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계속해서 숨 기고 있었던 거다.
글쎄…… 지금까지 숨겨 온 것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오
반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폈 다. 셀레스티아를 품에 안았던 감각 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 다. 제가 지금껏 겪어 온 그 모든 것이 ‘저주’ 때문이었다는 것부터 우선 정말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저주라고?
말이 쉬워 저주지……으 저주라는 게 어디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그 렇게 쉽게 저주를 걸 수 있다면 누
군들 고생하겠는가.
모든 마법에는 부효과가 존재했 고, 부효과라는 것은 약을 먹어서 지울 수 있을 뿐 애초에 생기지 않 는 법은 없었다. 타인에게 악의를 가지고 목을 조르는 일인 저주도 따 지고 보면 마법의 일종이라, 보통의 몇 배는 더 되는 부효과를 낳게 마 련이고…… 시전자는 목숨을 부지하 기 어려웠을 거다. 아마 한 명의 목 숨으로 끝나지도 않았을 테다.
그런 악랄한 계열의 마법이다 보 니 통상의 마법에 비해 연구도 지지 부진했고, 성공률도 희박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짓을 하다니……오
그런 것치고는 황태후는 제 상태 를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테포다 제국 황자의 의사였을까? 깜찍하기 짝이 없지. 누구인들 죽여 버리고야 말 테다.
제가 더 이상 무력 병합을 하지 않는 것은 그럴 힘이 없어서가 아니 었다.
황제의 위에 오르기 전까지, 그는 제가 앓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남 몰래 온 나라를 떠돌았던 적이 있었 다. 당시에 그는 평생을 전란과 함 께 살아왔던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 왔던 거다.
승승장구했던 그의 아비 덕분에 국경 내의 땅이 짓밟히는 비참한 일 은 없었다. 아마 부르크 제국 내에 만 계속 머물렀더라면, 평생 동안 굳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에는 물론 좋은 면도 있었다. 그것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일자 리도 많이 생겨나게 마련이었고, 운 송 수단이나 위생 같은 기술들도 개 발되곤 했다. 생활수준도 높아지고, 노예가 많아지니 일손도 늘어났다.
그렇지만 그 그림자는 너무나 짙 었다.
반은 더이상 살아남은 사람이 없는 채로 타들어 가는 도시도 보았 고, 보살필 이라곤 없는 아이들이 가득한 고아원을 지난 적도 있었다. 거기에는 꼭 패전국의 아이들만 있 는 것이 아니었다. 골디나와의 합병 은 황태후가 주선한 것이지만, 그 시커먼 속을 알면서도 반대하지 않 은 것은 골디나와의 특별한 인연 때 문이었다. 골디나의 고아원을 지날 때 만났던 아이들 중에는 저보다 더 뛰어난 마법의 재능을 가진 여자아 이도 있었던 것을 분명 기억했다.
그 아이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 까?
전쟁의 그늘에서 자란 아이들이 제대로 목숨을 부지한 채로 성장할 확률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심지어 그 재능을 제대 로 인정받고 개화할 확률은 정말 아 주 극미하겠지.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불평할 마 음이 들지 않았던 거다. 그런 불행 한 병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그저 묵 묵히 숨기며 제자리를 수행하기로 했던 거다. 마법이야 최대한 안 쓸 수 있다면, 안 쓰면 그만이라고 생 각했으니까.
물론 제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지 만.
하지만 그렇게까지 긴 시간 동안 생각해 왔던 무력 전쟁의 허망함에 대해서, 이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 모양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전면전을 걸어 온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황태후의 자식을 황제의 자리에 앉 히는 것이 훨씬 더 조종하기 수월해 보였다고 한들, 어찌 타국의 황태후 에게 그딴 저주를 걸게 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그 애송이의 나 이가 끽해 봐야 저와 비슷할 텐데, 아장거리는 나이 때부터 그런 생각 을 했다고? 아니, 그럴 리 없지. 다
른 놈이다. 다른 놈이 한 거니까 제 가 풀어 주겠다는 거겠지. 제가 한 짓이면 그런 제안을 할 리가 없다.
현 황제. 그밖에 없다. 그 이외에 는 이득을 볼 자가 없다.
“하. 하하. 하하하.”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도 나는 법인가.
으르렁거리듯 웃는 황제의 얼굴을 보고 리온이 뭔가 말을 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직 건네주지 못한 술잔이 리온의 손 안에서 찰랑거렸 다.
반은 그의 손에서 받은 술을 한
달음에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 정도 의 술로는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 다.
다시 한 번 주먹이 절로 움켜쥐 어 졌다.
셀레스티아의 생각을 하니 다시 속이 탔다. 저주라는 게 얼마나 걸 기 힘든 일인데, 지금껏 숨겨 왔다 가 이딴 일로 저주를 풀어 준다는 것도 우스웠다.
그럴 만큼 그녀가 필요한 거겠지.
하지만 그런 제안에 냉큼 응하는 그녀도 그녀였다. 어떤 일을 시킬 줄 알고?
아니, 그렇게 비서가 되고 싶다고 목을 빼고 있다가, 매일 눈이 시뻘 개질 정도로 공부해 대면서까지 얻 어 낸 자리면서. 그런 식으로 내팽 개치고 가겠다고?
그깟 저주. 존재 자체를 알아내기 만 한다면, 그가 직접 테포다의 황 제와 교섭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니, 교섭 정도로 풀어 줄지 아닐 지는 모르겠으나, 무력 협상을 하든 뭘 하든 그건 그의 문제였다. 왜 제 가 나서서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 리온.”
“너무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해. 셀레스티아 양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설마…… 아니지?”
“아직은 없는데, 이제 곧 있을지 도 모르지.”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 해.”
반은 깊은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긴 한숨을 흘렸다.
“글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무슨 소리야? 납치당한 비서를 데려오는 데 무슨 사연이 그렇게 길 어서 서두가 있어?”
“……뭐, 어차피 밤은 기니까. 적 당히 알아듣게 말하지.”
리온은 그답지 않게 시간을 끄는 것을 멍하니 보다가 술병을 통째로 들고 돌아왔다. 어지간히 심각한 일 이 아니라는 것을 예감했다.
“자, 이제 말해.”
“ 리온.”
“어 2”
“사실 내가 앓고 있는 어떤 증상 이 있다. 짐작했을지도 모르겠지 만……,”
증상, 이라는 말이 주는 불길한
느낌 때문에 리온이 움찔해 있을 때, 황제는 왼쪽 팔의 긴 소매를 걷 고 팔뚝을 내밀었다. 리온은 그 팔 에 얇게 새겨진 문양들에 절로 눈살 이 찌푸려졌다. 문신 같은 것이 아 니라 아주 최근에 난 상처처럼 보였 다. 마치, 한 시간 전쯤.
이렇게까지 극심한 형태로 나타나 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형태 자체 라면 그리 낯선 것도 아니었다.
“이건, 부효과의 흔적 아닌가?”
“ 맞아.”
“……꽤 오래된 것 같은 상처도
보이는데.”
단단한 근육 위로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난 상처들을 리온이 손을 뻗 어 만지는 것을 보다가, 황제는 불 쑥 말했다.
“사실, 나는 알약이 듣지 않아.”
“ 뭐‘?”
“부효과는 어느 마법사나 겪는 흔 한 증상이잖아. 다만, 나는 그걸 낫 게 하는 알약이 듣지 않는다고.”
“……세상에. 언제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리온은 대꾸할 말을 잃고 턱을 떨어트렸다.
줄곧 종교적인 이유라고 둘러대며 맨살을 보이려 하지 않는 황제의 태 도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런 병증을 앓고 있었다 고? 아니, 그것을 지금껏 숨겨 왔다 고? 무엇을 위해서 숨겼는지는 대충 알겠지만, 그걸 여태?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나 말고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 이나 있지?”
“내 전담 의사와 전임 비서, 현임 비서. 나머지는 내 아버지를 비롯해 서 전부 죽어 버렸으니 해당 사항이
아니고……-”
“……불손한 어투로 말하는 본인 이 황제니까 할 말이 없군.”
“아, 거기다 시종장과 황태후까지 추가해야 할지도 몰라. 황태후가 얼 마나 알아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 지만, 확신한 건 아닌 것 같아.”
황제의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 정도의 거대한 일을 여태껏 숨겨 왔을 줄은 몰랐 다.
“……많이 고생했겠군.”
“뭐, 그렇지.”
“그래서 원정 전쟁을 그만둔 거였
군. 나는 또……『
“그거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 보다 이 모든 것이 저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것을 방금 알아낸 참이 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저주? 무슨 전설이나 학 술서에나 나오는 거 아냐? 실제로 그런 걸 했다는 게……/
말도 안 되질 않냐-고 말을 이으 려던 리온은 황제의 팔에 아로새겨 진 상처들을 보며 입을 딱 다물었 다. 실제 증상부터가 말이 안 됐다. 그런 병증을 앓고 있는 이유를 대체 어디서 찾아야 되겠는가? 듣도 보도
못한 병이었고, 지금까지 앓고 있다 면 다른 사람도 아닌 부르크 제국의 황제도 치료하지 못할 병이라는 뜻 이었다.
저주라는 설명이 가장 그럴듯했 다.
리온의 검고 가는 눈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언제나 사람 좋은 것처 럼 웃고 다니는 그였지만, 적아를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드러 난 황제의 측근이니만큼 누구보다도 황태후의 큰 견제를 받았던 그다. 저와 황제를 향한 칼날에는 기민하 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반이 그의 흉흉한 기세를 보고서 는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녹은 얼음들이 달각거리며 소리를 내자, 잔을 슬쩍 흔들어 그 안에 작은 얼 음 알갱이들을 만들었다.
묘한 재주에도 리온은 전혀 놀라 지 않고 반의 입술만 쳐다보고 있었 다.
“ 뻔하잖아.”
“아무리 뻔하다고 한들 네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 황태후야?”
“……뭐, 전혀 연관이 없진 않겠 지만, 내 생각엔 그녀는 아니야. 만 약 직접적으로 그녀가 그런 일을 의
뢰했었더라면, 지금의 내 상태를 훨 씬 더 잘 활용해 먹었을 테고.”
“그러면?”
대답에 앞서 반은 술잔을 들어 리온의 손에 쥐어 주곤 제 술잔과 가볍게 부딪혔다. 얼음들이 사그락 사그락 소리를 냈다.
“비서가 없으니 잔소리를 안 들어 도 되니까 말이야. 술 먹기도 편하 군.”
“……왜 갑자기 딴소리야?”
반은 짜증난다는 듯 이마를 구기 곤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딴소리가 아니라. 그 저주를 곧
풀어 준다고 하더군. 웃기지도 않 지.”
“……그게 무슨 소리야? 저주를 누구 마음대로 걸었다, 풀었다 한다 는 거야? 거는 건 미치광이지만, 그 렇게 고생해서 한 짓을 푼다니, 누 가? 대체 왜?”
“황위 계승권 다툼 때문인 게 뻔 하지.”
“……설마.”
“그래, 셀레스티아를 데려간 테포 다의 6황자는, 그녀를 써먹기 위해 서라면 그 정도 조건도 불사한 모양 이다.”
저주를 풀어 주는 것을 조건으로 내건 것은, 부르크 제국에 대한 화 해의 제스처로 볼 수 있을지도 몰랐 다. 하지만 셀레스티아를 내놓으라 고 한 것도 아니고, 황성까지 들어 와서 납치해 간 것을 염두에 두었을 때는……오
리온이 그제야 이 일의 전말을 이해했다는 듯 입술을 비틀며 조소 했다.
“그 자식들은 네가 이렇게 오래 살아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군.”
“그래.”
“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런 대 범한 짓을 한 거겠지. 아주 큰 각오 를 하셨어.”
“이제야 풀어 주겠다는 건 이걸론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낸 모양이 지.”
별 쓸모도 없게 된 저주를 해체 해 주는 것을 조건으로 저들에게 필 요한 것을 얻어 낸다. 그들로서는 나쁠 것 없는 장사였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