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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59화 (59/103)

- 59화

“이 아슬아슬한 구도를 지속하는 것도 언제까지나 할 수는 없는 일이 니까요……오 이번 일이야말로 반드 시 성사시켜야 합니다. 비밀리에 준 비해 주었으면 해요.”

“……앞으로 두 달 남았군요.”

“ 네.”

“알겠습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비장의 수도 마련하고 있으니, 너무 얼굴 굳히지 마세요.”

부르탱은 알 수 없는 그녀의 말 에 궁금한 듯한 눈을 했지만, 황태 후는 그저 웃기만 했다.

부르탱 고문관이 물러간 뒤, 황태 후는 한참을 더 창밖을 내다보고 서 있다가 시녀를 불러들였다. 시녀를 통해서 불려 온 것은 온몸을 흑색으 로 감싼 여인이었다.

“네, 부르셨습니까.”

“그래. 기사라고 하던 그 시종장 의 부인은 찾았나?”

“그것이…… 아직입니다.”

“한시가 급하다.”

“급히 수배하겠습니다.”

“말로만 급하지 말고, 정말 빨리 일을 처리해 줬으면 좋겠어. 네 길

드에 부은 돈이 어마어마하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그래, 가 보거라.”

“천세 만세 하시옵소서.”

항태후는 그녀가 물러간 뒤에도 한참 동안 거기 그대로 서서 창밖을 감상했다. 비는 나라를 삼킬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이 비의 계절이 끝나면, 곧이다.

모든 것의 끝이자 모든 것의 시 작, 정권 교체를 도모할 때가 다가 온다.

문득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는 그

녀의 머릿속에 와들와들 떨던 시종 장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쿠키 소동으로 애를 먹느라 한동안 까먹 고 있었는데, 도대체 그 시종장은 왜 황제의 부효과가 낫지 않는다는 이상한 소리를 한 걸까?

시종장의 증언 같은 것은 무시해 도 좋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것이라 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제 부인의 목숨을 걸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시종장이 그 뒤로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진 것도.

마지막에 쓸 수 있는 수를 하나 쯤 마련해 두고 싶은 마음에 헛다리

를 짚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황제에게 유일한 약점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 해서.

짧은 재회

“황실 비품들은 내구성이 안 좋 아.”

리온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 는 제 친우를 쏘아보았다. 황제 폐 하께서는 방금 황궁에서 가장 중요 한 물건 중 하나인 옥새를 쥐다가 ‘실수로’ 그것을 가루로 만들어 버 리시곤 저런 소리를 하고 계신 것이 다.

그는 주위에 듣는 귀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제 손아귀

를 노려보고 있는 황제의 곁으로 다 가갔다. 반도 더 이상 업무를 볼 의 지가 없는지-아마 의지가 있어도 옥새가 없겠지만- 깨끗하게 업무를 그만두고 의자를 물렸다.

둘은 종종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 하곤 하는 긴 회랑 쪽으로 나섰다. 아예 시야가 탁 트인 회랑 쪽이 주 변의 귀를 덜 신경 써도 되었다.

먼저 운을 뗀 것은 황제였다.

“호박 수확 건은 잘 해결되고 있 나?”

황제는 제게 반하는 인사들을 내 치거나 반역죄로 몰아 수급을 칠 계

획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계획은 저 런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남 들이 못 알아듣게 할 생각으로 지은 별칭치고는 엄청난 악의가 느껴졌 다.

“호박들이 아직 다 여물지 않아서 말입니다.”

“호박을 빨리 수확해야 쪄 먹든, 부쳐 먹든 할 것 아닌가.”

“하하. 요즘 수확량이 줄어 심기 가 많이 불편하신 것 같습니다.”

반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으 로 제 친우를 흘끗 바라보곤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국내 사정은 됐고, 해외여행이나 떠나서 다 늙은 너구리 놈을 확 죽 여 버릴까 생각 중이다. 어디에 있 는지는 뻔할 텐데.”

리온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 다.

대화의 방향과 상관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다 늙은 너구리’가 누구 인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이 황제 폐하께서는 내내 비서 납치 사 건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티를 내 고 다녔지만, 단둘만 남을 때마다 겨우 본색을 드러내시며 “그 너구리 같은 테포다의 황제를 죽이는 게 일

이 깔끔하지 않을까? 그 집 자식이 벌인 일이니까 아비가 책임져야지” 같은 위험한 소리를 해 대곤 했으니 까.

즉, ‘다 늙은 너구리 놈’은 규모도 그리 차이 나지 않는 옆 제국의 현 황제를 두고 하는 소리인 거다. 간 도 크지.

“큰일 날 소리를 또 하시네.”

리온은 차분하게 앞서 걷는 친구 가 영 걱정이 되었다. 본디 대놓고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들은 예상이 가능한 법이지만, 감정을 묵혀 두는 사람들은 언제, 어떤 짓을 할지 모 르는 법이다. 게다가 셀레스티아가

납치된 사건 이후로 열흘이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초조한 마음도 이해 가 됐다.

“셀레스티아 양, 테포다 제국에 잡혀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건…… 그 황자 때문이야? 쿤 황자랬나?”

황제는 대답하는 게 마뜩잖다는 듯 팔 받침 위를 묵묵히 두드리기만 하다가 뒤늦게야 입을 열었다.

“그래. 그놈이 데려갔으니까. 안 봐도 뻔한 거 아닌가.”

“테포다 제국에서 셀레스티아 양 을 데려갔다니……소 인질치고도 미 묘한 인물이고, 지금 딱히 전시 상

황도 아닌데 괜한 도발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으 거, 어지간히 이상한 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너랑 셀레스티아 양 사이를 좀 더 그런 쪽으로 오해한 거 아냐? 막…… 죽고 못 사는 사이라든가.”

“……그런 오해를 하고 데려갔으 면 정말로 한판 하자는 거 아닌가.”

그건 그렇다.

리온은 아무리 생각해도 셀레스티 아 양을 다른 나라 황자까지 직접 납시어서 데려간 이유를 알 수 없어 서 고개를 갸웃했다.

“뭐 어찌 됐건 간에, 아직 살아 있다고 가정을 해 보자고.”

“그래.”

“좀 더 외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 도 있겠지만……소 황태후가 걸리긴 하는군. 우리가 외교석상에 앉기도 전에, 황태후가 그 사건을 어떤 식 으로 왜곡할지 뻔하디뻔하질 않나? 자네랑 비서랑 정분이라도 나서 나 라를 망친다는 식으로 소문을 퍼뜨 릴 거라고.”

“그딴 소문만 나면 다행이지.”

황제 반은 작게 중얼거리곤, 생각 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다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마 그런 식으로는 안 될 거야.”

“안 된다고?”

반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고개 만 돌려 눈을 맞췄다.

“애초에 그만한 ‘필요’가 있어서 황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국내로 잠 입해 들어와 데려간 거다. 내가 다 시 내놨으면 좋겠다고 말한다고 해 서 냉큼 내놓을 거라면 그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았겠지. 뭐, 땅덩어리라 도 크게 잘라 준다면 내놓을지도 모 르겠지만……/

리온은 들으면 들을수록 뭐가 이 렇게 복잡한가 싶었다. 유능한 새 비서를 들였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들이 수월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 는데.

이건 뭐, 비서는 사라졌지, 황제 폐하의 심기는 평소의 다섯 배는 불 편하시지, 비위 맞추기는 어렵지, 게 다가 황태후는 무슨 꿍꿍이속인지 또 손님들을 하루 종일 만나 대지. 게다가 무엇보다도……,

“아카데미 건은 좀 마무리됐어?”

반은 지하 감옥에 있는 처참한 몰골의 몇 명의 범죄자들을 떠올렸

다.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아카데미 학생들을 대 상으로 범죄를 획책했던 또라이들은 지금 나란히 고문실에 몸을 뉘고 있 을 터였다.

“생각보다 여론이 빠르게 잠잠해 진 건 다행이야.”

“그래서 뭐 건진 건 없고? 정보 는?”

“글쎄. 뻔하지, 그 자식들은 제게 지령을 내린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 고 있더군. 쿤 황자가 무슨 속셈으 로 죄다 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의 말대로 국내 세력 간의 내분을 유도하기 위한 짓이었다고 보는 게

가장 빠르겠더군.”

“……그렇군.”

리온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황태 후는 속이 빤히 보이는 작자였다. 오히려 그래서 공생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적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 가, 황태후의 수작질이 정도가 점점 심해져서 더 이상 참고 봐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심한 짓을 하는 이유 가 뭐래?”

“글쎄.”

“정말, 나름대로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이제 와서

는 진절머리가 나. 제 아들이 황위 를 물려받는다고 한들…… 제가 다 망쳐 놓은 그 엉망진창인 나라를 가 지고 대체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거야, 그 황태후는?”

“나도 그게 궁금하군. 그 상황을 황태후와 내 동생님께서 수습하는 광경을 꼭 한 번 보고 싶은데.”

황제위라도 물려주겠다는 소리처 럼 들리지 않는가. 리온이 기겁해서 반을 쏘아보자, 그가 비릿하게 웃었 다. 아무래도 그도 이 사태에 진력 이 난 게 틀림없었다.

“랑그샤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한 것도 그거랑 관련 있는 거야?”

“뭐, 그렇지. 찾았나?”

“하하, 그 정도 일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지 않겠습니까.”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한 얼굴이 무시당하자, 리온은 입을 삐죽거리 며 보고를 계속했다.

“랑그샤는 흔하디흔한 전쟁 포로 로 잡히셨지만, 아무래도 좀 정황이 이상하긴 해.”

“이상하다니?”

“아무래도 내 생각엔…… 거기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 같던데.”

반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일부러 시종장의 부인을 잡아 두고 시종장에게서 정보를 캐 내려 한 건 아니겠지.”

“거기까진 너무 짚은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말해서 내 생각도 그 렇긴 해. 좀 더 파 볼게.”

“현재 위치는 알아냈나?”

“그럼요. 저같이 유능한 부하가 그 정도는 합죠.”

“가능하다면 이쪽이 비호하고 있 는 게 마음이 편하겠는데.”

“……랑그샤를?”

“그래. 대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 주란 얘기는 아니다. 몰래 빼 내.”

“어렵지야 않지만……오 대체 무슨 일인진 몰라도 지금까지의 철칙을 깨다니, 좀 이상할 정도군. 좋아, 이 건은 내가 처리해 둘게.”

“선수를 뺏기진 않았으면 좋겠 군.”

리온은 알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 재의 반이라면 부인을 잃은 시종장 의 슬픔에 대해서 조금쯤 공감하는 능력이라도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 다.

슬슬 연못을 둘러싼 회랑을 한 바퀴 돈 그들은 두 번째 바퀴로 접 어들었다. 하루 종일 우중충하던 하 늘에서는 비가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리온은 어물쩍거리면서 한참을 반 의 뒤를 따라 걷기만 하다가, 세 번 째 바퀴로 접어들기 직전에야 말을 꺼냈다. 그에게 이 안건을 맡긴 수 많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 더라면, 그도 제 목이 간당간당한 이런 얘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았 다.

“그런데, 황제 폐하.”

“뭐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여론도 흉

도:

흉하고,

병합 건으로 말도 많고 그

런데…… 아예 새로운 화두를 꺼내

보는 건 어떤가 싶어서.”

“새로운 화두?”

침이 절로 넘어갔다. 하지만 언제 까지고 미뤄 둘 수도 없는 이야기니 까.

“비키인지 뭔지 하는 여식이랑 결 혼하는 게 최선으로 보였었는데, 지 금까지는……소 이대로 그냥 뒀다간 폐하의 마음에 안 차는 그 여자를 죽여 버릴까 봐 걱정이니까 말이야.

그냥 새로운 황비 후보를 물색해 보 는 건 어때?”

“지금 이 시점에 갑자기 결혼 상 대를 물색하란 말인가?”

“……아니, 좀 진정해 봐. 이럴 때야말로 시의적절하다고.”

“어디가?”

“아예 타국의 황녀도 좋지 않을까 해서 후보도 물색해 뒀어. 국내 세 력과 얽혀 있을 일 없으니 편하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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