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리온은 그가 절 쏘아볼 때까지는 어떻게든 신경 쓰지 않고 대담히 말 을 이어 나가고 있었지만, 그의 손 안에 들려 있던 물건-아마도 직전 까지는 회랑의 벽의 일부였을 듯한 -이 찰흙처럼 으깨지고 있는 걸 보 자 저도 모르게 입이 다물어졌다.
황제는 쉽게 수긍하지도 쉽게 부 정하지도 않고 리온을 빤히 바라보 다가, 제 머리를 털었다.
“네가 보기에 내가 셀레스티아에 게 과하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 나?”
‘셀레스티아’라는 이름을 황제가
비로소 언급한 것이 그 납치 사건 이후로 얼마만일까?
속이 뜨끔한 리온은 눈 둘 곳을 찾아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여간 황제 직위의 제 친구는 눈치가 빠른 게 문제다.
“자네까지 안 하던 결혼 강권을 다 하는 걸 보니. 그런 건가?”
이렇게까지 속내가 뻔히 읽히다 니, 부정조차 할 수가 없다. 리온은 한숨처럼 털어놓았다.
“……솔직히 정상적인 관계처럼은 안 보이잖아. 내가 말은 안 하려고 했지만, 너, 그 방에 매일같이 들르
고 있고, 무슨 주인 잃은 망아 지…… 아니, 애인 잃은…… 아니, 아무튼. 일반적인 주종 관계 이상으 로 보이니까……/
“말을 함부로 하는군.”
“하지만 정말로-.”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내가 신 경 써야 하나?”
반은 심히 기분이 상하는지 짜증 스레 정원 방향으로 턱짓을 했다. 더 듣기 싫으니 가 보란 뜻이다. 리 온은 필사적으로 빠르게 말을 뱉었 다.
“아니, 오해하지 마. 나는 너
랑…… 폐하와 셀레스티아 양의 관 계가 몹시 건전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불건전해져도 몹시 환영하 는 입장인데 말이지. 그 뭐랄까, 네 동생은…… 그 황태후의 자식이니까 말이야. 신하 입장에선 정쟁에 휘말 리지 않은 후계자 한둘은 있지 않으 면 마음이 불안하단 말이야.”
“넌덜머리가 나는군.”
“아니, 그렇게 감정적으로만 생각 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넌덜머리 가 나. 황태후의 목을 따 버리기 전 엔 다신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 다.”
리온은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진력 이 난 듯한 황제의 얼굴을 보고 입 을 다물었다.
틀린 이야기를 한 건 아니라는 것쯤은 둘 다 알고 있을 터다. 하지 만 셀레스티아의 행방을 찾을 수 없 어 날이 서다 못해 짜증으로 가득한 그에게 지금 테포다 제국의 황녀랑 약혼을 권한 것은 너무 심한 일인지 도 모른다.
셀레스티아가 곁에서 그를 지키는 동안, 황제는 어쩐지 그 이전보다 더 유해 보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 게 좀 더 제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 는지도 모른다. 그냥 차츰 원숙해진
과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셀레스티 아가 없어진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 면 그녀의 영향이 컸던 게 틀림없었 다.
본디 반은 어릴 때부터 신경질적 이고 고집이 센 편이었다. 머리가 좋고 포용력이 있어서 아무 데나 성 질을 부리지 않을 뿐이었다.
“……알았어. 그보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첩자를 풀어서라도 다시 데려오지 그래?”
“글쎄. 살아 있다는 증거라도 있 으면 그 너구리랑 협상이라도 해 보 겠는데…… 지금의 정황에서는 전쟁 을 일으키기라도 하는 게 가장 빠른
게 아닐까.”
리온은 그의 붉은 눈동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 이 모두 진심은 아닐 것을 안다. 그 는 수하 한 명을 다시 데려오자고 제국 간 8차 전쟁에 도화선을 붙일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일말의 진심이 담겨 있다 는 것도 안다.
리온은 문득 그가 가엾게 느껴졌 다.
좀처럼 약한 모습을 내비치지 않 는 반의 한숨 소리를 듣고서야, 셀 레스티아가 제 짐작보다 훨씬 더 황
제에게 큰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비의 자리에 앉 을 이가 오해할 만한 사이’인 게 아 니라, 황제 본인만 모를 뿐 이미 꽤 마음에 깊이 들어와 있는 존재인 것 은 아닐까.
지금껏 그에게 그런 존재가 있었 나? 없었다.
그의 어릴 적 가장 친한 친구들 도 지금은 모두 수하가 되었거나 적 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는 조금의 집착이라는 것조차 약점이 되었고, 그는 그런 것들을 몹시도 피곤해 했 다.
우리에 가둬진 야생 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반.”
“ 음?”
“만약에 내가, 아니 우리가, 딱 하룻밤만 눈을 감아 준다면……?
황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는지 발을 멈췄다.
리온은 스스로도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 각은 있었지만, 이미 입에서 튀어나 오기 시작한 말들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말이야. 데려올 수 있 겠어?”
(4
내가 단독 행동을 해도 좋단
말인가?”
“언제부터 내 허락을 신경 썼다고 그래?”
“허락이 아니라-.”
반은 묵묵히 리온의 눈빛을 마주 보았다. 황제위에 오른 뒤 단 한 번 도 그는 ‘반’으로서의 스스로에 대 해서만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 다. 그는 항상 ‘황제’로서 책임을 지 고 행동해야 했다.
그런 그에게 이 친구는 지금 단 하룻밤, 단독 행동을 해도 눈을 감 아 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황제로서 그래도 괜찮은가?
반은 고맙다는 대답도, 긍정이나 부정의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한참을 친우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 득 중얼거렸다.
“황태후는 대체 왜 이딴 자리에 제 자식을 앉히지 못해 눈이 새빨개 져 있는지 물어나 보고 싶군.”
둘의 산책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내가 있는 장소를 다시 한 번 확인
했다. 그리고 혹시 탈출할 여지가 있는지도.
불행히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아, 나는 어제까지 있던 테포다 황실 구 석에 있는 방에 계속 갇혀 있었고, 창 문살은 그대로 튼튼한 채였으며, 문 앞의 경비병은 전혀 졸 기미가 없었다.
유배된 사람처럼 갇혀 있은 지도 오늘로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그냥 쿤 황자의 말대로 협조하겠다고 해 버리면 일이 쉬워질 텐데……소 그냥 자꾸 생각이 길어졌다.
탈출할 방법 같은 것은 없을 테 고, 누군가 데리러 와 줄 일도 없을
테다. 그런 것을 바라서 시간을 질 질 끌고 있는 게 아니라, 르베르티 티를 설득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 라면 쿤 황자가 한 말들이 진실인지 아닌지 정도는 내게 알려 줄 터였으 니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단 하나. 내 행동이 부르크 제국의 황제에게 어 떻게 비칠지에 대한 것이었다.
6황자가 제안한 일이 위험한 일 일 수도 있다는 것이나, 테포다 제 국 내의 세력 다툼에 나도 모르는 새 말려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크게 신경 쓰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사라진 내가 냉큼 그들
의 일을 도와서야…… 처음부터 그 럴 계획으로 도망친 것처럼 보일 뿐 이 니 까.
내가 멍청해서 납치된 거나 다름 없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돌아갈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쯤 알고 있 었으니까, 나에 대한 황제의 심경 같은 것을 신경 써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스
그에겐 믿을 수 있는 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괜한 배 신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았 다. 새까만 밤하늘에 비가 쏟아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가 눈
을 눌러 감았다.
툭
빗소리인가 생각했는데 창문을 두 드리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등짝에 소름이 쫙 돋았다. 테포다 의 건물은 장식이 유독 없었다. 밟 고 올라설 조각이나 난간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여긴 5 층. 유령 같은 것을 믿는 건 아니지 만 염려해 볼 가능성은 많다. 우호 적인 의도로 창에서 접근하지는 않 을 거다.
머리칼이 쭈뼛쭈뼛해져선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맡에 숨겨
놓았던 각목-장식장을 부러뜨려 만 들었다-을 꺼내어 꽉 쥐고 창을 쏘 아봤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빼고는 함부로 무기를 들고 덤비지 마”라던 황제의 말소리가 귓 가에 쟁쟁했다. 그가, 그리웠다. 이 상하리 만큼.
하지만 감상에 빠져 있을 때는 아니었다. 침대에서 뛰어내리듯 내 려가 창문틀과 벽 사이의 그늘진 틈 에 몸을 숨기고 서서 각목을 바짝 감아쥐 었다.
끼이익.
창문 걸쇠를 어떻게 풀었는지, 창 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들어 있었다면 듣지 못했을 정도 로 작은 소리였다. 틀림없이 방문 바깥에 선 경비도 듣지 못했을 테 지.
꼴깍.
절로 침이 넘어갔다.
턱. 위로 밀어올린 창문이 천장 쪽 창문틀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 고, 창 안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기 척을 쫓았다. 물에 젖은 발이 땅에 닿는 소리. 그리고 침대 쪽을 향해 다가가는 그림자. 기회가 있다면 방
심하고 있을, 지금 단 한 번뿐이다.
정면으로 맞붙었다간 승산이라곤 없을 게 뻔한 거대한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걸치고 있는 건 특 징 없는 검은 망토였다. 심장이 터 질 듯이 두근거렸지만, 재빨리 각목 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순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판단 할 수 없었다. 내 접근이 발각되었 구나 하고 느낀 순간에 손목이 꽉 붙들렸고, 각목이 바닥에 깔린 폭신 한 양탄자 위로 떨어졌고, 팔목이 붙잡힌 채 내 몸은 그자의 몸에 폭 안겼다.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이 묻혔다.
버둥거릴 겨를도 없이 그리움이 끼쳤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도 나는 순간 값비싸고 독특한 시트 랄 계열의 향에, 판단 이전에 말을 먼저 뱉었다.
“……폐……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그는 나를 더 꽉 안았을 뿐이었다. 상대의 정체를 알고 나니 마음은 더 혼란스러워졌지만, 끝 간 데 없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 다. 괜한 눈물도 솟았다.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셈인 듯 보이던 그는 나를 안은 게 실수라는 듯 몸을 물렸다.
내 얼굴을 확인할 생각이었는지, 혹은 제 얼굴을 내게 확인시켜 줄 생각이었는지, 그는 내게서 몸을 조 금 떼어 내고 시선을 맞춰 왔다. 나 의 황제 폐하, 나의 주군이 거기에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그늘진 방의 색에 섞여 음울하게 보였고, 얼굴도 어쩐 지 많이 날카로워져 보였다. 더할 나위 없이 잘생기고 또렷한 이목구 비를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 보았다. 그는 내가 얼굴을 더듬어
대는 데도 제지하지는 않았다.
얼굴을 보지 못한 지 한 달? 아 니, 3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 의 인상이 이토록 달라질 수 있을 까?
“간지럽다.”
하지만 그의 뺨을 한참 만지작거 리고 있자, 황제가 작게 웃었다. 내 가 익히 알던, 내게 겨우 보여 주게 되었던 그 미소가 거기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조금 엉망으로 자란 그의 수염을 엄지로 쓸었다. 아무리 몸에 손대는 걸 싫어한다곤 하지만, 미용해 주는 시종들을 물리
치지는 않는 그였는데. 그래도 아주 내치기만 한 것은 아닌지 며칠이나 깎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지 만……오 매일 단정하기가 칼 같았던 그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어쩐지 가 슴이 시린 꼴이었다.
그래도 날 본 게 반가운 건지, 그 런 음울한 기색의 얼굴에는 한 줄기 반짝이는 기색이 보였다.
감히, 그러면 안 될지도 모르겠지 만…… 그의 까끌까끌한 볼과 이마 를 나도 모르게 쓸어 보게 되었다. 언제나와 같이 열이 그득한 그를 만 지는 것은 색다른 감각이었다. 차갑 던 내 손바닥이 서서히 데워지는 것
이 느껴졌다. 그는 내 손이 가는 대 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왜 이렇게…… 엉망이세요.”
부르크에 있어야 할 내 황제께서 는 미간을 좁히고 인상을 구기며 입 을 열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