쯤은 알고 계신 것 이지요?”
예상치 못한 말도 아닐 텐데, 쿤 은 농담이라도 하듯 대꾸했다.
“아직 입장을 모르나 본데, 그 황 제에게 그렇게 목을 매 봤자 소용없 는 거 아냐?”
“어쨌든 해 주기로 하셨잖아요. 제가 죽었든 살았든 의지가 없든, 어쨌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조건을 내걸지도 않으셨을 거라는 것 정도 는 알고 있습니다.”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그의 남빛
눈이 날 한참 바라봤다.
“넌 볼수록 아까운 존재다.”
“ 네?”
“선결 과제부터 해결하지, 그러 면.”
몸을 돌린 그를 따라 방을 나섰 다.
그를 따라 걷는 길은 꽤 길었지 만, 복도의 장식이 퍽 화려한 터라 지루하진 않았다. 부르크에서는 잘 하지 않는 동물의 박제 장식이 유독 많았고, 초상화도 복도를 따라 빼곡 히 걸려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눈으로 홅다가, 마
지막에 있는 거대한 그림에서 현 황 족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화려하고 넓은 의자에 대가족이 앉 거나 기대서 있는 그림이었다. 가운 데에 앉은 풍채 좋은 중년 남자가 현 황제. 그의 옆에는 인자한 얼굴 의 황비가 있었고, 그리고 자식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후계자 후보가 워낙 많아 6 황자 는 눈에 별로 띄지도 않았다.
그걸 보고 나니 그가 이렇게까지 아득바득 구는 이유도 알 만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창을 들고 선 문지기 두 명이 길을 내주었다. 우리가 들어간 방 안에는 묘한 샘
같은 것이 있었다.
난 우리가 계단이나 경사를 지나 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야 했다. 어떻게 건물 5층에 저런 샘이 있을 수 있지? 그것도 멀쩡한 실내에.
6 황자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불쑥 설명 했다.
“이건 다른 장소를 투영해서 보는 연못이 다.”
“다른 장소라니……?
목소리나 모습 같은 것을 이렇게 투영하여 보여 주는 것은 웬만한 기 술이 아니다. 이렇게 편리한데 일반
에 보급되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아마 테포다 제국에서도 황실 에나 이런 고정된 샘이 하나 있는 정도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부르크 황궁에도 비슷한 것이 하나 있었던 것 같긴 하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6 황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방 안에 있던 그의 수하들은 얼른 움직 여 그 우물을 지팡이로 두들겼다.
지팡이 끝이 닿은 곳에서부터 샘 안에 물감이 번지듯 어떠한 그림 같 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더 니 그리 오래지 않아 전체 샘에 사 람이 움직이는 형상이 비쳤다. 처음
에는 일렁이는 양잿물을 보는 것처 럼 부옇게 보였지만, 이내 투명하게 보였다.
샘을 통해 비치는 저편은 실내의 어떤 넓은 방인 것 같았다. 수많은 초에 불이 켜진 것이 가장 먼저 눈 에 들어왔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점으로 보였기 때문에, 이내 그 촛불들이 그리고 있는 모양이 오 망성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오망성은 부조화를 상징한다. 저 주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임에 틀림 이 없었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바로 저곳이 황제에게 저주를 건 공간인 건가?
일단 거기에 놀랐기 때문에 시야 가 좁아졌던 나는, 그 방 안에 기백 명은 될 듯한 사람들이 고요하게 서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외에는 통일된 복장에 비슷한 장신구를 걸 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부 분 ‘길드원’들인 모양이었다. 마법사 특유의 광물을 이용한 보조 도구를 주렁주렁 착용한 것만 보아도 그들 이 마법 장교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