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그렇게까지 제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겠다니 하는 수 없군.”
“……네‘?”
“본래 제안할 생각이었지만, 이제 와서 말하려니 별로 입맛이 달진 않 군.”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어투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잠깐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네 그 잘난 황제의 저주를 풀어 준다면, 그렇다면 그땐 테포다 제국 의 사람이 되겠느냐?”
나는 한껏 기합을 넣고 대답하려 고 준비해 두었던 말을 모두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저주를 없앨 수단이 있단 건가?
“……그런 게 정말로 가능한 겁니 까? 아니면 농을 하는 겁니까?”
“가능하니까 가능하다고 하는 거 지.”
“그렇게 어렵게 긴 세월에 걸쳐 완성했을 게 틀림없는 저주를 고작 저 하나 때문에 풀어 주겠다는 말을 믿으란 겁니까?”
“그깟 저주, 별로 소용도 없는 것
같고. 아바마마도 그런 걸 내주고 얻을 수 있는 게 언데드 굴의 봉인 이라면 날 지지하실 거다. 아니, 오 히려 칭찬하시겠지. 칭찬? 그것도 아니지. 이 사태를 해결해 낼 수 있 는 건 나뿐일 테니, 눈이 좀 뜨이시 겠지.”
그깟 저주, 별로 소용도 없다고?
권력에 눈이 시뻘건 황자를 바라 보았다. 내 능력을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에 기가 질렸다. 내가 황제의 부효과를 완화시켜 주 고 있다는 것까진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저주를 풀어 주겠다면 나
쁜 조건은 아니지 않겠는가.
나는 확답을 원했다.
“정말로 풀어 줄 생각이 있는 거 죠?”
“그래. 그것들은, 그 망할 괴물들 은 공포심이다. 그놈들을 치워 버리 지 않는 이상 테포다 제국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거야. 공포에 떨다 못해 제국민들이 달아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어.”
진지하게 말하는 그가 웃겼다. 그 저 황제의 자리에 앉고 싶을 뿐이면 서.
“그것 때문에 저희도 고생이 많아
요.”
날 바라보는 쿤의 눈빛이 어쩐지 서늘했다.
“고생이라. 그렇겠지. 하지만 넌 모르겠지만, 아니 그 괴물 같은 황 제가 있는 이상, 부르크 제국민들은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쪽은 부르크 황제처럼 무식하게 혼자서 다수를 처리하는 그딴 건 불 가능하니까.”
제 할 말을 마치고 대답을 기다 리는 그를 보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여기서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 선의 답변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테포다 제국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라는 것 하나밖에 없었다.
내 처우의 개선을 생각하더라도 그랬고, 반 황제를 생각해도 그랬다. 그에게 내가 필요한 마지막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이 어쩐지 아쉽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도 일순간이었다. 그가 마법을 쓸 때마다 얼마나 고통 스러워했던가를 떠올리자, 쉽사리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황을 좀 더 살피지 않 고 바랐던 조건이 맞다는 듯이 거래 를 성사시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
다.
난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 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까다롭게 구는군.”
애초에 사정 설명도 하지 않고 사람을 납치해 놓고서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황자다.
아니꼬우면 그만두라는 눈으로 그 를 쏘아보자,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 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굵직한 빗방울이 자꾸만 창문을 때 렸고, 뭉개져 흩어지는 빗방울을 보 며 황태후는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따라 서늘한 날씨 때문에 숄을 한껏 두른 채였다.
또%%
―I ―1 ―1 -
“뭐지?”
“접니다.”
“아아,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고문관 부르탱이 고 개를 내밀었다. 황태후는 그의 듬직 한 어깨를 흘끗 바라보곤 웃으며 말 했다.
“그 뒤로 여론은 좀 어때요?”
“생각처럼은 잘되질 않은 것 같습 니다. 황제가 아카데미에 나타나지 만 않았더라도, 지금쯤 골디나며 새 로 병합된 이주민들에 대한 반발이 상당했을 터인데…… 딱히 그런 혐 오 감정이 퍼질 기세는 안 보입니 다.”
“……쯧, 그 까마귀같이 생긴 놈 은 태어날 때부터 내 앞길을 가로막 더라니.”
황제의 고귀한 혈통의 상징인 흑 발을 두고 하는 말에 부르탱은 어깨 를 움찔했다.
그들은 이 사건을 아주 오래 계 획해 왔다.
황제를 실각시키는 일은 그들에겐 사실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유순하게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언제가 됐건 한 번은 칼을 빼 들 위인이 현 황 제였다. 확실한 명분을 얻기만 한다 면, 그리고 그 명분으로 끌어들인 세력이 황태후 측의 세력을 훨씬 뛰 어넘기만 한다면. 그는 황태후 측 인사들을 모조리 물갈이하고, 때에 따라선 죽여 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황태후와 부르탱은 잠깐 시선을 마주치곤 각자 고민에 잠겼다.
독약을 먹여도 죽질 않지, 언데드 소굴에 보내도 살아 돌아오는 게 황 제였다. 정치적인 거대한 실수가 있 으면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까 했지 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실각시켜 버릴 수 있을까?
그나마 그의 가까이에 있는 인재 들을 하나하나 없애는 것이 황태후 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시 종장이 뜻하지 않게 손아귀에 들어 온 것은 그래서 반가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시종장의 퇴임이 갑자기 진행되어 버리더니 종적을 알 수 없 게 사라져 버린 거다. 이제 그가 했 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알아
내기는 더욱 묘연해진 셈이다.
테포다 국 측에서 비서를 내놓으 면 좀 더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겠다 고 이야기를 꺼내 온 것도 처음에는 좋았다. 혹시라도 황제가 비서에게 집착이라도 해 준다면, 꽤 괜찮은 협박의 빌미를 잡게 되는 셈이 아닌 가? 그렇지 않더라도 실정이라도 해 준다면 그만큼 반가운 일이 없었다.
하지만 비서가 없어졌다고 황제가 난리라도 칠 줄 알았는데. 덤덤하게 구는 건 재미가 없었다. 처음엔 수 사라도 하는가 싶더니만, 황제는 그 문제에 관심을 잃은 듯 굴었다. 해 당 안건이 회의 시간에 튀어나오더
라도, 뭐 그런 다 지나간 문제를 들 추냐는 듯한 눈을 했다.
“하아……-”
절로 한숨을 쉰 황태후는 쥘부채 로 얼굴을 가리곤 연거푸 한숨을 내 쉬었다.
저런 얼음 같은 놈에게 무슨 약 점이라도 하나 있을까 기대하느라 소모한 심력이 아까울 정도였다.
브루탱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 었다.
“그런 것보다 마법 장교들은 어떻 게 되었습니까?”
만족스러운 화두가 나오자, 비로
소 황태후의 얼굴에도 작은 웃음꽃 이 피었다.
“아아, 그것 말이야. 테포다의 6 황자에게 비서 따위를 내주고 그런 멋진 부대를 얻은 것은 잘된 일이에 요. 생각보다 수월하게 잘 크고 있 는 것 같더군요.”
“정말로 황제의 실력에 대항할 정 도가 될 것 같습니까?”
“이대로라면 그것도 요원한 일만 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부르탱이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회를 비롯한 황국 내 세력의 대부분을 그들이 장악하고
있음에도 황제를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은 황제 개인의 무력이 지나치게 강했던 탓도 있었다. 검술을 쓰는 기사의 경우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수로 압도할 수 있었지만, 마법은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무력으로 들고 일어났 다가 도망이라도 쳐 버렸다간 일이 꼬인다.
그러니 황제에게 대항할 실력을 가진 마법사의 확보도 굉장히 중요 한 일이었다. 골디나와의 합병은 기 실 내분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이 가 장 컸지만, 합병 과정에서 얻은 마 법 장교들이야말로 진정한 수확이었
다.
그런 그들에게 테포다의 6황자가 알려 준 ‘비책’을 전달하자, 그들의 실력은 실로 괄목상대한 것이 되었 다. 황태후는 요즘 그들의 성장을 보는 재미로 자주 마법 장교들을 방 문하곤 했다.
부르탱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 황 태후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 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마법 장교들 이 꼴 보기 싫은 마음이 더 컸다. 황태후 마마의 사랑을 등에 업고 우 쭐거리며 시가지에서 마구잡이로 마 법을 써 대는 모습이라니.
그는 최대한 우회적으로 제 심경
을 표현했다.
“잘된 일이긴 합니다만, 저는 좀 걱정이 되긴 합니다. 그렇게까지 비 약적으로 빠르게 마법 실력이 늘다 니…… 들어 본 적도 없질 않습니 까.”
모처럼 기분이 좋았던 황태후는 얼굴을 팍 찌푸렸다.
“그거야 테포다의 6황자의 실력과 깨달음, 즉 성취가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겠지요. 본디 높은 성취에 선 자가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그 리 어렵지 않은 법입니다.”
“그렇게 마법의 성취를 높이는 게
쉬운 일이라면, 도대체 왜 그들은 지금껏 그리하지 않았겠습니까? 골 디나야말로 마법 유학도 보내곤 하 는 마법 성지이질 않습니까?”
황태후는 뾰로통하게 맞받아쳤다.
“그거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골디나의 일개 마법 장교들은 테포 다 제국의 유서 깊은 황실에 묻혀 있던 비책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 을 뿐이겠지요.”
“그건 그렇겠습니다만……『
“그 이야기는 그만하세요.”
부르탱은 그리 납득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황태후의 단호한 대답에
말꼬리를 늘릴 수도 없었던지 얌전 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현 황제의 지지 세력들은 황제의 무력 때문에 몸을 낮추고 있는 자들 도 많으니까요. 그들을 길러 놓고 나면 판도도 달라지겠죠.”
부르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름다운 황태후의 완벽한 자태를 보다가 문득 침을 꿀꺽 삼켰다. 한 시 바삐 공을 세워서 저 아름다운 황태후의 총애를 사고 싶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실책을 떠올리며 물었다.
“마법 공격, 저번에는 황제가 성 가시게 굴어서 제대로 성공하지 못 했지만 다음에는 다를 겁니다. 그다 음 목표는 어딥니까?”
황태후와 부르탱은 티 테이블 위 의 낡은 천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수도의 대략적인 구성이 그려져 있 는 낡은 장식품이었다. 아카데미 건 물이 있는 곳에 붉은색으로 점이 찍 혀 있는 것 외에는 별달리 눈에 띄 는 것이 없었다.
“글쎄요. 유동 인구가 많고, 귀족 들이 펄펄 뛰며 일어날 수 있는 곳 이 어디가 있을까요.”
“고문관, 저는 이미 생각해 둔 곳 이 있답니다.”
“오, 어딥니까, 황태후 마마.”
“다음 목적지는 바로 황제의 생일 연회가 어떻겠습니까.”
부르탱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한참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황태후 가 슬쩍 붉은 장식의 차받침을 올려 놓은 황궁 자리가 눈에 확 들어왔 다.
“……이번 일에 많은 것을 걸어야 겠군요.”
황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그 붉은 머리의 비서를 테 포다의 황자에게 쥐어 주고 난 직후 의 일을 그녀는 잊을 수가 없었다. 찻잔을 앞에 두고 사람을 협박하던 황제의 그 선연한 붉은 눈. 분노에 가득 차서 사람을 죽일 듯이 굴었 던, 저를 개미만도 못하게 취급하던 그 얼굴을.
그때 알았다. 그가 소문대로 정치 에 무관심하지도, 칼에 미친 바보도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 렇게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모든 일 의 원흉을 알고 있다는 듯 저를 찾 아오다니……, 그는 머지않아 이 모 든 일들의 시작점에 서 있는 그녀를
처단하려 들 것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했다. 아직 그녀에게 든든한 세력이 남아 있을 때. 황태후를 비호하는 세력들 이 황제를 견제할 수 있을 때.
그녀는 무심한 듯 제 목을 쓸었 다.
그깟 목이야 언제든 달아나도 상 관없었지만, 제 아들에게 그 황좌를 쥐어 주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 다. 제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 제국의 황제에게 시집을 왔던가. 검 을 휘두르는 것 말곤 모르던 그 멍 청이에게.
그 정도는 응당 누려도 되었다, 그녀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