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엉망이지 않게 살려고 비서를 고 용했는데, 한 놈은 그만두고 골병을 핑계로 해외로 떠나려고 해서 다시 끌어왔는데 골골거리고 있고, 새로 고용한 놈은 고용하자마자 타국에 끌려가서 말이지.”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그건 죄송하게 됐네요. 하지 만 새 비서를 들이셨을 것 아니에 요.”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죄송 한 줄 알면 처신을 잘해.”
‘잘해.’
이 말은 퍽 이상하게 들렸다.
나는 눈을 스무 번은 더 깜박이 며 그 말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렇게 테포 다 제국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도 영 이상한 일이고, 나를 보자마자 품에 가뒀던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 이었지만, 가장 이상하게 들리는 건 그 말이었다.
마치…… 나를 계속해서 비서로 두겠다는 것처럼 들리질 않나.
그는 절대, 사라진 사람을 구해 내기 위해 과하게 애쓰거나 누군가 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체 가능한 인력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협박’의 재발을 방지하
는 일이었으니까.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 와중에 도 손바닥 안에 닿는 그의 얼굴에서 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멍하니 손을 떼어 내는데, 그가 내 손등에 제 손을 겹쳐 왔다. 나는 황제의 뺨 에 손을 올린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양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로 그를 나무랐다.
“……아직 새 비서를 뽑지 않으신 거군요.”
좋은 말을 해 주려고 한 건데, 기 분이 상했을까? 아직 그림자 진 기 색이 사라지지 않은 붉은 눈이 나를 쏘아보았다.
“그게 뭐가 문제지?”
“다른 분도 아니고폐하의 일 이질 않아요. 궁내 장관님께서도 폐 하를 돌보는 사람의 자리를 공석으 로 두자고 하셨을 리 없는데어 쩌다 일이 그렇게 되었을까 싶어서 요.”
그의 눈이 순간, 방 안의 꼴을 죽 살피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 손을 조금 아플 정도로 꽉 움켜쥐었 다.
“여기서 더 긴 이야기를 해 보았 자 소용없을 것 같군. 가자. 꽉 잡 아라.”
가자는 말이, 어쩜 그렇게 달콤하 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온 건지는 모르겠 지만, 황제 본인이 나를 데리러 와 준 거다. 테포다 제국의 심장부로 잠입하는 것 정도를 할 수 있는 능 력자가 본인뿐이라서 왔겠지만, 일 개 비서 하나 데리고 가겠다고 스스 로 납신 것에 영광스럽고 감사해서 눈물을 흘려야 할 일이다.
하지만 나는 순간 심장이 쿵쿵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순간이 많았다.
선뜻 6황자의 일을 돕기로 결정 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 이제 와 서 생각하면 사실, 황제가 나를 오 해하지 않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황제에게 내가 항상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는 그 달콤한 명제를 놓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게 아 니라면, 황제의 곁에 있는 그 숱한 인재를 제치고 굳이 나같이 새파랗 게 어리고 출신도 불명확한 이를 비 서에 앉혔겠는가? 애초에 나를 노예 수레에서 구해 냈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이제 단단히 결심이 섰다.
나는 황제의 손 안에서 내 손을
빼냈다. 그는 내 행동이 믿기지 않 는다는 양 나를 쏘아봤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두고 가는 거라도 있나?”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나는 씩 웃었다.
그에게 감사한 일이 너무 많아서, 치료 같은 일이야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었지만 내가 없는 곳에서도 그 가 비참한 꼴을 겪지 않길 바라서.
“저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황제가 나를 노려보는 눈길은 이 제 눈에 익었다. 그는 내가 이런저 런 일에 고집을 피울 때마다 저런
눈을 하곤 했으니까. 제록스 강사의 일을 수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을 때도.
이제 그 표정은 무섭기보다는 미 안했다.
“죄송합니다.”
“……그딴 소리를 들으려고 온 게 아니다.”
“하지만, 저는 돌아갈 수가 없어 요.”
명백히 혼란스러운 얼굴이 나를 노려봤다. 그는 초조하게 비가 내리 는 창문 쪽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나를 보았다. 아직 정확한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그였지만, 이곳에 오 래 머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그의 어깨 위에 수없이 많 은 사람의 목숨과 삶이 걸려 있었 다.
답답한 듯 황제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셈이었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면?”
“이곳에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할 일이라니……?”
“6황자가 저를 데리고 온 목적은
테포다 제국의 언데드 굴의 봉인을 단단하게 하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솔직히 정확하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으니만큼 이해가 빠른 모양이었 다. 그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짜증나는 새끼로군. 제 나라 일 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것이지.”
“그 대가로 받기로 한 것이 있습 니다.”
“뭐지? 동생의 병이라도 치료해 주기로 했나?”
“아니오. 황제 폐하의…… 저주를 건 것은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
니다. 길게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황제 폐하께서 부효과 약이 듣지 않 는 것은 그 저주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저주를 거둬 주기로 했습니 다.”
황제는 아까 내가 손을 뿌리쳤을 때도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지 만, 이번에는 정말로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저주라고? 저주? 그 모든 것이……/
그때, 문밖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황제와 나
는 동시에 숨을 죽이고 문 쪽을 바 라봤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문 밖으 로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한둘이 아닌 것으로 보아 황자 가 직접 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는 매일같이 나를 방문해 내 의사가 바뀌었는지 물어보곤 했으니까.
“당장 가세요, 얼른!”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오겠지요. 또 뵐 때까지 부 디, 건강하시옵소서.”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물러났
다. 황제는 더 할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이를 갈더니 창밖으로 홀 쩍 뛰어내렸다.
창가로 가까이 다가가 바깥은 내 다보았다. 새까만 하늘 아래로 온 사방이 검었다. 가끔 움직이는 수풀 이나 건물 창의 빛 같은 게 시야를 사로잡을 뿐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바깥의 어디에도 황제의 모습은 없 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6황자는 창문 이 활짝 열려 있는 모습을 보고도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탈출이라도 할 셈이었나? 이 높
이에서?”
나는 대답을 입 안으로 한번 굴 려 보고서야, 새삼 깨달았다. 지금껏 나도 모르게 조금 망설였을지도 모 르겠다는 것을.
이렇게 되면 황제에게 나의 소용 은 끝이었으니까. 사실 내가 머리가 좋다느니, 조기 졸업을 했다느니, 그 런 것들은 모두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는 알고 있다. 노예 출신인 나를 그렇게까지 특별히 봐 주어서 놀랍도록 잘 돌봐 주신 것 도, 신분도 없어 반대가 그리 많은 데도 비서 자리에 앉혀 주신 것도, 결국은 그의 부효과를 돌볼 수 있는
내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 으니까.
“ 하겠습니 다.”
창가까지 다가가 빗물이 다 튄 창틀을 바라보고 서 있던 쿤이 몸을 급히 돌려 나를 바라봤다.
“ 뭐?”
“제의하신 그 일, 하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잘 생각했다.”
이걸로 됐다.
마지막으로 하나 있던, 황제가 나 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마저 사라지
게 되었지만, 그게 더 잘된 일이다. 애초에…… 지금 와서 생각하면 황 당할 정도의 인연이었질 않은가. 내 가 제국의 황제의 바로 옆방에 기거 하며 매일매일 대면하고, 가장 가까 운 곳에서 고민을 듣고 서로 투덜거 렸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너무 과분한 장소에 있었던 것이, 잘못된 듯 보이는 것이 수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쉬워하지 말자. 있어야 할 곳으 로 돌아온 것에 불과한 거다.
여기까지 찾아온 황제를 내가 보 내 놓고, 왜 이렇게 허탈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이게 맞다. 미약한 근거에 의지 한, 휩쓸리기 쉬운 감성에 의한 판 단은 결국 후회를 낳는다는 것을 나 는 배우지 않았던가.
잘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하염없이 같은 판단을 계 속해서 되새김질하게 되는지는 스스 로도 모를 노릇이다.
그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서일까?
밤이 늦었다는 핑계로 6황자를 다시 내쫓아 두고, 나는 침대에 얼 른 누웠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 았다. 창밖을 가득 메운 이국적인 북방의 분위기마저 기분을 가라앉히
는 데는 더욱 도움이 되었다.
리온은 황제의 방 응접실에 서서 같은 원을 그리며 계속해서 걷고 있 었다. 수심으로 가득 찬 그의 시선 은 창문에 딱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밤은 깊었고, 사방은 고요했다. 간혹 나뭇잎이 창에 스치는 작은 소 리라도 나면 고개를 홱 들었다가 다 시 실망한 강아지처럼 한숨을 쉬었 고, 문밖의 발소리라도 나면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
곤 했다.
한 시간째 그런 이상 증세를 보 이던 리온은 겨우 자리에 앉는가 싶 더니 다시 일어났고, 창을 여는가 싶더니 다시 닫았다.
“리온 티아헤브. 똥이라도 마려운 건가?”
허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 고서야 리온은 발을 멈춰 섰다. 그 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 다.
“반!”
“네가 이름으로 부르는 건 오랜만 이군.”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리온은 성질을 부리면서도 환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허공을 바라 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천장 쪽의 공기가 작게 흔들렸 다. 곧이어 누군가 펜을 대고 그리 듯이 몇 가지 어지러운 선분들이 생 겨나더니, 그것들이 빠르게 이어지 듯 사람의 형상이 되었고, 이내 원 래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듯이 황제 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중력의 영향을 모르는 사람처럼 둥둥 떠 있 다가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다시는 이런 걸 허락해 주지 않 아야겠어. 간이 다 쪼그라들어서, 이 러다 한 시간 안에도 늙어 죽을 수 있을 것 같네.”
“그런 것 때문에 죽을 정도의 담 이라면, 죽어도 어쩔 수 없지.”
“ 폐하!”
반은 원망의 소리를 들으며 망토 를 풀어 던지듯이 소파에 걸쳐 놓고 의자에 앉았다. 짜증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리온은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왜 혼자야? 못 만 났어?”
“만났지.”
“빼낼 수 없는 상황이었어?”
“아니.”
황제의 적안이 비서실로 이어지는 쪽의 문을 노려보았다. 리온은 대체 이해할 수 없는 대화의 맥락에 당황 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럼 뭔데? 설마 오기 싫다고 한 건 아닐 테고……
“오기 싫다고 하더군.”
“그게 정말이야? 하지만 셀레스티 아 양은……/
반은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는 리온에게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짊어지고 살아왔던 증상에 대해 설 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곤 혀를 찼 다. 모든 상황이 아주 귀찮게 꼬여 돌아갔다.
리온은 갑자기 대화가 뚝 끊기자 속이 답답한지, 얼음을 잔뜩 담은 컵 두 개에 약한 도수의 술을 따라 왔다.
그가 어릴 때부터 줄곧 마법에 대한 재능은 워낙 눈에 띄는 것이었 고, 그가 겪는 증상을 가장 먼저 알 아낸 부친은 그에게 누구에게도 말 하지 않아야 한다고 늘 당부하곤 했 다. 모든 약점을 완벽하게 숨기지
않으면, 황제의 지위에 있는 내내 구설수에 휘말릴 거라고.
그다지도 강한 분이셨고, 그다지 도 전장에서 승리만을 거머쥐었던 분이었는데도 항상 주변을 두려워하 며 살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